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두기봉
주연 : 황추생, 오진우, 장가휘, 임달화
개봉 : 2007년 7월 5일
관람 : 2007년 7월 5일
등급 : 15세 이상
이 영화를 보기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개봉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트랜스포머]가 극장의 거의 대부분의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어서 영화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CGV 목동의 경우는 8개의 스크린 중 6개의 스크린에서 2주 연속 [트랜스포머]가 상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트랜스포머]를 본 관객들은 극장에 아예 오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홍콩 느와르의 걸작 판정을 받은 [익사일]를 보겠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세워 놓았지만 [익사일]은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가야하는 CGV 상암에서 상영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원래 먹지도 않는 아침 식사도 하고(밖에서 밥 먹기 싫어서...) 집안 청소도 말끔히 해놓고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초속 5센티미터]를 보기위해 CGV 상암에 갔었으니 정확히 2주 만의 영화를 보기위한 머나먼 나들이입니다.
제가 이런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고 본 [익사일]은 홍콩 느와르 영화입니다. 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에 푹 빠져 지냈던 저로써는 [무간도]로 홍콩 느와르의 부활의 조짐을 목격했으며, 이제 [익사일]로 홍콩 느와르의 완벽한 부활의 현장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 기대에 맞게 [익사일]은 꽤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선 개봉하지 않았지만 두기봉 감독의 전작인 [흑사회]는 칸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되어 왕가위 감독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익사일] 역시 베니스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된 영화입니다. 특히 [익사일]은 [무간도]에 이어 할리우드에 리메이크 판권이 팔린 상태라고 하니 조만간 할리우드 판 [익사일]을 볼 날도 머지않아 보이는 군요. 이에 멈추지 않고 [익사일]은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국내 영화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익사일]은 과연 홍콩 느와르 영화를 완벽하게 부활시켰을까요? [무간도]로 인하여 그 부활을 의심하지 않는 제게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했을까요?
노땅들을 위해서...
[익사일]이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내 개봉관에서 천대를 받는 이유는 스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두기봉 감독의 최고 걸작이라는 [흑사회]가 국내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나마 [익사일]은 좀 나은 편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암튼 스타가 없는 이 영화는 포스터에서부터 그 한계가 느껴집니다. 화려한 배우들의 얼굴로 수놓은 다른 영화 포스터와는 달리 배우들의 생뚱맞은 하반신, 혹은 검은 그림자로 처리한 이 영화의 포스터는 스타가 없는 영화의 비애를 느끼게 해줍니다. 포스터를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관객들에겐 멈칫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한 비애는 영화에서도 느껴집니다.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성냥개비를 씹던 쌍권총의 주윤발, 우수에 찬 표정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던 장국영, 쌍코피를 흘리는 모습까지도 멋있었던 유덕화, 그리고 요즘 소위 잘나가는 홍콩 배우 양조위 등등, 뭐 이런 화려한 캐스팅을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익사일]의 배우진은 스타 캐스팅을 포기하더라도 너무 심하게 약한 것은 분명합니다.
배우들의 유명세로 영화를 평가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홍콩 느와르가 멋있는 배우들에 의해서 더욱더 멋있게 표현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익사일]의 배우들인 황추생, 오진우, 장가휘 등은 홍콩 느와르를 이끌어갈 카리스마가 부족해 보입니다.
바바리 코트와 쌍권총으로 겉멋을 강조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그들은 홍콩 느와르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 합니다. 하긴 [영웅본색], [첩혈쌍웅]등에 환호를 보냈던 저도 까까머리를 한 중학생에서 이젠 30대 중반을 넘긴 중년 아저씨가 되어 버렸으니 홍콩 느와르도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나버린 늙은 장르가 되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도 왠지 멋을 부리려 해도 전혀 멋이 나지 않는 [익사일]의 '노땅' 배우들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엔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나이는 많이 들었지만 아직 마음만은 청춘이라며 열심히 극장을 쫓아다니는 철없는 저처럼 홍콩 느와르 역시도 계속해서 젊은 새로운 얼굴들이 그 자리를 메꿔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욕심일까요?
캐릭터도, 스토리도 없다.
제가 이 영화의 아쉬움으로 스타 배우를 먼저 지목한 것은 홍콩 느와르가 스타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홍콩 느와르가 90년대 들어서 급속도로 몰락했던 이유는 스타 시스템의 한계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스토리도, 캐릭터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대부분의 홍콩 느와르 영화들은 한정된 몇몇 스타 배우들을 캐스팅한 것만으로도 홍콩 느와르 영화 몇 편을 뚝딱하고 만들어 냈고, 처음엔 스타에 환호했던 관객들이 서서히 흥미를 잃어버림으로써 몰락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홍콩 느와르 영화의 대표적인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타 시스템을 포기한 [익사일]은 홍콩 느와르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실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보완함으로써 새로운 홍콩 느와르의 모델을 제시한 것일까요? 아쉽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익사일]의 스토리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조직을 배신한 아화(장가휘)를 제거하기위해 그의 옛 친구들이 아화의 집을 찾습니다. 하지만 옛 친구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들은 아화에게 한몫 챙겨주기 위해 암살을 계획하지만 일이 꼬여서 아화는 죽임을 당하고 그들은 조직의 보스 대비(임달화)에게 쫓기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기존의 홍콩 느와르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길을 걷습니다. 우연히 어마어마한 황금을 손에 넣지만 아화의 부인이 대비에게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목숨을 걸고 대비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현란한 총격과 비장한 죽음, 그것이 끝입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끝나면 '뭐야 이게'라는 불만이 터져 나올 만합니다. 그들은 촘촘하게 잘 짜여 진 스토리와 그게 아니라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특수효과에 익숙하지만 [익사일]은 잘 짜여 진 스토리도, 그렇다고 화려한 특수효과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익사일]의 스토리는 홍콩 느와르 영화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스토리가 돋보였던 [무간도]와 비교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간도]는 홍콩 느와르 영화의 약점인 스토리를 보완하면서도 양조위, 유덕화라는 스타 시스템을 갖추었으나 [익사일]은 스타 시스템을 갖추지도 못했으면서 스토리마저 잘 짜여 지지 못했던 겁니다.
그냥 추억을 되씹는 것으로 만족하자.
단순한 관객의 입장에서 [익사일]이 왜 홍콩 느와르의 걸작 판정을 받았는지 알 수 없군요. 영화 평론가인 이동진의 글을 읽어보니 무지 어려운 말로 [익사일]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더군요. 하지만 그도 이 영화엔 '캐릭터도, 플롯도, 시나리오도 없다'라고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이 영화에 대한 감상에 대해선 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입니다. 단지 제가 못본 그 무엇을 그는 봤겠죠.
하지만 [익사일]이 지루하기만 했던 영화는 아닙니다. 20년 전의 추억을 되씹을 기회는 남겨 두었으니까요. 특히 저는 임달화의 출연이 기쁘기 그지없었습니다.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와는 달리 국내엔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임달화지만 [첩혈가두], [적나고양]을 통해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던 그와의 만남은 제겐 큰 기쁨이었습니다.
물론 임달화가 연기한 대비라는 캐릭터가 비열한 조직의 보스라서 아쉬웠고, 이젠 늙어버린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어쩌겠습니까. 세월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을...
두기봉 감독의 연출력을 보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비록 [익사일]은 제게 영화 그 자체로는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지만 제가 한참 홍콩 느와르 영화에 열광했을 당시 그 중심에는 오우삼 감독과 더불어 두기봉 감독의 영화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던 주윤발의 모습이 너무나도 멋있었던 [우견아랑], 카지노 영화의 걸작인 [지존무상]의 전통 속편임을 내세웠던 [지존무상 2], 그리고 매염방, 양자경, 장만옥을 내세웠던 SF 무협의 걸작 [동방삼협]까지... 그런 두기봉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옛 추억의 현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과도 같은 일입니다.
비록 [익사일]에는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 느와르 영화엔 아직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이렇게 강력한 추억이 제 머리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추억이 있기에 홍콩 느와르 영화가 개봉하면 다시금 머나먼 나들이를 감행하더라도 극장을 찾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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