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8년 영화이야기

[버닝] - 모든 것이 불확실한 희망없는 청춘의 자화상

쭈니-1 2018. 5. 25. 11:35



감독 : 이창동

주연 :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개봉 : 2018년 5월 17일

관람 : 2018년 5월 23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16년 전의 나는 비참하고 한심했다.


제겐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대해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때는 2002년 여름. 저는 다니던 회사에서 인원감축으로 인한 정리해고가 되었고, 그 충격으로 인하여 몇 개월간 집에서 빈둥거리며 백수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중 국내 최대 영화 예매 사이트인 맥스무비에서 영화전문기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본 후 리뷰 쓰는 것을 좋아하기에 영화전문기자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입사지원서류에는 자기소개서와 함께 최신 영화평 쓰기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 제가 선택한 영화는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였습니다. [오아시스]는 내 취향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품성이 있는 영화의 평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그렇게 만만한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인생막장을 사는 종두(설경구)와 중증뇌성마비장애인 공주(문소리)가 사회의 편견을 깬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오아시스]의 영화평을 쓰기 위해 저는 두번이나 영화를 봐야 했고, 그 결과 한껏 기교를 부린 영화평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서류 심사에서 떨어졌고,  그러한 저는 사실을 곧바로 수긍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아시스]에 대한 제 영화평은 나답지 않은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평상시 하던대로 [오아시스]에 대한 제 진솔한 이야기를 글로 담았다면 어쩌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지도 몰랐을텐데, 그땐 영화전문기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에 나답지 않은 글을 쓰고 말았습니다.

그날 이후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개봉하면 이상하게 주눅이 듭니다. 그렇기에 DVD를 구입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이창동 감독의 대표작 [박하사탕]을 보지 못했고, 2010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시]는 아직까지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제가 좋아하는 배우인 전도연이 2007년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밀양]만 제대로 챙겨보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버닝]이 개봉했을 때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젠 [오아시스]에 대한 아픈 추억을 떨쳐 버릴 때도 되었습니다. 벌써 16년 전 일인걸요. 만약 그때 제가 맥스무비 영화전문기자가 되었다면 구피를 만나지도 못했을테니 어쩌면 전화위복인 셈입니다.


2002년 여름의 나는 정말로 비참했고, 죽고 싶을만큼 불행했다.

열심히 일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해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그저 한심한 내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16년 전의 나는 그러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종수의 마지막 희망


수요일 저녁. 회사 일을 일찍 마치고 곧바로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기대했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 불발되었고, 신작 영화가 개봉되면 상영관을 점차 찾기 힘들어질 [버닝]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저녁식사도 건너뛴채 본 [버닝]의 첫 느낌은 영화 속 주인공인 종수(유아인)가 꼭 16년 전의 내 모습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남들 앞에 소설가를 꿈꾼다며 자신을 소개하는 종수는 사실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조차 정하지도 못한 말만 소설가 지망생일 뿐인 유통회사 알바생입니다. 파주에서 농사를 짓는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 폭행죄로 재판을 받고 있고, 어머니는 어린시절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 그에겐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난 것입니다. 아무도 종수에게 관심 따위 가지지 않았지만 해미는 달랐습니다. 종수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주고, 같이 술을 마시자고 청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동안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날 종수와 해미는 섹스를 합니다. 

어쩌면 종수가 해미에게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그에게 해미라는 존재는 작은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모습한번 본 적이 없는 해미의 고양이를 돌보기 위해 해미의 집에 정성껏 찾습니다. 분명 번거로운 일이지만 오히려 종수의 얼굴에선 작은 희열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해미의 집 창가에서 해미를 생각하며 자위행위를 합니다. 그렇게 종수는 해미가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사이에도 끊임없이 해미와의 관계를 스스로 유지시키고 있었습니다. 기나긴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는 해미의 전화를 받은 종수는 들뜬 표정으로 인천공항으로 해미를 마중나갑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종수에게 해미의 등장은 가느다란 빛과도 같았을 것이다.

16년전 비참했던 나를 구피가 구원해준 것처럼,

종수는 해미와의 관계를 통해 작은 희망을 붙잡으려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 된다.



해미는 왜 벤에게 빠져든 것일까?


종수는 해미에게 희망이 없던 자신의 삶을 바꿀 작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와의 사랑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가 벤(스티브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와 함께 나타나며 종수의 희망은 점점 절망으로 바뀝니다. 사실 해미 역시 종수와 마찬가지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춘에 불과합니다. 나래이터 모델을 하지만 정기적인 수입이 없습니다. 게다가 많은 카드빚을 지고 있어 집에서도 쫓겨난 상황입니다. 그런 그녀가 거액이 들어가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왜 하필 아프리카냐고 묻는 종수에게 해미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를 이야기합니다. 종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희망이 없던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이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프리카에서 우연히 만난 벤은 해미에게 있어서 새로운 희망이 됩니다. 특별한 직업도 없이 노는 것이 일이라는 벤은 고급 외제차를 타고, 고급 클럽에서 친구들과 여유롭게 즐깁니다. 해미의 입장에서 그러한 벤의 일상은 자신이 꿈꾸는 모든 것입니다. 어쩌면 해미는 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도 그러한 특권층의 일상에 끼어들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이뤄지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종수는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해미에게 "왜 벤 같은 사람이 너와 만나준다고 생각해?"라며 묻고, 벤에게는 "난 해미를 사랑해요."라며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합니다. 

종수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결국 실형을 선고받았고, 오랜만에 연락한 어머니는 화려한 화장을 하고 나타나 핸드폰을 보며 히덕거리며 종수에게 돈 5백만원이 필요하다고 지껄입니다. 집에 하나뿐인 송아지는 팔수 밖에 없었고, 취업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점점 해미에게 집착하지만, 해미는 벤의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 몸부림칠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해미가 사라집니다.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벤은 우리 사회의 특권층이다.

종수는 그러한 그를 질투하고, 해미는 그러한 그를 동경한다.

유일한 희망인 해미마저 빼앗길 수 없었던 종수.

하지만 해미를 되찾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희망없는 청춘의 자화상 (이후 영화의 결말이 언급됩니다.)


[버닝]은 종수의 변화를 끈질기게 잡아냅니다. 영화 초반 아무런 희망도 없이 초점없던 종수의 눈빛은 해미를 만나며 잠시나마 반짝입니다. 하지만 벤의 등장으로 불안한 듯 흔들리더니, 해미가 사라지자 점점 광기에 휩싸입니다.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 취미라는 벤. 광기에 휩싸인 종수는 벤이 이야기한 비닐하우스가 의미하는 것이 해미와 같이 특권층을 동경하는 여자들이라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심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전이됩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해미가 종수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한 고양이의 이름은 보일입니다. 하지만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보일은 종수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벤의 집에 있는 고양이가 해미가 키우는 보일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종수가 "보일아."라고 부르자 종수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이 벤의 고양이가 해미가 키웠던 보일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합리적인 의심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해미가 어린 시절 빠졌다는 우물의 실체도 보일과 같습니다. 마을 이장은 물론 해미의 어머니와 누나까지 그런 우물은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종수가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어머니는 그러한 우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벤의 집에 있는 고양이는 해미의 고양이인 보일일까요? 아닐까요? 해미가 어린시절 빠졌다는 우물은 실제로 있었을까요? 아니면 해미가 지어낸 이야기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해미에게도 대입이 가능합니다. 정말 종수의 의심대로 벤이 해미를 죽이고 태운 것일까요? 아니면 해미는 그저 카드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모습을 감춘 것일까요? 이 모든 질문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한 희망없는 종수의 모습처럼...


정말 벤이 해미를 죽였을까?

아니면 그저 광기에 휩싸인 종수의 착각일까?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벤을 죽이며 나락에 빠진 종수의 비극만큼은 확실하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다가도 여운이 남았다.


벤을 죽이고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후 알몸으로 트럭을 몰아 사라지는 종수의 모습으로 [버닝]은 끝이 납니다. 솔직히 저는 '이게 뭐야?'라며 처음엔 허탈했습니다. 정말 벤이 해미를 죽였다는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은 가운데 종수의 살인이 갑작스럽게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화를 보고 열린결말이라고 하는데, 아직은 열린결말의 영화에 저는 익숙하지 못한가 봅니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고 집으로 향하며 내내 마음속으로 찝찝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하루가 지나고나니 [버닝]에 대한 여운이 조금씩 제 가슴 속을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벤이 해미를 죽였는가에 대한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벤이 해미를 죽였던, 안죽였건, 변하지 않는 진실은 벤이 종수에게서 해미를 빼앗아 갔다는 사실입니다. 해미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해도 벤과 함께 대마초를 피우며 특권층의 쾌락을 경험했던 그녀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종수에게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종수는 어쩌면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를 해미와의 사랑을 벤에게 빼앗겼고, 그에 대한 분노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 부모 세대보다 더 못살고 힘든 최초의 세대다. 지금까지 세상은 계속 발전해왔지만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없다. 요즘 세대가 품고 있는 무력감과 분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라며 연출변을 소개했습니다. 결국 종수는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젊은 세대의 무력감을 대변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벤이라는 특권층을 향해 분노를 표출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다고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나락에 빠질 뿐입니다. 제가 [버닝]을 보며 알 수 없는 여운에 휩싸인 것도 16년 전의 제가 그러한 나락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그러한 나락을 견뎌내면 절대로 올 것 같지 않은 희망의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사실을 젊은 세대가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버닝]은 결국 희망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끝맺었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종수의 비극을 보며 웅이의 앞날이 걱정되기도 했다.

언젠가 웅이도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좌절과 무기력, 분노를 느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럴때 과연 나는 종수의 부모와는 달리 웅이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버닝]은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나는 희망을 믿고 싶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