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데이빗 린치
주연 : 로라 던, 제레미 아이언스, 저스틴 테럭스
개봉 : 2007년 7월 26일
관람 : 2007년 7월 31일
등급 : 15세 이상
[트윈픽스]에 도전했던 적이 있었다.
15년쯤 전의 일이었습니다. TV에서 [트윈픽스]라는 외화 시리즈가 방영한다며 대대적인 홍보를 했었습니다. 당시 TV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열심히 녹화하여 반복 시청하고 있었던 저는 겁 없이도 이번엔 [트윈픽스]에 도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스릴러, 미스터리, 컬트의 걸작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있었으며, 당시로써는 TV에서 방영하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었던 [트윈픽스]. 전 분명히 제가 [트윈픽스]를 좋아할 것이라 확신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몇 회 보기도 전에 도전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트윈픽스]는 당시 제겐 엄청난 상처를 안겨준 외화 시리즈입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던 저는 한참 영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었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컬트영화라 불리 우는 소수의 마니아를 거느린 영화를 즐겨야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바로 그 첫 번째 도전이 [트윈픽스]였으며 컬트영화에 대한 첫 번째 도전에서부터 저는 처절하게 패하고 말았던 겁니다.
이후 데이빗 린치라는 이름은 제겐 하나의 커다란 장벽이었습니다. 저는 데이빗 린치 감독을 이기고 싶었고, 그의 영화를 결코 좋아할 수 없었으면서도 꾸준히 그의 영화가 개봉하면 봤습니다. [블루 벨벳], [광란의 사랑],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 등등(그러면서도 극장판 [트윈픽스]는 볼 수 없었습니다. TV판에서의 악몽 때문에...)
하지만 결국 2007년 7월 31일, 저는 또다시 데이빗 린치 감독에 대한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트윈픽스]의 패배이후 그런대로 그의 영화에 대해서 잘 버텨왔다고 자부했지만, 그의 최신작인 [인랜드 엠파이어]엔 패배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패배 그 이상의 그 무엇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영화를 보며 '제발 어서 끝나라'를 얼마나 속으로 외쳤는지... 이 영화를 보는 그 순간은 제겐 악몽 그 자체였습니다.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사실 [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러 가기 전 이 영화에 대한 정보와 예고편 등을 철저하게 섭렵하였습니다. 또 다시 패배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파악한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랬습니다.
여배우 니키(로라 던)에게 '슬픈 내일의 환희'라는 새로운 영화에 캐스팅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니키는 이 영화가 폴란드의 단편영화 '47'을 리메이크한 것이며 '47'은 주연배우의 살인사건으로 인하여 완성되지 못했다는 불길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결국 촬영이 시작되고 니키는 현실과 영화 속 세계를 혼동하기 시작하고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는 초현실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뭐 이 정도의 스토리 라인이라면 제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현실과 영화 속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배우의 이야기라면 흔하지는 않지만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의 초반까지 저는 잘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간혹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있었지만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전의 영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 저는 몇몇 이해 안 되는 장면들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작은 구멍이 점점 커져서 거대한 구멍이 되는 것처럼 [인랜드 엠파이어]의 이해 안 되는 장면들은 점점 세력을 확장해 나가더니 결국은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저를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정확하게 니키가 현실과 영화 속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그 시점에서부터였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악몽의 연속입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수많은 상황들이 제시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로 엮는 스토리는 도대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제는 내일이 되고, 영화는 현실이 됩니다. TV속 주인공들은 현실의 내가 되고, 현실의 나는 스크린 속의 주인공이 됩니다.
시간적인 상황도, 공간적인 상황도, 그 무엇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영화는 3시간이라는 무지막지한 시간동안 관객들을 붙잡아 놓습니다. 영화 중간 중간 참지 못하고 나간 관객들도 많았지만 결코 그런 최악의 패배만은 당할 수 없었던 저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네가 이겼다.'
이것이 21세기 영화라면 난 정말 큰일 났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CGV강변의 하늘공원에서 한강 바람을 10분 정도 쐬고 난후에야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인랜드 엠파이어]의 네티즌 평을 살펴보니 4차원 이야기도 있고, 평행 우주 이야기도 있고, 이건 뭐 영화보다 더 어려워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 못지않게 영화를 많이 보고, 그들 영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글로 쓰며 영화에 대한 이해력을 스스로 자부해왔던 저는 [인랜드 엠파이어] 한편의 영화로 인하여 제가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였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너무 오락영화만 치중하고 봐서 [인랜드 엠파이어]같은 영화를 더 이상 이해할 수가 없게 된 것은 아닌지... 제 스스로 반성해 봅니다. 이 영화의 카피처럼 만약 [인랜드 엠파이어]가 21세기 영화라면 전 21세기에 영화를 즐길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21세기의 영화를 즐기려면 여러 영화들을 경험하며 이런 어려운 영화들에 대한 내성력을 키워야만 하는 것인지...
역시 데이빗 린치 감독은 제겐 넘을 수 없는 벽인가봅니다. [인랜드 엠파이어]를 통해 좀 더 다양한 영화들을 보고 즐겨야겠다는 결심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네요. 아직도 3시간동안의 고문과도 같았던 시간이 떠오르면 끔찍합니다.
P.S. 다른 건 몰라도 이 영화에 등장한 토끼 시트콤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가 정말 궁금합니다. [킹콩]의 나오미 왓츠가 토끼 분장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었는데, 도저히 그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긴 이 영화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그 장면 뿐만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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