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이야기들/BOOK STORY

<올림픽의 몸값 전 2권> - 주인공을 응원할 수도, 안할수도 없는 딜레마의 찝찝함.

쭈니-1 2018. 5. 28. 18:10



드디어 <올림픽의 몸값>을 보다.


<방해자>를 인상깊게 본 후 다음 차례로 오쿠다 히데오의 대표작인 <올림픽의 몸값>을 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연달아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을 읽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악의 추억>, <리틀 포레스트>, <공포의 제국>을 읽은 후에서야 <올림픽의 몸값>을 집어들 수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올림픽의 몸값>은 <방해자>와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입니다. 장르는 추리 소설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범인을 추리하거나 마지막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사건을 토대로 그 사건에 얽힌 여러 캐릭터들을 보여주고 그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관찰하는 형식입니다.

<올림픽의 몸값>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온 일본이 도쿄 올림픽의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도쿄 올림픽을 방해하겠다는 폭파범의 협박 편지와 함께 대담한 폭파 사건이 연달아 벌어집니다. 8천만엔이라는 거금의 몸값을 요구하는 폭파범. 올림픽을 사수하기 위해 일본 경찰들이 총 동원되고, 도쿄 올림픽의 개회식 날짜가 점점 다가옵니다.



왜 시마자키 구니오는 폭파범이 되었을까?


<올림픽의 몸값>은 <방해자>가 그러했듯이 처음부터 사건의 범인을 밝힙니다. 폭파범의 정체는 시마자키 구니오라는 명문 도쿄대 대학원생입니다. 그는 아키타라는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출중한 외모와 명석한 두뇌로 도쿄대에 입학, 가족과는 전혀 다른 엘리스 코스의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는 청년입니다.

하지만 올림픽 공사에 동원된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밑바닥 인생의 현실을 깨닫게 되고, 전세계에 과시하기 위한 거짓된 번영으로 범벅이된 올림픽에 반감을 갖게 됩니다. 결국 그는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위해 가난한 서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 국가에 반기를 꺼내듭니다. 그것이 명문대학원생이 폭파범이 된 사연입니다.

<올림픽의 몸값>은 크게 네가지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주인공인 시마자키 구니오의 시선, 그리고 경시감인 아버지를 둔 중앙 텔레비전 방송국 예능국 PD인 스가 다다시의 시선, 경시청 수사1과 5계 형사인 오치아이 마사오의 시선, 그리고 시마자키 구니오를 남몰래 짝사랑하는 평범한 스무살 여성 고바야시 요시코의 시선입니다. 그들은 모두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마자키의 혁명은 성공했을까?


<올림픽의 몸값>을 읽다보면 과연 시마자키 구니오를 응원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를 체포하려는 오치아이 마사오를 응원해야하는지 갈등하게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시마자키 구니오의 눈에 비친 당시 일본의 현실은 분명 비정상적입니다. 제가 만약 시마자키 구니오라고해도 이러한 현실에 분노하며 반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마자키 구니오를 응원할 수 없는 것이 그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올림픽을 방해한다고해서 바뀌는 것이 있긴 할까요? 8천만엔이라는 거액의 몸값으로 시마자키 구니오가 하려고 하는 것은 거대한 혁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필로폰을 상습 투여하는 등 제가 응원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습니다.

하긴 <방해자>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은 어느 누군가를 응원하기 보다는 그저 객관적인 입장에서 소설속 캐릭터들을 지켜보게끔 만듭니다. <방해자>에서는 그러한 방식이 꽤나 인상깊었는데, 솔직히 <올림픽의 몸값>에서는 조금 불편했습니다. 시마자키 구니오를 응원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기묘한 상황. 그러한 상황은 애매한 결말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책을 읽고나서 뭔가 찝찝함이 남았습니다.



일본인이 마냥 밉지만은 않았다.


<올림픽의 몸값>을 먼저 읽은 구피는 책을 읽으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합니다. 구피는 지금까지 일본인이 마냥 싫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와 일본이 얽힌 근현대사를 감안한다면 일본인이 마냥 싫은 구피의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올림픽의 몸값>을 읽고나니 일본인들도 참 힘들게 살았겠구나 라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긴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1964년 일본의 현실은 마치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우리나라의 실정과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은 후 폐허가된 상황에서 세계인에게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한 올림픽이라는 국가적인 행사. 그리고 올림픽을 위해 또다시 희생되어야 했던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

도쿄 올림픽 이후 일본 경제를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서울 올림픽 이후 우리나라 경제도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했던 서민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올림픽의 몸값>을 보며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슬픈 자화상이 느껴지는 묘한 기분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