감독 : 롤랜드 에머리히
주연 : 카밀라 벨, 스티븐 스트레이트
개봉 : 2008년 3월 13일
관람 : 2008년 3월 13일
등급 : 15세 이상
오랜만에 만나는 블록버스터
한동안 제80회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을 챙겨보느라 조금은 지쳤습니다. 아카데미 영화제가 그리 작품성을 중요시하는 영화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명색이 영화제라고 흥행성이 부족한 영화들로 포진되어 있는 바람에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을 보기가 그리 쉽지는 않더군요.
아카데미 작품상 노미네이트된 영화중 아직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못 봤지만 이쯤에서 맘도 편하고 몸도 편한 예전의 제 취향의 영화들로 다시 감상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이 된 영화가 바로 [10,000 BC]입니다.
[10,000 BC]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입니다. 초기작인 [유니버설 솔저], [스타 게이트]에서부터 시작하여 출세작인 [인디펜던트 데이]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상업영화에만 매달려온 그는 할리우드 상업영화 감독 중 드물게 매번 제 기대치를 채워준 감독이기도 합니다.
일단 그의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의 영화가 '덩치만 크고 머리는 빈 영화'라고 혹평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이 제겐 매력적이었습니다. [인디펜던트 데이]나 [고질라] 그리고 [투모로우]처럼 그냥 멍하니 앉아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기술을 감상하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엔 안성맞춤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10,000 BC]에 제가 바랐던 것은 결코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줄기차게 외쳤던 '크기'에 대한 영화적 재미를 채워주기만 한다면 전 충분히 이 영화를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0,000 BC]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특수효과도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고, 크기에 의한 쾌감도 이번 영화엔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중 [패트리어트 : 늪 속의 여우] 다음으로 재미가 없었던 영화가 아닐 런지...
이번엔 그가 한발 늦었다.
[10,000 BC]를 보러가기 전 일부러 영화에 대한 정보를 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극장가의 비수기인 요즘 머리를 식힐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10,000 BC]가 유일한 그런 영화였으니까요. 그리고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는 영화정보 따위를 보고가지 않아도 충분히 러닝타임동안 즐기고 나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입니다. 서양 문명에 짓밟히기 전, 마야 문명의 원초적 액션을 그렸던 [아포칼립토]는 다른 부족의 습격으로 형제와도 같았던 동료와 가족을 잃은 한 남자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는 스토리입니다.
[10,000 BC]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부족에 의해 가족과도 같은 부족민과 사랑하는 여인 에볼렛(카밀라 벨)이 노예로 끌려가자 들레이(스티븐 스트레이트)가 온갖 역경을 딛고 구하러가는 기나긴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포칼립토]와 [10,000 BC]가 똑같은 것은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뿐만이 아닙니다. 부족민들의 멧돼지 사냥으로 시작한 [아포칼립토]와 맘모스 사냥으로 시작한 [10,000 BC], 엄청난 시간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포칼립토]와 [10,000 BC] 주인공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이 서로 비슷한 점 등 너무 많은 부분에서 [10,000 BC]는 [아포칼립토]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주로 미래를 대상으로 오락영화를 만들었던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태초의 인류를 담았다고 해서 이유를 분문하고 그 새로운 시도에 많은 기대를 걸었었는데 새로움은 커녕 많이 본 듯한 장면과 설정이 연속적으로 쏟아져 나옴으로써 오히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중 가장 새롭지 못한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엔 분명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멜 깁슨 감독보다 한발 늦었습니다.
중요한건 크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뭐... 오락영화에서 새로움을 기대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특수효과의 혁명을 이루어낸 할리우드라고 할지라도 워낙 많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대부분 거기에서 거기임은 놀랄만한 일도 아니죠.
하지만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에서 특수효과가 별로 느껴지지 않은 것은 정말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특수효과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감독이며, 스타 배우라고는 출연하지 않은 이 영화의 제작비가 무려 1억 달러라는 사실은 그 만큼 특수효과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는 것을 뜻할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특수효과 장면은 극히 적었습니다. 영화 초반 맘모스 사냥 장면과 사람 말 알아듣는 검치 호랑이, 그리고 무시무시한 식인 새의 등장 정도. 이 정도는 이미 [쥬라기 공원]에서 실컷 봤기에(물론 맘모스, 검치 호랑이, 식인 새가 공룡은 아니지만...) 그렇게 신기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애니메이션 [아이스 에이지]가 생각나서 정겹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특수효과가 그렇게 정교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맘모스가 떼를 지어 돌진하는 장면은 뭔가 어색해 보였으며, 검치 호랑이는 거의 우정 출연 정도의 비중 밖에 없습니다. 물론 식인 새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기엔 이 영화에 거는 특수효과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습니다.
원시부족을 잡아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는 신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존재와의 결투도 너무 싱겁게 끝나더군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중요한건 크기이다'라고 [고질라]에서 주장했었습니다. 맞습니다. 중요한건 크기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특수효과로 포장된 엄청난 그 무엇을 기다렸지만 그것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중요하다던 크기가 부족해서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쟤네 정체는 뭐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최초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원전 10,000년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이 없었고,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특기인 크기에 대한 쾌감도 보여주지 못했던 [10,000 BC]는 영화의 마지막에선 절 더욱더 실망시켰습니다.
전 무언가 놀랄만한 장면이 그래도 마지막엔 절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었습니다. 기원전 10,00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학 문명을 가진 그들이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며 뭔가 독특한 상상력이 이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의 정체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이 덧붙여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뛰어난 과학문명을 자랑했으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아틀란타인? 아니면 머나먼 우주에서 지구로 불시착한 외계인? 영화가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제 상상력은 계속 살에 살을 붙여 나갔습니다. 그런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아무런 궁금증도 해결하지 않은 채 영화를 끝냅니다. 그들의 정체는 관객의 상상력에 맡긴 채 말입니다.
언제나 확실한 결말을 즐겼던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기에 그 답지 않은 결말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개운하지 못했습니다. 왜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어야 하는데? 왜 그 시대에 그들은 뛰어난 과학문명을 가지고 있는데? 왜 그들은 모두 멸망하고 단 한명만 살아남았는데? 도대체 정체가 뭔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를 보며 이렇게 많은 의문점이 나기도 처음입니다.
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의 영화를 단순한 오락영화라고 욕하지만 전 차라리 상업성이면 상업성, 작품성이면 작품성, 이렇게 한 가지 분야에 매진하는 감독이 좋습니다. 하지만 [10,000 BC]만큼은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네요. 이번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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