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미정
주연 : 박진희, 윤세아, 서영희, 임정은, 김성령
개봉 : 2007년 10월 18일
관람 : 2007년 10월 18일
등급 : 18세 이상
시험공부를 위해 하루 휴가를 냈다.
이제 방통대 중간고사가 며칠남지 않았습니다. 바쁜 회사생활 핑계로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은 저로써는 시험일자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점차 초조해지기만 합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공부를 하려고해도 요즘 프로야구 포스트시즌과 TV드라마 '이산', '태왕사신기' 등이 제 발목을 붙잡네요.
결국 제가 선택한 방법은 하루 휴가를 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벼락치기인 셈이죠. 하지만 그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막상 휴가를 냈지만 달콤한 늦잠과 한동안 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들이 절 유혹하고 있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저는 그러한 유혹들과 협상을 하기로 했습니다. 늦잠을 포기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대신 잠이 덜 깬 오전엔 영화를 보고, 오후엔 정말 열심히 공부하기로 말입니다.
그러한 협상 결과 [궁녀]를 봤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는 쌓여있었지만 제가 극장에 도착한 그 시간에 바로 볼 수 있는 영화가 [궁녀]였으며, 사극을 좋아하고,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 제게 사극 스릴러라는 [궁녀]의 장르는 매우 매혹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속았다'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과연 이 영화의 장르를 스릴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릴러의 가장 기본적인 매너조차 지키지 못한 이 영화는 단지 여름방학 시즌에 지겹도록 되풀이된 또 하나의 머리 풀어 헤친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제가 오후엔 열심히 공부를 하자는 저와의 협상도 지키지 않고 이렇게 영화 이야기를 쓰겠다며 컴퓨터 앞에 앉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이 부디 저처럼 스릴러인줄 알고 갔다가 공포 영화를 보는 당혹스러움을 맛보게 하지 않기 위해... [궁녀]는 공포 영화입니다. 스릴러가 아닌...
시작은 스릴러 같았다.
[궁녀]는 분명 스릴러의 외형을 지니고 있습니다. 화려하지만 숨막힐 듯이 엄격한 궁궐 안에서 후궁 희빈(윤세아)을 보좌하는 궁녀 월령(서영희)이 목을 매단 채 자살합니다. 하지만 내의녀인 천령(박진희)은 월령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감찰 상궁(김성령)은 월령의 죽음을 자살로 끝맺으려 압력을 가합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사건은 시작됩니다. '누가 월령을 죽였는가?' 이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천령은 독단적으로 수사를 시작하고 감찰 상궁을 비롯한 궁궐 내 권력은 천령의 수사를 방해합니다.
이제 많은 단서들이 관객들에게 제시되고 월령의 죽음에 대한 용의자들이 영화의 중반부에 서서히 부각됩니다. 특히 월령의 몸에서 아기를 낳은 흔적을 발견한 천령은 월령의 연애편지를 근거로 6년 전 자신을 임신시키고 매정하게 버린 왕의 외조카인 이형익(김남진)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스릴러 영화를 많이 본 관객의 입장에서 순진하게 '맞아, 이형익이 범인일거야.'라며 감독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수는 없죠. 이형익 외에도 희빈의 아들이 원자 책봉되는 것을 방해하려는 궁전과 대비, 그리고 사건을 은폐시키려하는 감찰 상궁 등이 용의 선상에 오릅니다.
이제 [궁녀]는 흥미진진하게 월령을 죽인 범인과 그 뒤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을 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관객인 저도 준비가 완료되었으며, 영화에서 좀 더 많은 단서들이 제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영화의 초반부에 저는 단서와는 별도로 범인과 그 뒤에 숨겨진 비밀들을 예상하고 있었지만(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스릴러에서 예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한 예상을 뒷받침해 줄 단서가 필요한 것이죠. 저는 바로 그 단서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검은 기운이 궁을 감쌀 때부터 불안했다.
죽은 월령의 시체에서 검은 기운이 궁을 뒤덮더니 모든 것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치밀한 스릴러를 원했던 제 기대는 이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느닷없이 등장한 월령의 원혼이 한 맺힌 여인의 복수를 하며 분위기를 '전설의 고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스릴러와 공포는 영화의 특성상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음습한 분위기와 죽음, 범죄, 원한, 진실 등 영화의 진행도 비슷하죠. 하지만 결정적으로 스릴러와 공포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건을 파헤치는 논리적인 근거입니다.
공포 영화에서도 많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무고한 사람이 죽고, 진실은 은폐되고,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주인공은 사건을 파헤칩니다. 하지만 공포 영화의 경우(특히 귀신이 나오는 영화에서...) 진실 그 너머에는 귀신이라는 초현실적인 존재가 버티고 있기에 영화의 마지막 진실에 대한 근리적인 근거는 무시됩니다.
예를 들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밀폐된 방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스릴러 영화의 경우는 범인이 어떻게 그 방에 들어갔는지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만 공포 영화의 경우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귀신이 벽을 뚫고 들어가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만사OK인 것입니다.
그런데 [궁녀]가 그렇습니다. 영화는 중반을 지나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대부분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결국 그러한 비논리적인 영화의 설정 뒤엔 월령의 원혼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만으로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닌 공포 영화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감독이 의도했던 안했던...
[궁녀]가 [극락도 살인사건]과 다른 점
[궁녀]와 마찬가지로 스릴러 영화를 기대했다가 무서운 귀신만 보고 나왔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극락도 살인사건]입니다. 하지만 [극락도 살인사건]은 공포 영화가 아닙니다. 스릴러 영화입니다. 그렇다면 [궁녀]와 [극락도 살인사건]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스릴러와 공포의 차이인 논리적인 영화의 마지막 반전입니다.
[극락도 살인사건]에서 열녀 귀신의 존재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저는 열녀 귀신 때문에 무서워서 화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고, 결국 영화의 내용을 잘 파악하지도 못한 채 '귀신은 제발 공포 영화에서만 나와라'라고 투덜거렸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열녀 귀신은 [극락도 살인사건]에서의 사건에 뒤엉킨 하나의 모티브일 뿐이며, 관객의 시선을 진실에서 멀어지게 하는 꽤 뛰어난 장치 역할을 해냈습니다. 결국 열녀 귀신의 존재가 사건의 논리적인 해석을 방해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궁녀]는 틀립니다. 영화의 후반이 되면 모든 사건들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맞습니다. 궁녀를 공개 처벌하는 연중행사 '쥐부리글려'의 뒤바뀐 희생양, 대비의 죽음 등 그리고 이 모든 비논리적인 사건들 앞엔 월령의 원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결국 귀신의 존재가 논리적인 부분을 무시하고 영화의 모든 것을 좌우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귀신이 나오지 않았더라도...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질문. 만약 월령의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혈의 누]의 뒤를 이을 재미있는 사극 스릴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안타깝게도 대답은 NO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 반전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누가 월령을 죽였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저는 확실한 단서를 제시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 이렇지 않을까?'라고 영화의 초반에 예상을 했었고 그 예상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제가 결코 잘나서가 아닙니다. 김미정 감독에게 영화의 반전을 숨기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건의 영화의 초반부로 돌아간다면... 월령은 살해당했습니다. 월령의 살해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희빈의 아들이 원자에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는 중전과 대비입니다. 만약 김미정 감독이 중전과 대비의 비중을 높였다면 저 역시도 중전과 대비의 음모를 의심하며 영화의 마지막 반전에 쉽게 다가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미정 감독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모든 영화의 비중은 희빈에게 맞춰놓습니다. 중전과 대비는 거의 엑스트라 수준입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중전과 대비를 의심하는 관객은 몇이나 있을까요?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범인은 희빈전에 있는 것을 예상할 수 있고, 그것을 예상했다면 월령이 아기를 낳았다는 단순한 단서 하나만으로도 희빈전에서 월령을 죽여야만 했던 동기는 쉽게 유추됩니다.
이렇게 영화의 반전을 손쉽게 들켜버리는 감독의 역량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어설픈 스릴러보다는 공포 장르가 김미정 감독에게 더 어울렸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암튼 이래저래 제게 [궁녀]는 실망스러운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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