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조 라이트
주연 : 키이라 나이틀리, 제임스 맥어보이
개봉 : 2008년 2월 21일
관람 : 2008년 3월 11일
등급 : 15세 이상
날씨도 화창하고,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요즘 회계결산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업무에 너무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지난 주말엔 감기몸살까지 걸려서 황금 같은 주말을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내야만 했었죠.
그날도 여느 때와 같았습니다. 어느덧 성큼 다가온 봄은 쌀쌀한 아침 바람과는 달리 낮엔 따사로운 햇살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감기몸살이 채 가시지 않은 저는 두터운 겨울 외투를 입고 야근을 위한 외근을 나가야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지도 모릅니다. 따사로운 봄의 햇살과 사람들의 밝은 표정이 무거운 제 마음까지 설레게 만든 것은... 거래처로 향하던 제 발길은 어느덧 학창 시절 자주 갔었던 종로3가 서울극장 앞에 서있었고, 매표소에서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던 [어톤먼트] 영화 티켓을 끊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청와대 뒷길에 자리 잡은 학교의 위치 덕분에 귀가 길에 전 항상 경복궁과 광화문 교보문고, 그리고 종로2가 종로서적, 뮤직랜드와 종로3가 서울극장을 자주 들렀었습니다. 그렇게 광화문과 종로 거리를 거닐다보면 나도 모르게 문화의 향취에 취하여 집에까지 걸어가곤 했었습니다.(당시 저희 집은 광화문에서 걸어서 2시간 거리였습니다.)
이젠 2시간을 걷는 짓을 생각도 못하는 어리석은 어른이 되었지만 그날 서울 극장 앞에서 선 기분은 학창시절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의 극장 간판을 보며 설레고, 혼자 영화 티켓을 끊으며 가슴 벅차게 기뻤던 그 시절로 말입니다. 그렇게 [어톤먼트]는 나이에 맞지 않게 봄의 향취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제게로 성큼 다가왔습니다.
사랑...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아름다운 딸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가정부의 아들이자 세실리아 집안의 도움으로 캠브리지 의대를 졸업한 로비(제임스 맥어보이)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비록 신분은 달랐지만 그들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감추기엔 너무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사랑했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세실리아의 동생 브라이오니는 로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일부러 호수에 빠져 로비가 구해주길 기다릴 정도로 로비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을 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달콤한 환상이 깨지는 그 순간 사랑은 독이 되고, 미움이 되며, 증오가 됩니다. 로비의 잘못이라면 세실리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브라이오니가 품고 있는 자신을 향한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녀에게 사랑의 환상이 깨지는 아픔을 겪게 했던 것입니다.
로비에 대한 사랑의 환상이 깨져버린 브라이오니는 너무 어린 나이에 사랑의 아픔을 배우고 맙니다. 그녀는 그 아픔을 다스리기엔 너무 나약했고, 결국 사랑의 아픔은 미움으로, 증오로, 돌변합니다.
그렇게 슬픈 사랑의 전주곡은 시작됩니다. 세실리아와 로비를 가로막은 것은 신분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고 나약한 어린 여자아이의 미움과 증오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은 깨져버린 세실리아의 도자기처럼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길고도 험난한 벽이 생겨버리기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로비와 세실리아의 슬픈 사랑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comeback, comeback to me
거친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를 지탱해준 힘은 그녀의 한마디였습니다. '돌아 와죠. 내게로...'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그리고 그녀와 떳떳하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비록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서재에서 나눈 그녀와의 짧은 열정적인 섹스였지만, 그것만으로 그는 충분했습니다.
로비는 걷고 또 걷습니다. 지긋지긋한 전쟁의 포화에 휩쓸린 프랑스를 떠나 조국인, 세실리아가 기다리고 있는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보냈던 치욕과도 같은 시간과 죽은 시체들이 널려있는 전쟁의 잔인함 속에서도 그는 세실리아만을 그리워했고, 그녀에게 돌아가기만을 희망했습니다.
그가 그녀와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녀에게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세실리아 역시도 로비를 그리워하며 부와 명예를 버리고 낯선 대도시에서 로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모든 역경을 딛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그녀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가난을 이겨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여자, 브라이오니. 한 순간의 질투와 오해로 사랑하는 남자와 언니를 불행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녀는 그에 대한 속죄로 캠브리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간호원이 되어 군인들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로비가 세실리아에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가장 간절히 원했던 것은 브라이오니였을 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를 간절히 바라는 그녀는 그렇게 로비보다도, 세실리아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다시 예전의 시간으로 되돌리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속죄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세실리아에게 돌아가기 위한 로비의 힘든 여정, 로비를 향한 세실리아의 슬픈 기다림, 그리고 그들에게 속죄하고픈 브라이오니의 간절한 소망.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아픈 상처가 너무 컸습니다. 서로 죽이고 죽는, 이 끔찍한 살육 속에서 로비와 세실리아의 아름다운 사랑은 어울리지 않았으며, 브라이오니의 간절한 소망 역시 소설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오히려 이들을 불행으로 몰고간 커플의 행복한 결혼만이 이 끔찍한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거짓의 가면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 여운은 길었습니다. 갸날픈 듯 보였지만 결국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용감하게 기다림을 선택한 세실리아와 세실리아가 건네준 엽서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돌아가기만을 꿈꿨던 로비의 행복한 웃음소리는 제 슬픈 여운과 함께 오히려 더욱더 슬프게만 들렸습니다.
그들에게 속죄하고 싶다던 브라이오니는 과연 늦게 마나 그 속죄를 이루고 무거웠던 짐을 조금이나마 벗었을까요? 그녀의 깊은 주름살에서 조금이나마 짐을 벗어던진 홀가분한 표정을 읽을 수 있기를 원했지만 그러한 표정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여운이 길었고, 더욱 슬펐습니다. 헤어진 연인도, 그들을 헤어지게 만들었던 작은 소녀도 결국 슬픈 사랑의 아픔만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여전히 빛나는 낮의 햇살 속에서 청계천을 거니는 연인들을 보았습니다. 당시 기분 같아선 저 역시 학창시절처럼 1시간이고, 2시간이고 하염없이 걸으며 영화의 여운을 길게 느껴보고 싶었지만 제겐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슬픈 사랑의 먹먹함은 야근이라는 힘든 업무 속에서도 쉽게 지워지지가 않더군요. 그렇게 슬픈 사랑의 먹먹함은 그날 절 사로잡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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