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준익
주연 : 박정민, 김고은
주연 : 2018년 7월 4일
관람 : 2018년 7월 8일
등급 : 15세 관람가
웅이에게 미안해서...
토요일에 억지로 웅이를 어머니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어머니가 손자를 보고 싶어 하기도 했고, 혼자 2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는 것도 지루해서 기말고사 끝나고 집에서 뒹굴겠다는 웅이를 억지로 끌고 나간 것입니다. 사실 어머니 집에 가면 웅이는 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과 대낮부터 술 파티를 벌이지만, 또래 친척이 없는 웅이는 제가 술을 마시는 동안 핸드폰 오락을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기에 어머니 집에서의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웅이는 제게 "꼭 저를 데려가야 했어요?"라며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시잖아."라고 변명을 했지만, 솔직히 웅이의 마음을 잘 압니다. 저도 어머니가 친척 행사에 저를 데려가려하면 "내가 꼭 가야해? 나도 주말엔 쉬고 싶단 말이야."라며 투덜거리니까요.
일요일 아침, 구피는 친구 결혼식에 간다면 집을 나섰고, 저는 웅이와 롯데시네마 김포공항점에서 [변산]을 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고보니 한달 전 상황이 오버랩되었습니다. 당시에도 구피는 친구만난다며 토요일 아침 집을 나섰고, 집에 남겨진 저는 애초에 계획에도 없던 [아이 필 프리티]를 보기 위해 웅이와 롯데 시네마 김포공항점에 갔었습니다. 하지만 롯데시네마 김포공항점에 간 진짜 이유는 영화보다는 마블 키링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아이 필 프리티]를 보러 갔을 땐 마블 키링 판매가 중단되어 결국 사지 못하고 영화만 보고 돌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앤트맨과 와스프] 개봉 기념으로 마블 키링 판매가 다시 시작되었고, 웅이와 볼 계획이 없었던 [변산]을 예매하면서까지 굳이 롯데시네마 김포공항점으로 향한 것입니다.
사실 제가 웅이와 함께 롯데시네마 김포공항점에 간 것은 [변산] 때문도, 마블 키링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웅이의 소중한 토요일을 빼앗은 것이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그 미안함을 만회하기 위해 웅이가 랜덤으로 구성된 마블 키링을 사며 즐거워하길 바랬습니다. 그날 웅이는 블랙 위도우와 그루트 마블 키링을 뽑았습니다. 최소한 제가 뽑았던 닉 퓨리, 쇼커보다는 나은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변산]도 재미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에 고향을 등진 학수.
그러한 학수를 보며 나는 웅이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서 아들에게 원망듣는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면...
이준익 감독의 청춘 3부작
[변산]은 [동주], [박열]에 이은 이준익 감독의 청춘 3부작중 마지막 영화입니다. 하지만 [변산]은 앞선 영화들인 [동주], [박열]과 영화의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시인을 꿈꾸는 청년 '동주'(강하늘)와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몽규(박정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동주]는 비극적인 시대를 대변하는 청춘영화입니다. 이준익 감독은 흑백 영화로 [동주]를 완성함으로써 그들의 비극적인 청춘에 슬픈 감성을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같은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박열]은 [동주]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1932년 광동 대지진 이후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당하던 일본을 배경으로 '박열'(이제훈)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유쾌한 반란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암흑의 시기를 살다간 청춘의 아픔이라는 감성만큼은 [동주]와 일맥상통했습니다.
그렇다면 [변산]은 어떨까요? [변산]은 [동주], [박열]과는 달리 현재의 청춘에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래퍼를 꿈꾸는 학수는 그야말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래퍼 경연 TV쇼인 '쇼미더머니'에 6년 개근을 하며 꿈을 이어나가지만 현실은 고시원 쪽방 생활에 발렛 파킹, 편의점 알바로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겐 뒤를 받쳐줄 부모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장항선)하고는 연을 끊고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연을 끊기 위해 고향마저 등진 상황. 그야말로 학수는 혼자 아둥바둥 몸부림치고 있는 빡센 청춘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학수의 상황과는 달리 영화의 분위기는 밝고 경쾌합니다. 분명 [박열]의 분위기도 경쾌했지만, 그 속에는 암흑의 시절을 온몸으로 맞서 싸우던 '박열'의 저항정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산]은 오랜만에 고향에 온 학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며 키득키득 웃기만합니다. 그러면서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에겐 부모가 있고, 친구가 있고, 사랑이 있고, 고향이 있지 않느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일제강점기에 살던 '동주', '박열'보다 행복하지 않느냐고...
학수는 고향에서 온갖 웃지못할 소동을 겪는다.
그런데 그러한 소동들을 겪는 학수의 얼굴이 그다지 절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사람들과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것, 그것이 진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학수는...
서울에서 우연히 고향 친구들을 만나던 날, 학수는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쓰러졌다는 고향 병원의 전화를 받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던 건달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찾지 않으려 했지만 '네가 그러면 아버지와 똑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친구의 충고가 마음에 걸려 결국 고향행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학수의 파란만장한 인생 최대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뇌졸증으로 쓰러졌다는 아버지는 멀쩡해 보이고, 고향 경찰은 지명수배자라며 학수를 범죄자 취급합니다. 학창 시절 학수의 시를 훔쳐 신춘문예에 당선된 원준(김준한)은 학수의 첫사랑 미경(신현빈)의 약혼자가 되어 거들먹거리고, 학수가 그토록 괴롭히던 용대(고준)는 지역 건달이 되어 학수 앞에 나타납니다. 어서 빨리 고향을 뜨고 싶어도 지명수배 용의자인 탓에 그럴 수도 없는 상황. 학수는 고향에서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엉키면서 고향에 대한 원망을 쏟아냅니다. "고향이란게 해준거 하나 없으면서 발목은 겁나게 잡네."
하지만 영화 초반 무미건조했던 학수의 서울 생활과 비교한다면 고향에서의 학수 모습은 활기가 넘칩니다. 사람이란 사회적 동물입니다. 혼자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좋던 싫던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한 인간 관계에서 상처도 생기고, 절망도 느끼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과 삶의 희망도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학수는 모든 것을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어하지만, 결국 그가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에게 삶의 지혜를 얻고, 그가 잊고 지내던 친구 선미(김고은)에게 사랑을 느끼며 진정 행복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준익 감독은 그러한 학수의 변화를 통해 스스로 불행이라는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청춘들에게 조용한 충고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사랑한 것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완성된다."
[변산]의 주옥같은 대사는 선미에게서 완성된다.
랩으로 전하는 이준익 감독의 진심
[변산]은 [동주], [박열]을 통해 암흑의 시대를 살다간 청춘을 슬픈 감성으로 담아냈던 이준익 감독이 현대의 청춘에게 던지는 행복론입니다. 하지만 어찌보면 꼰대가 젊은이들에게 "너희는 행복한줄 알아. 우리땐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어."라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사실을 이준익 감독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나도 너희를 이해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러한 이준익 감독의 목소리는 랩을 통해 영화 속에 드러납니다.
솔직히 저만 하더라도 [변산]의 주요 소재이기도한 '쇼미더머니'를 보지 않습니다. 물론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제게 있어서 랩은 '서태지와 아이들' 정도일뿐, 요즘 이름조차 이상한 유명 래퍼들의 랩은 아무래도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것이 세대차이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준익 감독은 [변산]에 요즘 세대의 랩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제가 랩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학수가 심뻑이라는 이름으로 읊어대던 랩은 한편으론 슬프고, 한편으론 흥겹고, 한편으로 정겨웠습니다. 랩이라는 것에 이렇게 많은 감정이 담겨져 있는줄 미처 몰랐습니다.
물론 [변산]에 담겨진 랩의 완성도는 저처럼 랩에 대해 잘 모르는 나이든 관객이 아닌, 랩을 좋아하고, 랩을 즐기는 요즘 젊은 관객의 평가가 진짜 평가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랩을 잘 모르던 제가 [변산]의 랩에 여러가지 감성을 느꼈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단순한 꼰대의 잔소리가 아닌, 요즘의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진심어린 충고를 하고 싶은 이준익 감독의 마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랩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하지만 심뻑이 읊어대던 랩을 듣고 있으면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준익 감독의 진심이 아닐까?
값나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지는 말자.
과거의 굴레이기도한 용대와 갯벌에서의 한바탕 싸움으로 학수는 모든 것을 떨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도망간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회피야말로 쉬운 해결책일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합니다. 결국 자신의 행복을 가로 막고 있는 것과 마주하고 정면으로 싸워 이기는 것. 그것은 학수와 용대의 갯벌 싸움만큼이나 힘든 일이지만, 진정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수는 그러한 삶의 진리를 그가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에게서 배웁니다.
어쩌면 [변산]은 요즘은 청춘을 담았다고 하기엔 너무 낙천적인 영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청춘이란 조금 낙천적이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IMF 시절 대학 졸업 후 몇년간 직장을 잡지 못하고 여름이면 찌는 듯이 덥던 옥탑방에서 하루 하루를 절망과 함께 보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나고나니 그때도 저는 행복했습니다. 당시엔 죽고 싶을 만큼 힘들고,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친구들과 술 한잔에 우정을 나누었고, 돈 한푼 없어도 사랑에 빠졌고, 희망하나 없어도 내일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저는 젊었으니까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던 학수는 고향에서 한바탕 소동을 겪으며 자신이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자신을 짝사랑해준 선미가 있고, 대장암에 걸리자 "고기 태워 먹지 말고, 폭탄주 마시지마."라는 현실적인 충고를 해주는 아버지가 있고, 함께 웃고 떠들어주는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아직 한참이나 젊으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과 함께 펼쳐지는 학수와 선미의 흥겨운 결혼식 장면은 이준익 감독의 마지막 선물 같았습니다. 가진 것 없어 값나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는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말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청춘 3부작은 이렇게 [동주]의 절망으로 시작해서 [박열]의 반항을 거쳐 [변산]의 흥겨움으로 마무리됩니다.
[변산]을 보다보니 20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그렇게 불행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때가 그리울까?
헬조선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요즘의 청춘들도
언젠가는 젊었던 그때를 그리워할 날이 분명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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