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크레이그 질레스피
주연 : 마고 로비, 세바스찬 스탠, 앨리슨 제니
개봉 : 2018년 3월 8일
관람 : 2018년 6월 18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드디어 제90회 아카데미 영화를 독파했다.
지난 2, 3월 제가 유독 많은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이유는 제90회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를 챙겨 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놓친 영화가 꽤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영화가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에 노미네이트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와 앨리슨 제니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크레이그 질레스피 감독의 [아이, 토냐]입니다. 그 중 [팬텀 스레드]는 지난 4월에 다운로드로 봤고, 이제 남아있던 [아이, 토냐]까지 봤으니 비로서 제90회 아커데미 영화를 독파한 셈입니다.
[아이, 토냐]는 미국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트리플악셀을 성공시킨 토냐 하딩의 이야기를 그녀 본인과 가족, 그리고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트리플악셀 최초 성공보다는 동료 피겨스케이팅 선수인 낸시 캐리건 청부 폭행 사건으로 더 유명합니다. 낸시 캐리건 청부 폭행 사건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직전에 벌어진 사건으로 연습을 마치고 대기실로 이동하던 낸시 캐리건이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사건입니다.
FBI 수사결과 토냐 하딩의 전남편인 제프 길롤리가 폭행사건의 배후에 있었고, 토냐 하딩은 사건을 청부하지는 않았지만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토냐 하딩은 미국 빙상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당했고, 법원은 토냐 하딩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함으로써 그녀가 실질적인 범인임을 확정합니다. [아이, 토냐]는 이렇게 파란만장한 토냐 하딩의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그녀는 왜 은반위의 악녀가 되었을까?
우리나라 관객에게 피겨 스케이팅은 김연아 선수로 인하여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토냐 하딩은 우아함, 아름다움과는 애초에 거리가 먼 선수였고 오히려 은반위의 악녀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낸시 캐리건 사건이 터지자 전 세계가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스스로 은반위의 악녀가 되었던 것일까요?
[아이, 토냐]는 토냐 하딩의 어린시절부터 눈길을 돌립니다. 그녀의 삶은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그녀의 어머니 라보나 골든(앨리슨 제니)의 잘못된 교육관이 있었습니다. 라보나는 딸을 거칠게 몰아부쳐야 그녀가 더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고, 어린 나이에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딸을 격려와 칭찬이 아닌 매와 욕으로 학대합니다. 이렇게 어린시절부터 폭력에 노출된 토냐(마고 로비)는 어린 나이에 제프(세바스찬 스탠)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그 역시 툭하면 토냐를 폭행했습니다.
결국 라보나의 잘못된 교육관은 토냐를 자존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자존감이 없던 토냐는 제프라는 날건달과 쉽게 사랑에 빠져 폭행으로 점칠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해나갑니다. 이렇게 그녀 주위는 그녀가 스스로 은반위의 악녀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듭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토냐는 사랑보다 미움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게 됩니다.
날 실력으로만 평가하면 안돼요?
저 역시 [아이, 토냐]를 보기 전까지만해도 토냐 하딩에 대해서 동료를 청부 폭행한 희대의 악녀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니 그녀가 은반위의 악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특히 토냐에게 가장 애잔했던 장면은 그녀가 아무리 완벽한 연기를 펼쳐도 결코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자 심시위원에게 왜 자신의 점수가 낮은지 묻는 장면입니다.
"심판들이 날 싫어하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점프를 모두 성공했잖아요."
"토냐. 애초에 실력이 문제가 아니에요. 비공식적으로 말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에요.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잖아요. 우린 건전한 가족을 보여줘야 하는데 당신은... 남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어요."
"난 건전한 가족이 없어요. 그냥 실력으로만 평가하면 안돼요?"
결국 토냐는 미국이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실력에 비해 저평가되었고, 그것은 그녀를 더욱더 은반위의 악녀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낸시 캐리건 사건이 터지며 그녀는 더이상 회복할 수 없는 긴 수렁에 빠집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 영화의 뚝심
[아이, 토냐]가 대단한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이 영화는 토냐 하딩을 미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해서 그녀를 은반위의 악녀로 과장되게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철저하게 실제 인물과 싱크로율이 맞춰진 배우들이 그냥 있는 그대로 캐릭터들을 연기할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배우들이 굉장해보였습니다. 특히 마고 로비, 세바스찬 스탠, 앨리슨 제니는 엽기적이기까지한 실제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연기함으로써 그들 연기 인생에 큰 한 획을 그었습니다.
변명은 하지 않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과장도 하지 않습니다. 토냐 하딩, 제프 길롤리, 라보나 골든, 낸시 캐리건의 폭행을 사주한 션 그리고 당시 사건을 취재한 기자까지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러명의 인터뷰를 통해 [아이, 토냐]는 토냐 하딩이라는 인물과 낸시 캐리건 폭행 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려 노력할 뿐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면 토냐 하딩이 불쌍해보입니다. 학교를 중퇴하면서까지 매달렸던 피겨스케이팅을 영원히 금지당한 그녀는 차라리 감옥에 가둬달라고 판사에게 애원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을 금지당했고, 영화 말미에는 먹고 살기 위해 복서가 되어야 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힘찬 트리플악셀과 링 위에서 상대의 펀치에 맞아 다운되는 장면이 교차되면서 토냐 하딩의 현재 모습을 재조명합니다. 물론 그녀가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잘못된 교육관과 폭력적이고 멍청한 남편을 만났다고해도 그녀는 은반위의 악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녀 선택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그녀에게 돌을 던지기엔 실력이 아닌 이미지로 그녀를 차별한 우리의 잘못도 느껴져서 안쓰러웠습니다. [아이, 토냐]를 보고나니 이 영화를 극장에서 놓친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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