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7년 영화이야기

[두번째 사랑] - 기다려줘서 고맙다.

쭈니-1 2009. 12. 8. 19:57

 

 



감독 : 김진아
주연 : 베라 파미가, 하정우, 데이비드 맥기니스
개봉 : 2007년 6월 21일
관람 : 2007년 7월 9일
등급 : 18세 이상

기다려줘서 고맙다.

[두번째 사랑]이 개봉했던 6월 21일. 저는 기대작이었던 [초속 5센티미터]를 봤고, 그 다음날은 달콤한 로맨틱코미디인 [러브 & 트러블]을 봤습니다. 그리고 곧장 벼락치기 시험공부에 돌입했습니다.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 영화를 볼 수 없었고 [검은 집]과 [4.4.4.], [두번째 사랑]을 놓쳤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본 영화는 '일본인디필름 페스티벌 리턴'에 소개된 일본 영화 세편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은 한국영화로는 8주 만에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는 [검은 집]을 봤습니다. 그리곤 또다시 [4.4.4.]와 [두번째 사랑]은 놓쳤다고 아쉬워했습니다.
7월 5일 새로운 영화들이 개봉하였습니다. 새롭게 개봉된 영화들 중 [익사일]과 [택시 4]를 봤습니다. 하지만 두 편 다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했기에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러던 중 놓친 영화들이 생각나더군요. 아직도 날 기다려주고 있으면 좋겠지만 흥행성이 없는 작은 영화들은 개봉 1주를 넘기기가 어려운 마당에 3주간이나 상영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고 있었습니다. [4.4.4.]는 지방에서만 상영하고 있었지만, [두번째 사랑]은 CGV 구로에서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교차 상영이지만 말입니다. 순간 얼마나 반갑던지... [두번째 사랑]을 보기위해 지하철을 타며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상영할 영화는 아닌 것 같은데... 국내 흥행 성적도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던데... 날 기다리느라 지금까지 힘겹게 버티고 있었구나. 기다려줘서 고맙다.'


 

 


[씨받이]의 현대적 변형

[두번째 사랑]은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김진아 감독이 직접 밝힌 [씨받이]의 남성판이라는 이 영화의 기본 스토리 구조도 흥미롭고, 그러한 스토리 구조 속에 한국과 미국의 가치관이 삽입되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변호사 앤드류(데이비드 맥기니스)와 소피(베라 파미가)는 겉보기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릅니다. 아이가 없는 그들의 결혼 생활은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소피는 아이를 갖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합니다. 바로 한국인 불법체류자인 지하(하정우)에게 돈을 주고 섹스를 하는 것. 그렇게라도 해서 아이를 갖고 앤드류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었던 소피와 미국에서 정착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던 지하는 거래를 시작합니다.
소피와 지하의 관계는 여지없이 [씨받이]의 상규(이구순)와 옥녀(강수연)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남녀가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남성이 움켜쥐고 있는 권력세계에서 그저 아이 낳는 몸뚱아리 취급을 받았던 옥녀의 한 많은 인생은 [두번째 사랑]에서는 돈이 지배하는 미국이라는 권력세계에서 그저 정자를 대주는 몸뚱아리 취급을 받는 지하의 사랑 이야기로 변주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옥녀가 낳은 아이는 상규의 집안에서 환영을 받지만 소피가 낳은 아이는 결코 앤드류에게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남과 여가 뒤바뀐 것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결국 아이가 필요한 것은 남성이고 그러한 남성은 자신의 핏줄을 중히 여깁니다. 상규의 경우는 비록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의 몸에서 낳은 아이지만 자신의 핏줄이기에 환영할 수 있었지만 앤드류의 경우는 비록 자신의 아내가 낳은 아이지만 자신의 핏줄이 아니기에 환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씨받이]와 [두번째 사랑]의 권력구조는 남성에서 돈으로, 희생당하는 대상도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핏줄에 대한 집착이라는 한국적인 관점에서는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입니다. 꽤 의미심장한 현대적 변형인 셈이죠


 

 


그녀의 사랑은?

[두번째 사랑]이 흥미로운 것은 [씨받이]의 현대적 변형이라는 것 외에도 소피의 미묘한 감정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앤드류가 말했던 것처럼 소피는 자기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성격의 여성입니다. 그렇기에 앤드류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를 위해서 지하와의 정자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앤드류에게 아이가 생기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고, 그것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일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하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 소피에겐 변화가 생깁니다. 그것은 앤드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소피 바로 자신을 위해서 지하를 찾게 되었다는 겁니다. 지하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거죠.
사실 제게 있어서 베라 파미가에 대한 첫인상은 상당히 안 좋았습니다. [디파티드]에서 그녀의 연기를 처음 봤던 저는 그녀가 맡은 마들랜이라는 캐릭터에 실망을 했고 더불어 그녀의 연기도 그리 인상 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두번째 사랑]에서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소피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섬세하게 연기해 냈습니다. 처음엔 지하를 그저 정자를 대주는 몸뚱아리 취급을 하던 그녀가 지하에게서 안식을 얻기 시작하면서 지하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엽니다. 아이가 임신함으로써 지하와의 관계는 끝나야하지만 그녀는 지하에게 다시 찾아갑니다. 그땐 아이를 얻기 위한 섹스가 아닌 자신을 위한 섹스를 하게 되는 겁니다.
분명 소피는 남편인 앤드류를 배신한 나쁜 여자입니다. 그녀의 의도가 좋았다고는 하지만 세상 그 어떤 남편이 소피의 선택을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소피는 사랑을 했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그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소피는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남편인 앤드류의 용서가 아닌 제3자인 관객의 용서를 말입니다.          


 

 


마이클 니만... 반갑다.

[두번째 사랑]은 음악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사실 저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영화감상에 있어서 제게 가장 취약한 부분은 바로 영화음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요. 하지만 [두번째 사랑]을 보며 낯익은 듯한 피아노 선율이 꽤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어쩌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음악을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습니다. 역시 마이클 니만이더군요. 순간 얼마나 반갑던지...
마이클 니만은 엔니오 모리코네와 함께 영화음악에 취약한 제가 거의 유이하게 알고 있는 영화음악감독입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피아노]에서였습니다. 종로의 작은 극장에서 혼자 앉아 봤던 [피아노]는 당시 제게 꽤 충격적인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제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종로의 '뮤직랜드'에 가서 [피아노]의 OST를 사는 것이엇습니다. 그것이 벌써 15년 전 일입니다.
사실 그 이후 마이클 니만의 음악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분명 어느 영화에선가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음악에 무심한 제가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사랑]에서 그의 음악을 인식했다는 이 영화에서의 마이클 니만의 음악이 [피아노]에서의 음악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성의 섬세한 심리 묘사를 한 영화라는 측면에서 [피아노]와 [두번째 사랑]이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기도 하네요.
암튼 [두번째 사랑]은 많은 면에서 반갑고 고마운 영화입니다. 3주 동안이나 절 기다려준 것도 고맙고, 마이클 니만의 음악도 반갑고, 행복한 소피의 마지막 장면도 너무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영화를 만나게 되어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