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정윤수
주연 : 박용우, 엄정화, 이동건, 한채영
개봉 : 2007년 8월 15일
관람 : 2007년 8월 28일
등급 : 18세 이상
넌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니?
누군가 제게 '넌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니?'라고 묻는다면... 참 난감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구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구피가 한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가도 오늘은 구피가 너무나도 미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때 그 때 달라요.'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참 묘합니다. 처음 구피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했을 때는 그 어떤 상황이 와도 그녀에 대한 제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얼굴만 봐도 가슴이 떨렸고,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며,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포근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한지 벌써 5년이 흘렀고, 이제 6년째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그러한 가슴 떨림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고생이 많은 그녀를 보면 한없이 미안해지기도 하고, 내가 좀 더 잘해서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와 싸운 날에는 너무나도 미워서 얼굴조차 쳐다보기도 싫어집니다.
사랑은 변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동경했던 순진했던 사춘기 시절엔 그러한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사실을 믿습니다. 아니 느낍니다. 더 이상 구피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감정은 느낄 수 없지만 그녀와의 결혼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사실은 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처음엔 사랑했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를 봤습니다.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대담한 영화를 보기 며칠 전 저는 구피와 싸웠으며 며칠 동안 서로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영화는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넌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니?'라고...
처음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순하게 엄정화, 박용우, 이동건, 한채영 등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연기 하모니가 꽤 좋다는 입소문도 있었고, 그냥 한바탕 웃다가 말아버리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뭔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어느 네티즌의 리뷰도 이 영화의 선택에 한 몫을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가슴 한쪽이 쓰리고 아팠습니다. 그것은 영화 속 커플들의 서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평범한 샐러리맨인 민재(박용우)와 재벌가의 며느리인 소여(한채영)의 사랑이 너무나도 아팠습니다. 뻔해보이는 불륜 드라마가 절 이렇게 아프게 할 줄 예상조차 못했습니다.
결혼 3년차 민재와 유나(엄정화)는 누구나 인정하는 잉꼬부부입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나도 사랑을 했고, 결혼을 해서도 그 사랑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약간씩 무뎌지고 있었으며 급기야는 그 조그마한 서로간의 틈 속에 영준(이동건)과 소여가 들어오며 틈은 점점 커져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민재, 유나 커플과는 달리 한 번도 뜨거웠던 적이 없었던 영준, 소여 커플. 그렇기에 영준과 소여는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 망설임이 없었으며, 사랑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민재와 유나는 망설임 없는 영준과 소여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버립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해도 되는 것일까?
제가 민재와 소여의 사랑에 가슴이 아팠던 것은 민재라는 캐릭터가 저와 상당 부분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사회적인 성공을 한 영준과 소여를 부러워하는 유나와는 달리 민재는 소여의 외로움을 동정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동정은 사랑으로 발전하고 맙니다.
돈 타령을 하는 유나에게 '우리 그 정도까지 최악은 아니다'라며 미소 짓는 민재의 모습은 구피와 제가 사소한 지출 문제로 다툴 때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해 보였습니다. 쥐꼬리만 한 제 월급으로 대출금도 갚고, 저축도 하고, 웅이 교육도 시키겠다며 아둥바둥하는 구피에겐 야심도 없고, 욕심도 없고, 능력조차 없는 제가 답답하고 한심할 것입니다. 민재를 바라보는 유나의 표정에서 구피가 보였던 것은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나를 두고 후배의 아내인 소여와 사랑에 빠지는 민재를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는 유나를 배신했습니다. 영준의 유혹에 잠시 흔들렸으나 결코 육체의 선을 넘지 못하고 망설이는 유나에 비해 민재는 너무나도 쉽게 소여의 유혹에 넘어가고 유나를 배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재와 소여의 사랑에 가슴 아파하고, 그의 사랑을 이해못하지만 욕할 수도 없었던 것은 결코 유나와의 사랑을 버릴 수 없는 민재의 아픔을 알기 때문입니다.
민재도 그랬을 겁니다. 예전처럼 언제나 유나를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작은 흔들림에 소여의 사랑이 비집고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소여를 사랑하지만 유나도 사랑하는 민재의 소시민적인 모습. 그는 이 어쩔 수없는 선택에 결국 울음을 터뜨립니다.
다른 사랑을 선택했어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민재와 소여의 조심스러우면서 가슴 아픈 사랑에 비해 유나와 영준의 사랑은 경쾌하고 가볍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가볍게만 보였던 그들이 오히려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육체의 선만은 넘지 않습니다. 참 묘한 아이러니입니다.
애초에 제가 예상했던 영화의 모습도 사실 유나와 영준의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사랑의 모습이었습니다.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소재가 결코 부담이 될 수 없을 만큼의 재기발랄함.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나와 영준의 사랑마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처음으로 뜨거움을 느낀 영준과 민재가 할 수 없는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을 해준 영준에게 끌리는 유나의 사랑 역시 가슴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유나는 민재와는 달리 새로운 사랑보다는 옛 사랑에 대한 미련이 더욱 컸던 것입니다.
민재와 소여, 영준과 유나. 서로를 배신하고 맺은 이 새로운 사랑은 과연 영원할 수 있을까요? 아뇨.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 역시 몇 년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역시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매일 매일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하지 못할 날이 분명 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슬펐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영원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사랑은 자꾸 변하는 것일까요? 그 변하는 사랑 때문에 그들은 옛 사랑과 새로운 사랑에 갈등을 해야 하며, 예전엔 사랑했던, 지금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줘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불륜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하고 지금까지 이루어낸 모든 것을 잃게 되지만 새로운 사랑마저 결코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슬픕니다.
난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다.
구피와의 다툼이후 너무 기분이 꿀꿀해서 영화를 보게 되었지만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제 머리는 더욱 복잡해지고 말았습니다. 과연 나에게도 저러한 상황이 온다면?
유나가 민재에게 묻습니다. 아직도 날 보면 가슴이 떨리냐고... 민재는 대답합니다.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면 그건 병에 걸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냉혹하지만 사랑이 변하는 우리들에겐 그것이 진실일 것입니다.
아직도 구피는 제게 말을 붙이지 않습니다. 아니 얼굴조차 쳐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런 그녀가 미워 애써 화해의 손길을 뻗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그녀와 저의 냉전 상태가 예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언제나 일주일을 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일주일을 넘어가려하고 있습니다. 그녀와 저의 사랑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처음의 질문인 '넌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니?'라고 묻는다면 이번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난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다.'라고... 그것은 그녀와 나의 사랑의 결실인 웅이입니다. 그녀에 대한 제 사랑은 예전 같지 않지만 웅이에 대한 제 사랑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변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나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많은 부부들이 사랑이 식었음에도 여전히 함께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그렇습니다. 전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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