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 : 로버트 레드포드, 톰 크루즈, 메릴 스트립
개봉 : 2007년 11월 8일
관람 : 2007년 11월 8일
등급 : 15세 이상
영화를 보기로 마음을 굳힌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들 하죠. 스산한 가을바람을 맞으면 남자들은 왠지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느낌을 받으며, 하염없이 길을 걷고 싶어지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젊었을 때 이야기인 듯.
전 가을이면 낙엽을 밟으며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바싹 마른 낙엽을 밟을 때의 '바스락'소리가 좋아서 길을 걸을 때 마른 낙엽을 보면 꼭 밟고 지나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거리는 쓰레기들만 굴러다녀 밟을 낙엽도 없더군요.
암튼 제게도 가을이 찾아오긴 한 것 같습니다. 10월 한 달 동안은 살인적으로 바쁜 일상 덕분에 가을을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11월이 되고 바람도 더욱더 차게 느껴지니 요즘 왠지 쓸쓸하고 허무합니다. 자꾸 젊었을 때의 아름다운, 또는 슬펐던 순간들이 떠오르고, 좋아하지도 않는 소주가 자꾸만 마시고 싶어지며, 회사에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있을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영화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 그리고 목요일엔 나 홀로 영화 두 편([로스트 라이언즈], [블랙 달리아]), 금요일엔 구피와 함께 영화 한편([식객]), 다음주중으로 구피와 함께 영화 한편([색, 계])을 보기로 약속을 정한 순간 갑자기 의욕이 샘솟고, 기분이 좋아졌답니다. 이거 가을 타령이 영화를 보기 위한 자기변명은 아닌지... 제 스스로가 의심스럽네요.
첫 번째 나의 선택은 로버트 레드포드였다.
6시 칼 퇴근을 하고 곧장 극장으로 향한 제가 선택한 첫 번째 영화는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로스트 라이언즈]입니다. 이 영화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할리우드 스타파워 때문입니다. 로버트 레드포드, 톰 크루즈, 메릴 스트립. 이 영화의 캐스팅 멤버는 지금 현재 개봉중인 그 어떤 영화보다도 화려합니다. 그리고 내년 아카데미를 겨냥한 영화답게 뭔가 진지한 질문을 제게 던져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런 주저 없이 선택한 [로스트 라이언즈]는 결론부터 말한다면 무척이나 재미없고, 지루했습니다. 물론 이 영화 자체가 오락영화가 아님은 미리 알고 있었기에 오락영화다운 영화적 재미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 영화가 던진 진지한 질문이 제 마음에 와 닿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로스트 라이언즈]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우선 이 영화는 세 가지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로 합쳐지는 영화입니다. 공화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상원의원 어빙(톰 크루즈)은 베테랑 저널리스트 제니 로스(메릴 스트립)과 한 시간 동안의 단독인터뷰를 합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에 대한 기사를 제공하겠으니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사를 쓰도록 그녀를 회유합니다.
같은 시각 자신의 두 제자를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낸 말리 교수(로버트 레드포트)는 또 다른 제자 토드와 면담중입니다. 그는 현실을 외면하고 쾌락에만 빠져있는 토드에게 B학점을 주겠으니 현실에 점 더 적극적으로 앞장서라며 설교합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말리의 제자인 애리언과 어네스트는 어빙의 계획에 따라 목숨을 내건 작전을 수행중입니다. 어빙이 안락한 의자에 앉아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말리가 학생과의 논쟁을 벌이는 동안 그들은 전쟁이라는 가혹한 현실 속에 내몰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탁상공론은 그 어떤 설득력도 없었다.
이렇듯 세 개의 이야기는 두 개의 대화와 한 개의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빙과 제니의 대화, 그리고 토드에 대한 말리의 설교가 두 개의 대화라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애리언과 어니스트의 이야기는 한 개의 행동입니다. 문제는 이 영화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은 한 개의 행동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톰 크루즈와 메릴 스트립이 격돌한 어빙과 제니의 대화는 두 배우의 카리스마 대결만이 눈에 뛸 뿐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의 승리를 통해 실패한 전쟁인 이라크에 쏠린 미국인의 눈을 현혹시키고 공화당의 지지도를 올리려는 어빙의 야심은 제니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이라크의 실패한 전쟁을 기사화하고 있는 제니는 어빙의 제안에 귀가 솔깃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버릴 수 없기에 주저합니다. 그러한 제니의 갈등은 편집장과의 대화에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미국의 전쟁에 미 언론이 적극 동참을 했다는 것은 제니도 인정한 사항이고, 그러하기에 어빙의 제안에 제니는 좀 더 갈등을 했어야했지만 이 영화는 그리 많은 시간을 제니의 갈등에 할애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깊은 주름이 돋보였던 말리 교수의 설교 장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쾌락에 빠져있는 토드에게 말리 교수는 상당히 우회적으로 그를 설득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의 설득은 너무 우회적이었습니다. 똑똑한 토드는 말리 교수 설교의 의미를 곧바로 감지하지만 그리 똑똑하지 못한 저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했으니까요.
결국 어빙과 제니, 그리고 말리의 탁상공론은 배우들의 연기력만 돋보일 뿐 그 어떤 설득도 제게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영화의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똑똑하지 못한 제게도 잘못이 있을 듯... 하지만 저는 제 멍청함을 탓하기 보다는 [로스트 라이언즈]의 부족한 설득력을 탓하고 싶네요. 왜냐면... 저는 소중하니까요. ^^;
전쟁에 희생당한 그들을 위해...
그러나 [로스트 라이언즈]를 무조건 지루한 영화라고 치부하기엔 아프가니스탄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는 애리언과 어네스트의 이야기가 너무 마음 아프게 했습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유색인종이라는 편견 속에서 자란 그들은 피나는 노력 속에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작은 성공에 안주하려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미국을 변화시키려면 국민들이, 젊은이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행동의 결과를 아프가니스탄 지원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미국이 벌인 그 수많은 무의미한 전쟁에 지원하고 희생당한 이들은 이렇게 미국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멸시당한 빈민가의 유색 인종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말리 교수는 말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희생하는 동안 미국 사회의 온갖 혜택을 받으며 자란 부유층의 자제들은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고 쾌락에만 젖어서 세월을 낭비하고 있다고...
이 영화의 원제인 'Lions For Lamb'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용맹한 영국군을 보고 독일인 장교가 한 말에서 유래된 말로써 무능력한 영국군 장교들의 전략실패로 용맹한 영국 군인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한 독일장교가 “영국군은 양이 사자를 이끌고 있다. 어리숙한 양 때문에 용감한 사자들이 희생당하는 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치적 야심 때문에 의미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정치가와 그러한 추악한 이면을 알고 있으면서 그에 동조하는 언론, 그리고 무능력한 교육계의 현실 속에서 언제나 희생당하는 것은 저렇게 힘없지만 용감한 사람들뿐입니다. 미국이 벌인 무의미한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인 셈이죠. 그렇기에 영화가 끝나고 애리언과 어네스트의 무의미한 죽음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메시지는 성공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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