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이야기들/BOOK STORY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 단편이란 이런 것이구나.

쭈니-1 2018. 7. 2. 17:19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덕분에 단편소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며칠전 이진욱, 고현정 주연의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경유(이진욱)는 소설가를 꿈꾸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대리운전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신세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옛 애인 유정(고현정)을 만나게 됩니다. 이미 작가가된 유정은 단편집을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편의 단편을 쓰지 못했고, 결국 경유가 학창시절에 쓴 단편을 가로채기 위해 경유에게 접근합니다.

솔직히 영화는 그냥 심심한 편이지만 한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이미 등단한 작가인 유정이 단편집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 속 출판사 편집위원은 유정에게 단편집을 내지 못하면 출판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이대로 사장될 수 있다는 협박까지합니다. 도대체 단편집이 뭐길래...

올해 내내 장편 소설만을 읽었던 저로써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을 보고나서 단편집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책장에서 성석제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견했습니다. 성석제라는 소설가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가 성석제 작가의 단편집이라는 사실 때문에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단편이란 이런 것이구나.


솔직히 처음엔 신선했습니다. 고작 몇 십여장으로 이루어진 단편 일곱편으로 이루어진 <내 인생 마지막 4.5초>는 긴 호흡으로 읽어야하는 장편소설과는 달리 몇 십분만에 한편의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짧기 때문에 긴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단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첫번째 단편소설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사고로 다리 난간 밖으로 추락하는 자동차 안에 갇힌 한 남자가 짧은 4.5초의 시간동안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본다는 내용입니다. 몇 십년을 산 이 남자의 일생은 30여 페이지를 간단 요약됩니다. '이렇게 한 남자의 일생을 단편으로 쓸 수도 있구나.'라는 신선함이 저를 감싸안았습니다.

하지만 신선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단편인 '금과 은의 왈츠'에서는 아파트 뒷산 정상에 오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 남자는 산을 오르며 자신의 삶과 아버지에 대해 회상합니다. '금과 은의 왈츠'를 읽으면서는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와 구성이 비슷해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계속 이런 식입니다. 처음엔 신선하게 느껴졌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앞의 단편을 약간만 바꾼 듯한 엇비슷한 구성 때문에 식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더군요.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쓴 것이 1995년 4월, '금과 은의 왈츠'를 쓴 것은 1995년 5월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 실린 일곱편의 단편은 1995년 4월부터 1994년 11월까지 고작 8개월만에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오랜 기간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8개월만에 일곱편의 단편 소설을 썼다면 아무래도 각 소설마다 새로운 구성을 생각하기엔 부족했을 것입니다. 일곱편의 단편들이 엇비슷한 구성 때문에 식상하게 느껴진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 인상적인 단편을 몇 개 꼽으라면...


일단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제가 처음 읽은 성석제 작가의 단편이라 그런데 신선하게 느껴졌고, 제목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꿩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른 봄'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본능을 버림으로써 8년의 세월동안 사냥꾼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수컷 꿩 장끼가 사육장을 탈출한 젊은 암컷 꿩 까투리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희생되는 이야기로 굉장히 짠 하더군요.

성석제 작가는 마지막에 가서는 더이상 할 이야기가 없던지([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의 유정도 마지막 단편소설을 쓰지 못했었습니다.) 마지막 단편소설인 '스승들'에서는 자신의 경험담으로 책을 가득 채웁니다. 무려 80여페이지로 이루어진 '스승들'은 다른 단편보다 굉장히 길었습니다. 하긴 이건 창작이라기보다는 저기 자신의 성장담이니 얼마든지 모자란 페이지를 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단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어서 금방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읽을 수 있었지만 각 단편들이 엇비슷했고, 마지막엔 자신의 경험담으로 대충 마무리한 것 같아 조금은 씁쓸했습니다. 영화 속의 유정이 그러했듯이 마치 숙제를 하듯이 억지로 단편집을 낸 듯한 느낌도 문득 들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단편 소설을 처음 읽는 것이라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