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이야기들/BOOK STORY

<개밥바라기별> - 60년대 청춘을 보낸 작가의 담담한 성장소설

쭈니-1 2018. 5. 31. 18:14



다시한번 한국 소설에 도전


2018년 독서를 야심차게 시작하면서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우리나라 소설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김탁환 작가의 <노서아가비>를 제외하고는 2018년 들어서 읽은 모든 우리나라 소설에 실망하였으니 말이죠. 이대로 우리나라 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안고 2018년을 보낸다면 앞으로도 영영 우리나라 소설을 읽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지막으로 한국 소설의 대가 황석영 작가의 <개밥바라기별>을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개밥바라기별>은 구피가 먼저 읽고 추천해줬습니다. 구피는 <개밥바라기별>이 대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성장소설이라며 술술 잘 읽혀진다며 제게 적극추천해줬습니다. 솔직히 구피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황석영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개밥바라기별>을 읽는 것은 자꾸 뒤로 미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구피의 추천 그대로 <개밥바라기별>은 60년대 사춘기를 보낸 준과 그의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처음엔 60년대 가난한 군사독재 시절을 배경으로한 우울한 분위기의 소설일 것이라 생각하며 책을 펼쳤는데 의외로 준과 친구들의 이야기는 젊음의 생동감이 느껴졌고, 결국 단 하루만에 책의 마지막장을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술술 잘 읽혀졌습니다.



60년대 그들


<개밥바라기별>은 베트남 파견이 결정된 유준이 며칠간의 특박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가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유준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방황하던 고등학교 사춘기 시절부터 스물한살 즈음의 일을 추억하게 됩니다. 장기간 무단 결석으로 고등학교는 퇴학을 당하고, 친구 인호와 함께 전국 방방곡 무전여행을 다니며 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미아와 사랑아닌 사랑에 빠지며, 대위라는 별명을 가진 장씨와 막노동판을 떠돌며 세상살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황석영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개밥바라기별>은 전혀 과장없이 아주 담담하게 유준의 방황을 잡아냅니다. 유준은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미아와의 사랑의 어긋남도 경험하지만, 그러한 그의 아픔은 마치 누구나 한번쯤 겪게되는 당연한 성장통이라는 듯, 별일 아닌 것처럼 표현되기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오히려 <개밥바라기별>이 더욱 인상적이었나봅니다. 60년대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던 전후 시대이고, 박정희라는 독재자가 군사정변을 주도하며 장기집권을 시작했던 시절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앗다는 것만으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 "우린 너희 젊은 세대가 상상도 못할만큼 힘든 시절을 살았다."라며 비장하게 젊음의 방황을 포장할만도 한데... 황석영은 오히려 담담하게 그 시절을 회상했던 것입니다.



<올림픽의 몸값>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그런 면에서 <개밥바라기별>은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과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가졌으면서도 전혀 다릅니다. <개밥바라기별>과 <올림픽의 몸값>은 1960년대 전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주인공은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 명문대생이지만 자신의 안전한 미래에서 벗어나 방황을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올림픽의 몸값>의 사마자키 구니오는 겉으로는 담담한척 하지만 도쿄 올림픽을 방해하는 자신만의 혁명으로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겠다는 다소 황당한 시도를 합니다. 그러한 사마자키 구니오의 선택은 그렇기에 후반부가 되면될수록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돈인지, 혁명인지) 제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달리 <개밥바라기별>의 유준은 온 힘을 다해 반항을 하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걷습니다. 그렇기에 <올림픽의 몸값>이 상당히 영화적이라면, <개밥바라기별>은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적인 유준의 모습은 이제 40대 중반에 접어든 내 자신을 뒤돌아보게 만듭니다.



대가의 소설은 이래서 다르다.


<개밥바라기별>을 읽은 구피는 "역시 대가의 소설은 다르다라는 것을 느꼈다."라며 짧은 서평을 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설프게 할리우드 스릴러의 반전을 따라하기에 급급한 유광수 작가의 <진시황 프로젝트>, 이정명 작가의 <악의 추억>을 읽다가 황석영 작가의 <개밥바라기별>을 읽으니 필력이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소설의 제목인 '개밥바라기별'은 금성을 뜻한다고 합니다. 금성이 새벽에 동쪽에 나타날 적에는 '샛별'이라고 부르지만 저녁에 나타날 때에는 '개밥바라기별'라 부른다고 하네요. 식구들이 저녁밥을 다 먹고 개가 밥을 줬으면 하고 바랄 즈음에 서쪽 하늘에 나타나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샛별'이라는 예쁜 이름과 '개밥바라기별'이라는 궁상맞은 이름의 대비는 60년대에 대한 우리나라의 현실과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으로 <개밥바라기별>의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남겨봅니다. 헤어지며 다음을 약속해도 다시 만났을 때는 각자가 이미 그때의 자기가 아니다. 이제 출발하고 작별하는 자는 누구나 지금까지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갈 것이다. 그렇습니다. 60년대의 우리나라는 이미 지났고, 현재는 우리나라는 그때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때와는 다른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베트남전 참전을 위해 어둠 속의 터널을 통과하는 기차에 몸을 맡긴 유준의 마지막이 아련하게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