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추리소설에 관심이 생겼다.
<디킨스의 최후>를 읽고나니 우리나라의 역사 추리소설은 어떨지 관심이 생겼습니다. 때마침 저희 회사에 <진시황 프로젝트>라는 생소한 제목의 우리나라의 역사추리소설이 있었기에 별 고민없이 선택했습니다. <진시황 프로젝트>는 한국문학의 다양성과 깊이를 확장하기 위해 제정된 '뉴웨이브문학상'의 첫회 수상작입니다. 저자인 유광수는 외국 소설만 가득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최근 나온 대중소설을 빠짐없이 읽고 거의 매일 여오하 한편씩 보며 스토리텔링을 연구하여 2년만에 <진시황 프로젝트>를 완성했다고합니다.
일단 책의 내용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토대로 한중일 3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벌이는 극단적 대결을 담고 있다고합니다. 책의 제목인 '진시황 프로젝트'는 진시황의 부활을 통해 강한 중국을 만들겠다는 중국 만족주의자들의 음모로, 이를 위해 진시황의 불로초를 가로챈 서불의 후예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살인사건이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하지만... 저는 <진시황 프로젝트>를 읽으며 몇 번이나 책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습니다. 정말 캐릭터는 최악이고, 스토리 전개는 두서 없이 엉망진창이며, 마지막 반전은 어설펐고, 문장력도 고등학생 수준처럼 느껴지는 길기만한 이 소설이 '뉴웨이브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009년 뤽 베송 감독과 장동건, 장쯔이를 주연으로 영화화까지 기획이 되었다고하니 경악스러웠습니다. 지그까지 제게 최악의 추리소설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었는데, 이번에 <진시황 프로젝트>로 바뀌었습니다.
살다 살다 이렇게 한심한 주인공은 처음이다.
일단 처음은 흥미진진했습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사람의 머리를 환도로 잘라 살해한 후 유유히 머리를 가방에 담아 사라지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 8반의 형사들이 머리를 맞댑니다. 광화문에서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은 일본에서 유력 인사들을 상대로 벌인 살인사건의 연장선에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진시황을 부활시키겠다는 음모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초반 내용입니다.
문제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강형사 캐릭터가 엉망이라는 점입니다. 강형사는 영화속 형사 캐릭터가 거의 그러하듯 반항적이고, 일중독에 빠져 있는 외로운 늑대같은 캐릭터입니다. 그에겐 방형사라는 여 후배가 있는데, 방형사는 강형사를 노골적으로 좋아하지만, 강형사는 방형사가 과외 제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여기까지는 강형사가 조금 전형적이지만 엉망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서교수의 조교인 채소연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 놀음을 하다가 괴한에 칼침을 맞고 쓰러집니다. 사람의 목을 가져가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한데 한가하게 사랑 놀음이나 하고 있는 강형사의 모습은 차라리 그가 그냥 초반에 죽음을 맞이하고 방형사가 강형사의 복수를 위해 나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게끔 만듭니다. 하지만 강형사는 혼수상태 속에서 괴상망측한 과거 트라우마를 겪은 후 깨어나고, 사건을 해결하겠다며 나섰다가 굴욕이라는 굴욕은 모두 맛봅니다. 저런게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책을 읽는 제가 다 창피해질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유광수가 거의 매일 봤다는 영화가 어떤 영화길래...
한심스러운 것은 강형사 뿐만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캐릭터가 한심하긴 마찬가지인데, 채소연은 마치 70, 80년대 멜로 영화 속 주인공같고, 그나마 괜찮았던 방형사는 일본에서의 과거가 드러나며,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소설의 후반부엔 서교수가 경복궁에서 일본, 러시아, 중국 대사를 인질로 잡아 놓고 명성황후의 위령제를 지낸다고 난리부르스를 치다가 허무하게 죽습니다.
조금은 신비로운 캐릭터였던 킬러 송곳의 과거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책의 분량을 늘이려고 별 짓을 다한다라는 느낌만 받았고, 악당들은 왜 그리 말이 많은지, 주인공에게 총을 겨누고 사건의 진상을 떠벌리는 악당이 나오는 영화를 볼 때마다 한심스러웠는데 유광수가 거의 매일 봤다는 영화들이 그런 한심한 영화 밖에 없었나 봅니다. 급기야 강형사가 가지고 있는 춘화첩을 빼앗으려한 일본의 여자 특수요원은 강형사에게 총을 겨누고 음란행위까지합니다.
송곳의 정체에 대한 반전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강형사의 뜬금없는 로맨스가 나올때부터 채소연에게 뭔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이더군요. 이쯤되면 작가의 상상력 부실을 욕하는 수 밖에요. 사건의 진상도 허무했습니다. 거창하게 시작된 소설의 끝맺음치고는 고작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제를 위한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음모로 대충 마무리지으니, 그나마도 강형사가 직접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고, 범인이 주저리 주저리 떠든 내용입니다. 알고보니 '뉴웨이브문학상'은 조선일보가 주최했더군요. 혹시 그래서 친일파 청산 조직의 음모라는 주제의 이 허술하고 한심한 소설이 대상을 탄 것은 아닌지 의심되기까지했습니다.
책을 읽었을 때의 짜증이 다시금 밀려온다.
우리나라 소설인만큼 그래도 좋은 부분을 부각시키고 싶지만, 534페이지라는 두툼한 책의 그 어디에도 이 소설에 대해 좋게 평가할만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에 쓰여진 심사평이 저를 더욱 울컥하게 만들었습니다. "작품 구성이 탄탄하고, 소설적 재미와 역사적 무게가 있으며, 마지막 반전도 좋다. 한중일을 누비며 펼쳐지는 방대한 서사를 이끌어가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정말 대단하다." 이 심사평은 우리나라 대중소설의 미래가 암울하게 보이기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글을 쓰다보니 <진시황 프로젝트>를 읽은 4일간의 짜증이 다시금 밀려오네요. 이 짜증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다음에 읽을 소설은 좀 더 재미있고, 좀 더 짜임새 있는, 작품성과 재미가 보증된 작가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마음 뿐입니다. 정말 우리나라 소설을 좋아하고 싶었는데, 최제훈의 <일곱개의 고양이 눈>은 이야기는 탄탄한데, 끔찍한 악몽같아 다시는 최제훈의 소설을 읽고 싶지 않게 만들었고, 이문열의 <대륙의 한 : 백제 요서 경락사>는 용두사미로 한국문학의 거장에 대한 실망감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나마 김탁환의 <노서아가비>는 재미있었지만, 김탁환이 '뉴웨이브문학상' 심사위원 중 한명이라는 사실 때문에 덩달아 실망이 됩니다.
이 절망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yes24 중고서점에서 기욤 뮈소의 <종이 여자>를 충동구매했습니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와 <사랑하기 때문에>의 이야기꾼 기욤 뮈소라면 제 절망감을 달래줄 수 있을 듯... 그런데 구피가 먼저 읽겠다고 훌라당 가져가버렸네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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