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주연 : 조쉬 브롤린, 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뎀, 우디 해럴슨, 켈리 맥도날드
개봉 : 2008년 2월 21일
관람 : 2008년 3월 7일
등급 : 18세 이상
정말 끝까지 영화보기 어렵더라.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하비에르 바뎀), 각본상을 휩쓸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해마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은 꼬박꼬박 챙겨보던 전 당연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극장에서 보려고 했지만 그 계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대신 본 영화가 [데스노트 L : 새로운 시작]과 [주노]였습니다.
하지만 저희 집 근처인 CGV 목동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상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작품성 있는 영화는 잘 상영하지 않던 곳인데 웬일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상영하는 것인지... 제게 이 영화를 보기 위한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습니다.
금요일 심야, 혹은 토요일 조조로 볼 계획을 세웠는데 역시 인연이 쉽게 닿지 않는 영화를 보려고 해서인지 목요일 오후에 덜컥 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목요일엔 단순한 목감기였는데 금요일엔 코감기에 몸살까지 겹쳐서 정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회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오후 7시 15분 영화를 보기위해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코앞에서 버스를 놓치고 급한 마음에 목적지까지 빙 돌아가는 버스를 탔는데 길은 또 왜 그리 막히던지...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기위해 눈썹이 휘날리게 뛰었지만 역시 코앞에서 지하철을 놓쳤습니다. 그때가 이미 7시 10분. 이젠 화가 나서 말도 안 나오더군요.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고나니 오기가 생겼습니다. 오늘 기필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야말겠다는... 지하철에서 내려 CGV목동까지 또다시 뛰었습니다. 감기몸살에 저녁까지 굶은 상태였으니 어지럽더군요. 극장에 들어선 시간은 7시 25분. 다행히 영화는 볼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도 화가 납니다. 마치 하늘에 있는 그 누군가가 제가 이 영화를 못 보게 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 같은 억울한 느낌이랄까요... ^^
내가 생각하기엔 아카데미는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2007년 미국 영화중 최고의 영화라고 이미 평론가 사이에선 인정을 받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보수적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카데미 회원들이 진보적인 색체가 강한 코엔 형제의 영화를 선택할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제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아카데미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골든글로브에선 드라마부문 작품상에 아카데미 입맛에 딱 맞는 전쟁 로맨스 대작 [어톤먼트]를 선택했었습니다. 전 아카데미의 선택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아카데미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선택했습니다. 아카데미와 인연이 없었던 미국의 거장인 마틴 스콜세지가 작년 [디파티드]로 결국은 아카데미를 움켜쥔 뒤 불과 1년 만에 또 다른 아카데미와 인연이 전혀 없던 코엔 형제마저도 아카데미를 움켜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며 넘어갈 일이 아니죠. 재작년까지만 해도 아카데미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최고라고 평가를 받던 [브로크백 마운틴] 대신 가장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던 인종편견 극복 판타지 [크래쉬]를 선택했을 정도니까요. 그랬던 그들이 2007년 [디파티드]를 기점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암튼 확실한 것은 그들은 지금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미국 내 상업영화제였던 아카데미 영화제가 작품성을 중시하는 국제 영화제의 위상을 갖기 위한 시도라고 개인적으로 생각됩니다. 국제 영화제에선 인정을 받았지만 아카데미에선 인정을 받지 못했던 마틴 소콜세지와 코엔 형제에게 화해의 손길을 뻗으면서 말이죠.
이 영화는 그럴만한 가치는 있는가?
그렇다면 아카데미가 2008년 선택한 영화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어떤 영화일까요? 정말 아카데미가 보수적인 색채를 버릴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일까요?
90년대 들어서 단 한 번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놓치지 않고 봤던 저로써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상당히 낯선 영화였습니다. 사실 90년대 초반까지 저는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91년 수상작 [늑대와 춤을] 대신 [대부 3]가 탔어야한다고 생각하며, 92년 수상작인 [양들의 침묵]은 그 해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영화중 최악이라고 생각합니다. 93년 수상작 [용서받지 못한 자]는 단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덕분에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94년 수상작 [쉰들러 리스트]는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중 가장 지루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95년 수상작인 [포레스트 검프]부터인데, 이후 [브레이브 하트], [잉글리쉬 페이션트], [타이타닉], [셰익스피어 인 러브], [글레디 에이터], [뷰티풀 마인드], [시카고], [반지의 제왕 3 : 왕의 귀환] 등등 아카데미의 선택과 제 영화적 취향은 교묘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2000년 수상작 [아메리칸 뷰티]는 제외를 시켜야겠군요.)
그런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정반대의 편에 서있는 영화입니다. [포레스트 검프]같은 감동과 웃음이 없으며, [브레이브 하트], [글레디에이터]와 같은 스펙터클도 부족합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셰익스피어 인 러브], [뷰티풀 마인드]와 같은 고전미도 없고, [시카고]와 같은 음악도 없으며, [타이타닉], [반지의 제왕 3 : 왕의 귀환]과 같은 거대한 스케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갖춘 것은 무엇일까요? 현대의 미국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량한 텍사스의 사막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살인마와 카우보이의 추격전입니다. 영화 내내 긴장감을 느끼게 하고, 냉혈한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뎀)의 거침없는 행동에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만(그런 면에서 하비에르 바뎀의 남우조연상 수상은 이견이 없을 듯... 오히려 조연이 아닌 주연상을 타야하는 것이 아닐지...) 마지막은 꽤 허무합니다. 겉에 드러난 영화의 내용보다 속으로 감춰진 영화의 의미가 더욱 많은 영화, 그것이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도대체 어떤 의미를 생각해야하는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아카데미는 재미와 감동, 그리고 메시지가 겉으로 드러난 영화를 선호했습니다. 그것이 제 개인적인 영화적 취향과도 맞아 떨어졌던 부분이고요.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영화입니다.
외형상으로는 우연히 돈 가방을 손에 넣은 모스(조쉬 브롤린)라는 남자가 돈 가방을 뒤쫓는 살인마 안톤 쉬거한테 쫓기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관할 보안관 벨 (토미 리 존스)과 조직의 말썽꾼을 처치해달라는 청탁을 받은 또 다른 살인청부업자 칼슨 윌스(우디 해럴슨)가 끼어들며 이야기는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처음엔 저 역시 이 쫓고 쫓기는 흥미진진한 추격전에 푹 빠져들었었습니다. 안톤 쉬거의 그 끔찍한 모습과 나름대로 침착한 모스의 대결. 그리고 그 뒤를 쫓는 현명한 늙은 보안관 벨의 이야기는 마치 코엔 형제의 또 다른 걸작 [파고]와 같은 재미를 충분히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여기저기에서 '뭐야, 끝이야?'라는 불평불만이 튀어나옵니다. 아무것도 끝이 안 났는데 영화는 끝납니다. 기대했던 모스와 안톤 쉬거의 대결은 훌쩍 뛰어넘어가 버린 채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 영화가 하고자했던 이야기는 모스와 안톤 쉬거의 대결 혹은 안톤 쉬거와 뒤쫓던 벨의 영웅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끔찍한 살인사건의 현장에서 벨과 지역의 늙은 경찰관이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라고... 그들에게 있어서 현대의 범죄는 감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노인이 되어버린 그들은 이제 은퇴를 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범죄 앞에서 무기력하게 말이죠.
안톤 쉬거가 범죄를 저지르는 상대 역시 노인들입니다. 그들은 안톤 쉬거의 끔찍한 범죄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안톤 쉬거 앞에서 '도대체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라며 항변하는 칼라진(켈리 맥도날드)과는 달리 노인들은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쓰러집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 아니 보고 난 후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뭐 지금도 제목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오묘한 제목과 허무한 영화의 결말이 무언가 맞닿아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이 보입니다.
그토록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몸부림쳤고, 감기몸살이 걸린 채 무리해서 영화를 본 후유증으로 토요일 반나절을 침대에서 뒹굴며 보내야만 했던 저로써는 영화의 의미를 깊숙이 숨겨버린 이 영화가 더욱 골치 아프게 느껴집니다.
지금까지는 아카데미의 취향이 저와 비슷했는데, 이제 아카데미가 변화를 선택한 이상 저와의 취향과는 점점 멀어지겠죠. 제가 언젠가부터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들을 멀리했던 것처럼 말이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아니 저처럼 단순한 관객을 위한 영화제 수상작은 없다가 이젠 맞는 말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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