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안
주연 : 양조위, 탕웨이
개봉 : 2007년 11월 8일
관람 : 2007년 11월 14일
등급 : 18세 이상
대략난감이었다.
웅이가 중이염에 걸리는 바람에 제 극장나들이에 총체적인 위기상황이 오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아픈데 영화 보러 가겠다고 나섰다간 매정한 아빠가 되어 버릴 것이 뻔했고, 중이염이라는 것이 최소 한 달간 앓는 병이라고 하니 웅이가 중이염이 낫기를 바란다는 것 역시 별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고 싶은 영화는 끊임없이 개봉되었습니다. 특히 지난주 보지 못한 [색, 계]는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강렬한 나머지 하루 종일 절 심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리저리 [색, 계]를 보러갈 계획만 세우던 제게 구피가 먼저 제게 기회를 제공했고, [색, 계]는 구피와 함께본다는 제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저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색, 계]를 보기위해 혼자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평일 CGV 공항, 그것도 개봉한지 일주일이 지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이 모든 것이 [색, 계]를 상영하는 극장은 텅 비어 있을 것이라는 제 예상을 뒷받침해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극장 매표소 앞에선 저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개봉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베오울프]의 상영관은 자리가 많이 남았지만 오히려 [색, 계]는 거의 매진 직전이었던 것입니다.
'맨 앞자리하고, 중간 커플석에 자리 하나가 남아있습니다.' 극장 매표소 직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거의 3시간에 육박하는 영화를 맨 앞자리에서 보다간 목이 아플 것 같았고, 그렇다고 커플석에서 모르는 사람과 함께 보다간 이 영화의 민망한 장면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결국 제 선택은 커플석이었습니다.
다행히 제 커플석에 홀로 앉은 관객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서 민망함이 덜했지만 정말 대략난감 했습니다. 성기노출, 파격 정사씬이라는 [색, 계]를 모르는 남자와 함께 커플석에 나란히 앉아 봐야한다니... 웅이가 아픈데 영화 보겠다고 극장으로 향한 저를 향한 하늘의 작은 벌이 아닐 런지...
그녀가 원했던 것은 사랑과 관심이었다.
영화는 1942년 일제강점기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막부인(탕웨이)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고 곧바로 4년 전 홍콩으로 배경을 바꿉니다.
1938년 홍콩엔 일본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긴장감이 감돌았으며, 그러한 와중에 애국심에 충만된 혈기왕성한 대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순진한 여대생 왕치아즈는 영국으로 떠난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재혼과 함께 버림을 받습니다. 이제 그녀는 혼자인 것입니다.
[색, 계]의 초반은 순진한 여대생 왕치아즈가 반일항쟁 연극을 하게되고 급기야 친일파 인사인 이(양조위)를 암살하기 위한 막부인이 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그려냅니다. 카메라는 왕치아즈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의 변화 과정을 잡아냅니다. 그녀의 섬세한 내면적인 변화를...
왕치아즈는 혼자입니다.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는 그녀를 버렸습니다. 조국은 전쟁에 휩싸였고 모든 것이 불안했지만 그녀는 혼자입니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급진파 대학생인 광위민에게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녀는 기댈 언덕이 필요했고, 광위민의 열정은 그녀의 언덕으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광위민이 원하는 대로 연극부에 가입하여 반일항쟁을 소재로 한 연극을 했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막부인이 되어 이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녀는 단지 사랑이 필요했고, 관심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막부인이 되었지만 그녀에게 사랑과 관심을 줘야할 광위민은 오직 애국에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서로 엇갈린 시선은 이의 암살 실패와 함께 이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됩니다.
그녀, 사랑을 찾다.
3년 후 상하이. 배급을 받기위해 길게 서있는 줄의 한가운데에 무표정한 왕치아즈가 있습니다. 이제 그녀의 곁엔 이모가 있지만 여전히 그녀는 혼자입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왕치아즈가 다시 막부인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가... 언제나 혼자였고, 언제나 무관심 속에 버려졌던 왕치아즈와는 달리 화려한 생활과 모두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던 막부인으로써의 생활이 왕치아즈에겐 그리웠던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애국으로 치장된 이의 암살이라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지만 왕치아즈는 애국보다는 관심과 사랑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했으며, 막부인이 됨으로써 다시금 광위민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광위민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막부인이 된 왕치아즈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막부인은 이를 암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으며, 그에게 왕치아즈는 무기력한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날카로운 자아비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왕치아즈가, 아니 막부인이 이에게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애초부터 애국에 관심이 없었던 그녀에게 이의 헌신적인 사랑은 충분히 그녀를 무너뜨릴 강력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녀를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막부인이 되었지만 그녀가 사랑했던 광위민은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지켜주겠다'는 이의 한마디는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래,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왕치아즈는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찾았으니까요.
그, 믿음에 배신을 당하다.
이제 이야기를 이에게로 옮겨 보겠습니다. 그는 일본의 개입니다. 조국인 중국을 배신하고 동족을 학살하며 자신의 성공을 쌓아갔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권력과 풍족함을 누렸던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요?
영화에서 이의 웃음이 조금이라도 비춰진 장면은 없습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불안하고 텅 비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군가에게 암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은 그를 더욱더 불행하게 만듭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기에 성공했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지만, 아무도 믿을 수 없기에 그는 한없이 불행합니다.
그런 그에게 막부인의 존재는 처음엔 욕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눌 수조차 없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분출할 욕망의 창구가 바로 막부인이었습니다. 처음 이와 막부인의 섹스가 거의 이의 폭력 수준이었다는 것은 그런 이의 심리상태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섹스가 진행되며 이는 막부인에게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때부터 이와 막부인의 섹스는 격렬하지만 안타깝고, 슬픕니다.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을 해서는 안될 상대에게 사랑을 느꼈던 막부인에게는 이와의 섹스가 혼란스러웠을 것이며,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에겐 이 짧은 섹스가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마지막 이의 공허한 눈빛은 그래서 더욱더 잊히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믿은 그녀의 배신 앞에서 그는 울고, 분노하고, 부정합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살아남은 그는 결국 믿음에 배신당한 채 그렇게 평생 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서로 배신했다.
[색, 계]는 굉장히 아픈 영화입니다. 사랑을 원했던 왕치아즈도, 믿음을 갈구했던 이도 결국 서로에게 배신당했으니까요. 왕치아즈는 자신을 믿어준 이를 배신했고, 이는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왕치아즈의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짧은 순간 서로 사랑했지만 영원히 서로에게 상처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색, 계]는 양조위와 탕웨이의 파격적인 정사씬으로 유명세를 탄 영화입니다. 솔직히 이 영화의 정사씬은 소문대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음모와 성기가 고스란히 노출되고 실제 섹스 논란을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를 보며 야하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오히려 팽팽한 김장감과 아스라한 안타까움만이 묻어났습니다. 특히 양조위의 표정과 눈빛은 제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전쟁이라는 사회적인 배경이 있었기에 그들의 사랑도 가능했을 것이고, 그들의 상처도 더욱 컸을 것입니다. 그녀는 죽고 그는 살아남았지만 오히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평안해 보였으며, 그의 마지막 모습은 여전히 불안하고 공허해보였습니다. 사랑을 안고 가는 그녀와 믿음을 배신당한 그의 엇갈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누가 더 행복했을까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획득하고 죽은 왕치아즈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여인에게 배신을 당한 채 홀로 살아남은 이일까요? 아니, 어쩌면 가장 행복한 것은 이 멋진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던 관객이었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순간 정말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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