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8년 영화이야기

[레슬러] - 약간의 웃음을 위해 가장 중요한 주제를 잃었다.

쭈니-1 2018. 5. 16. 16:26



감독 : 김대웅

주연 : 유해진, 김민재, 이성경

개봉 : 2018년 5월 9일

관람 : 2018년 5월 15일

등급 : 15세 관람가



종로3가 서울극장의 추억


1년에 한번, 저는 회사 업무 때문에 정기적으로 종로 5가에 들립니다. 그리고 업무를 마치고나면 마치 뭔가에 홀리듯이 종로 거리를 배회합니다. 종로는 제게 추억이 많은 곳입니다. 학창시절 저는 혼자 종로를 걷길 좋아했는데 광화문, 종로, 동대문, 청량리를 거쳐 집까지 2~3시간을 걷곤 했습니다. 당시 종로에는 참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교보문고, 종로서적 등 대형 서점도 있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대형 레코드 판매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를 사로 잡은 것은 코아아트홀, 허리우드극장, 피카디리극장, 피카소극장, 단성사, 서울극장 등 종로에 밀집되어 있는 극장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서울극장에 추억이 많습니다. 서울극장은 당시엔 드물게 다관 극장이었고, 영화표를 사지 않아도 극장 내부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종로의 극장들을 돌아다니며 영화 전단지를 잔뜩 모아 서울극장에서 천천히 영화 전단지를 읽곤 했습니다. 그리고 아픈 추억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다른 친구들은 모두 취업에 성공했지만 마른 체형 때문에 번번히 면접에서 탈락한 저는 겨울방학 기간 도중에 면접을 봐야 하니 학교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부푼 기대감으로 양복을 차려 입고 학교에 갔지만 누군가의 장난전화였습니다. 그날 저는 난생 처음으로 담배를 샀고, 제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토록 좋아했던 서울극장에 앉아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땐 실내에서 담배를 피울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담배를 두대 정도 피우고는 담배가 가득 남은 담배갑을 쓰레기통에 버버리 다시 종로를 배회했었습니다.

종로 5가에서 업무를 끝내고 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저는 종로를 배회하다가 서울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제 기억 속 서울극장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26년전 쓰린 마음을 안고 담배를 피웠던 곳엔 스타벅스가 들어섰고,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줄섰던 외부 매표소는 5층으로 이전했더군요. 1층에 있는 자동 매표소에서 서툴게 영화표를 끊고, 정말 오랜만에 서울극장에서 영화 한편을 봤습니다. 그날 제가 본 영화는 [레슬러]입니다.


쓰디쓴 기억으로 남아 있는 1992년 1월의 어느날,

그날 내가 피웠던 담배의 매캐한 연기도 이젠 26년전의 일이다.

그런데 서울극장에 가니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다시금 내 마음을 아프게 후벼팠다.



코미디영화? 스포츠영화? 가족영화? 로맨틱 코미디?


사실 그날 종로에서 제가 감성에 젖지 않았다면 결코 [레슬러]를 볼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레슬러]는 제 기대작도 아닐 뿐더러, 개봉 후 영화를 보신 분들의 혹평 때문에 극장 관람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기 전인 화요일에 서울극장 앞에 섰기에 이번주에 개봉하는 기대작들은 아직 개봉 전이었고, 제가 볼만한 영화라고는 [레슬러]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레슬러]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레슬러]는 유해진 주연의 코미디 영화입니다. 유해진은 [극비수사], [베테랑], [1987] 등 진지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진가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전우치]에서 주인공 전우치(강동원)를 돕은 사람으로 변신한 개, 초랭이에서부터 시작하여,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에서는 배멀미 때문에 산적이 되었지만, 기구한 운명탓에 다시 해적이 되는 철봉역을 맛깔스럽게 연기했습니다. 특히 철봉이 고래를 본 적이 없는 산적들에게 고래를 설명하는 장면은 영화 속 최고의 명장면으로 손꼽힙니다. 2016년 [럭키]에서는 기억을 잃어버린 냉혹한 킬러 형욱을 연기하여 코믹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도 영화의 흥행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기도 했습니다. [레슬러]는 [럭키]에 이어 유해진에게 전적으로 기댄 영화입니다.

당연히 관객들은 [레슬러]에서 유해진의 코미디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슬러]는 엄밀하게 말해 유해진을 앞세운 코미디 영화는 아닙니다. 유해진이 연기한 귀보는 그의 이전 영화들과 비교해서 그다지 웃기지 않습니다. 물론 몇몇 웃긴 장면들도 있긴 하지만 그 웃음의 강도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화의 제목 그대로 레슬링을 소재로한 스포츠영화일까요? 솔직히 [레슬러] 속의 레슬링은 그저 귀보와 성웅(김민재)를 잇는 단순 소재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귀보의 부성애를 담은 가족영화에 더 가깝습니다. 문제는 귀보와 성웅의 부자관계에 귀보를 향한 가영(이성경)의 엉뚱한 사랑이 끼어들면서 [레슬러]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장르의 영화가 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선생님, 친구 누나를 짝사랑하고 그랬으니까.

하지만 귀보를 향한 가영의 짝사랑이 너무 두드러져서

성웅을 향한 귀보의 부성애가 가려져 버렸다.



너무 큰 기대는 너무 과한 중압감이 된다.


며칠 전 웅이는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2박 3일간 강원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웅이는 대뜸 자신은 착한 아들이라고 선언하더군요. 그래서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친구들이 모두들 아빠욕을 했지만 자신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순간 저는 굉장히 뿌듯해졌습니다. 중학교 3학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웅이가 친구들에게 제 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제가 웅이에게 좋은 아빠임을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저 역시도 무뚝뚝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더 가까웠습니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 정답게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성인이 되어서는 툭하면 술에 취해 술주정을 부리시던 아버지에게 많이 대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엔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좀 더 잘 해드릴걸... 그래서일까요? 저는 저희 아버지가 제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웅이에게 접근했고, 아직까지는 친구같은 아빠로 웅이와의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아빠 역할을 꽤 잘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레슬러]의 귀보와 성웅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아내의 죽음 이후 혼자 성웅을 키운 귀보에게 있어서 성웅은 이 세상 모든 것과도 같습니다. 귀보의 유일한 꿈은 금메달리스트의 아빠가 되는 것이기에 성웅이 레슬링 국가대표가 되게끔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한 귀보의 모습은 어찌보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애절한 부성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에 대한 귀보의 기대를 잘 아는 성웅에겐 큰 중압감일 것입니다. 귀보 역시 레슬링 선수였고, 사랑 때문에 국가대표를 포기했다는 과거가 있기에 다른 한편으로 성웅에 대한 귀보의 기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대리만족처럼 보이기도합니다. 그렇기에 귀보와 성웅의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영화 후반 성웅의 절규처럼 성웅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성웅에 대한 귀보의 기대였던 것입니다.


성웅에 대한 귀보의 사랑은 가슴 애절한 부성애일 뿐일까?

귀보는 성웅에게 "이게 전부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다그치지만

혹시 그것은 성웅을 통한 귀보의 대리만족은 아닐까?

[레슬러]는 그러한 성웅을 향한 귀보의 사랑을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엉뚱하게 튀어나온 가영의 사랑은 무리수였다.


분명 귀보와 성웅의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겉보기에 귀보와 성웅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귀보의 기대에 따라 레슬링 선수가 된 성웅에게 불만이 없을리가 없습니다. 레슬링 선수가 되기 위해 청춘의 대부분을 운동으로 보냈던 성웅은 결국 그에 대한 불만을 귀보에게 터트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대웅 감독은 좀 더 특별한 갈등을 원했나봅니다. 그래서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 가영의 짝사랑입니다. 가영은 성웅의 어릴 적 친구이며, 귀보에겐 가족과도 같은 성수(성동일), 미라(진경) 부부의 딸입니다. 게다가 성웅이 남몰래 가영을 짝사랑하고 있었으니 귀보를 향한 가영의 짝사랑은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억지스러운 설정이 끼어든 것은 유해진을 이용한 코미디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귀보와 성웅의 부자간의 갈등만으로는 영화의 재미를 살릴 수 없었기에 가영의 엉뚱한 사랑과 그로인해 당황하는 귀보의 모습을 통해 관객의 웃음보를 건드리려 했던 것이겠죠. 문제는 귀보를 향한 가영의 사랑을 그저 웃기는 해프닝으로 가볍게 여기기엔 상황이 심각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귀보를 향한 가영의 사랑은 귀보를 향한 성웅의 반항으로 이어지며 [레슬러]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버립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가 보기에 귀보와 성웅의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성웅을 향한 귀보의 과한 기대, 그러한 기대에 맞추기위해 청춘의 대부분을 운동으로 보낸 성웅. 그에 대한 갈등이 폭발하며 귀보와 성웅의 부자 관계는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귀보를 향한 가영의 짝사랑 때문에 귀보를 향한 성웅의 반항은 근본적인 문제에서 벗어나버립니다. 결국 레슬링 국가대표 선발선 결승전에서 보인 성웅의 꼬장은 그저 철 없는 어린아이의 투정이 되어버립니다. 그로인하여 [레슬러]는 귀보의 부성애에 대한 감동적인 가족영화가 될뻔하다가 멈춰버립니다.    


귀보를 향한 가영의 짝사랑은 확실히 [레슬러]에서 가장 강력한 웃음 코드이다.

하지만 이 웃음 코드는 귀보의 부성애라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희석시켰다.

약간의 웃음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주제를 잃었으니

[레슬러]의 선택이 결코 옳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몇몇 웃기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얼마 안지나 잊혀질 영화


[레슬러]에 대한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적당히 웃기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킬링타임용 오락영화를 원한다면 [레슬러]는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닙니다. 이전 영화보다는 떨어지지만 유해진의 코믹연기는 일단 중간 이상은 합니다. 거기에 자신에게 딱 알맞은 캐릭터를 연기한 이성경의 엉뚱함도 적당히 웃고 즐길만합니다. 그리고 귀보의 소개팅녀 도나로 등장한 황우슬혜는 예상하지 못한 웃음을 안겨줍니다. 도나의 활약을 보며 차라리 가영의 짝사랑 대신 귀보를 향한 도나의 짝사랑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면 좋았을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영화 후반 귀보와 성웅의 갈등 폭발이 억지스러웠고, 갈등 해소는 얼렁뚱땅 넘어가 버립니다. 귀보는 여전히 성웅에게 과한 기대를 하고 있으며, 성웅은 여전히 귀보의 과한 기대를 부응하기 위해 레슬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귀보의 성웅의 갈등은 영화의 초반에서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분명 [레슬러]는 가볍게 즐길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감동적이거나 포복절도할 웃음을 안겨준 영화는 아닙니다. 그저 1시간 5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재미있게 즐긴 후 극장 밖을 나서면 까맣게 잊어버릴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오락 영화일 뿐입니다. 저 역시 아버지의 한사람으로써 귀보와 성웅의 부자간의 갈등과 해소를 진솔하게 그렸다면 웅이와 함께 볼 의향이 있었는데, [레슬러]는 아들과 함께, 혹은 아버지와 함께 보기엔 너무나도 부족했습니다. 오랜만에 종로 3가 서울극장의 추억을 안고 본 영화인데, 그렇기에 아쉬운 마음을 한가득 안고 종로에서의 추억을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내가 정말 웅이에게 아빠노릇을 잘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그렇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소재로한 영화를 주목하는데

[레슬러]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진솔하게 풀어내기엔 많이 부족한

단순한 킬링타임용 코미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