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몸값>를 읽을 차례였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방해자>를 읽은 후 아련한 여운을 느낀 저는 곧바로 오쿠다 히데오의 또 다른 추리 소설 <올림픽의 몸값>을 집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연달아 일본 추리소설을 읽으려니 일본식 이름을 가진 캐릭터들이 제대로 제게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방해자>와 <올림픽의 몸값>사이에 우리나라 추리소설인 <악의 추억>을 읽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우리나라 추리소설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읽었던 허접하기만 했던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김성종의 추리소설에서부터 뭔가 있는 척, 잘난체하던 최제훈의 <일곱개의 고양이 눈>, 그리고 제 인생 최악의 추리소설로 기억될만한 유광수의 <진시황 프로젝트>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또다시 우리나라의 추리소설을 믿기로한 것은 작가 이정명에 대한 이름값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정명은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을 작가입니다. 비록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앞선 두 작품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악의 추억>은 우리나라 추리소설에 대한 제 안좋은 기억을 뒤집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악의 추억>은 전혀 그러지 못했습니다.
웃는 시체와 7년전 죽은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
<악의 추억>은 안개에 휩싸인 빈민가 침니랜드와 해협을 사이에 둔 부유층이 사는 뉴아일랜드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7년전 엽기적 연쇄살인마인 데니스 코헨 사실 과정에서 머리에 총알이 박힌 형사 크리스 매코이와 그의 심리분석관이며 파트너인 라일라 스펜서가 주인공입니다.
사건의 시작은 침니랜드와 뉴아일랜드를 잇는 케이블카에서 미소짓는 얼굴로 살해당한 고급창녀 린지 루이스의 시체가 발견되면서부터입니다. 정직 상태인 매코이는 출세 지향적인 제임스 헐리 반장이 이끄는 수사팀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는 이 모든 범행이 데니스 코헨의 짓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데니스 코헨은 7년전 매코이의 총에 맞아 죽었기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살인사건은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벤자민 화이트가 범인으로 지목됩니다. 하지만 매코이는 벤자민 화이트는 그저 데니스 코헨이 쳐놓은 함정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데니스 코헨의 실체에 접근하던 매코이는 데니스 코헨의 충격적 정체를 알게됩니다.
작은 어거지가 점점 큰 어거지가 된다.
확실히 <방해자>를 읽고나서 <악의 추억>을 읽으니 두 추리소설의 차이가 더 확연히 눈에 보입니다. <방해자>는 방화라는 아주 작은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로인하여 파멸해가는 캐릭터로 이야기를 확장합니다. 하지만 <악의 추억>은 그 반대의 전개를 보여줍니다. 일단 웃고 있는 미모의 여성 시체라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자극적인 소재로 시작하지만, 거창했던 시작과는 달리 결말로 가면 갈수록 점점 초라해집니다. 생각해보니 <진시황 프로젝트>도 그랬었습니다.
제가 결정적으로 <악의 추억>에 실망한 것은 사건의 전개가 너무 주먹구구식이라는 점입니다. 하긴 처음부터 웃는 여자 시체라는 너무 큰 딱밥을 던져 놓았기에 범인이 왜 그런 행위를 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어거지가 필요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어거지로 시작된 전개는 뒤로 가면 갈수록 점점 큰 어거지가 되어 버립니다.
뒤로 가면 갈수록 어기지가 커지다보니 결국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조작된 기억이라는 만병통치약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기억이 조작되었다고하니 매코이가 벌이는 이 어거지같은 상황들이 단번에 해결되는 것이죠. 참 편리해서 좋지만, 이러한 어거지를 심리 추리소설로 포장하는 출판사의 상술이 씁쓸하게만 느껴집니다.
어설픈 반전은 이제 그만...
<방해자>와 <악의 추억>의 또다른 차이는 반전 유무입니다. <방해자>는 반전이 없습니다. 그저 캐릭터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아둥바둥하다가 자연스러운 비극을 맞이할 뿐입니다. 하지만 <악의 추억>은 마치 억지설정으로 덕지덕지 포장된 3류 스릴러 영화를 연상하게 만드는 반전을 어거지로 만들어냅니다. 솔직히 저는 <악의 추억>의 반전은 소설의 중반부에 이미 눈치챘는데, 아마도 제가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를 너무 많이 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악의 추억>의 반전은 새로운 것이 전혀 없는 어설픈 반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라일라의 비밀이 밝혀지는 부분도 그러합니다. 비슷한 성정을 가진 요 네스뵈의 추리소설 <스노우맨>에서 카트리네 브라트의 비밀이 밝혀지는 장면과 <악의 추억>에서 라일라의 비밀이 밝혀지는 장면을 비교한다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모든 반전이 상황 설명에 의해 관객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도록 하지 못하고, 소설속 캐릭터들이 주절주절 설명하는 것으로 풀어내는 것은 <악의 추억>이 얼마나 부족한 추리소설인지 스스로 증명하는 꼴입니다.
이정명이라는 작가의 이름값을 보며 "이번엔 다르겠지."라고 기대한 <악의 추억>. 하지만 <진시황 프로젝트>와 비교해서 조금 나을 뿐, 해외 추리소설과 비교한다면 역시나 부족한 것 투성입니다. 이로써 저는 더이상 우리나라 추리소설을 더이상 읽어선 안되겠다는 결심만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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