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신카이 마코토
더빙 : 미즈하시 겐지, 하나무라 사토미
개봉 : 2007년 6월 21일
관람 : 2007년 6월 22일
등급 : 연소자 관람가
제 1화 벚꽃 이야기 : 너에게로 가는 길.
SICAF에서 놓친 이후 그토록 기다렸던 [초속 5센티미터]가 드디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둘러 CGV 사이트를 뒤져 [초속 5센티미터]가 상영하고 있는 개봉관과 상영 시간표를 꼼꼼히 검색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개봉 당일 날 갑자기 일이 생겨 [초속 5센티미터]를 보러 갈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없이 [초속 5센티미터] 관람을 하루 동안 연기했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이유 없이 초조하고,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으며, 하루가 너무나도 허탈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타카키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카리를 만나러 가는 하루 동안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타카키는 초조하고, 겁도 나고, 일분일초가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초속 5센티미터]는 그런 영화입니다. 마치 일상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애니메이션입니다.
[초속 5센티미터]는 초등학교를 단짝 친구로 지냈던 타카키와 아카리가 아카리의 전학으로 서로 헤어지며 시작합니다. 아카리와 편지만 주고받던 타카키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결정합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머나먼 곳으로 전학을 가야하기에 타카키는 그날이 아니면 더 이상 아카리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차 노선을 몇 번이고 확인을 하며 아카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의 여정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하필 그날 내린 폭설로 인하여 기차는 연착이 되어 버리고 기차에 갇힌 타카키는 두렵고 초조해지기만 합니다.
영화를 보며 타카키의 초조함이 마치 지금 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인가 간절히 하고 싶고, 보고 싶은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저는 한 겨울이라도 온 몸을 땀으로 적셔 버립니다.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지릅니다.(그러면 고함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카리를 만나러 가는 그 지루한 여정 속에서 타카리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어렵게 만난 타카키와 아카리의 하루 동안의 해후는 더더욱 애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애절함은 어린 타카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버립니다. 첫사랑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애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슴 아픈 애절함이 없다면 첫사랑도 쉽게 잊혀지겠죠. 타카키와 아카리의 애절한 첫사랑. 그것은 이 영화의 전제조건이 됩니다.
제 2화 코스모나우트 : 너와 나의 엇갈린 시선 속에서...
제겐 3년 동안 짝사랑하던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니 벌써 거의 20여년전 일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짝사랑이 제겐 첫사랑이었으며, 짝사랑으로 인한 아픔 때문에 거의 10년 동안 마음의 문을 닫고 여자를 사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타카리가 아카리와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면 그를 짝사랑하는 카나에는 짝사랑의 아픔을 서서히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흔히들 짝사랑은 상처입지 않는 가장 손쉬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랑을 하게 되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기쁨도 주지만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으로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짝사랑은 다릅니다. 짝사랑은 상대방에 의한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에 의한 상처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짝사랑에는 그 무엇보다도 견줄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짝사랑하는 그 사람의 시선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래서 그 사람과 내가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불현듯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 따위보다 더욱 아프고 쓰라립니다.
타카키를 향한 카나에의 짝사랑은 처음엔 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기쁨이었을 겁니다. 그것은 타카키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짝사랑이 짝사랑으로만 끝나는 이유는 바로 그 희망을 쉽게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백하고 거절당한다면 모든 희망이 부질없이 사라지는 것이니 그것이 두려워서 대부분의 짝사랑은 그냥 짝사랑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카나에 역시 결국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타카키의 마음이 자신이 아닌 멀리 그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그 순간 그녀는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고백을 포기합니다. 그렇게 그녀는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을 놓지 못하고 부여잡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짝사랑은 짝사랑으로 끝이 났을 테니 3년 만에 고백했다가 거절을 당했던 저만큼 아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카나에로써는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제 3화 초속 5센티미터 : 그리움도 습관이 된다.
타카키와 아카리의 첫사랑, 타카키를 향한 카나에의 짝사랑으로 그려진 젊은 시절의 아픈 사랑 이야기가 끝이 나고 타카키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겐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가슴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고, 일에 몰두를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 깊이 각인되어 결코 지워지지 않는 슬픔 속에서 타카키는 방황합니다. 하지만 그도 압니다. 그의 슬픔은, 그의 그리움은 단지 어린 시절부터 갖게 되어 버린 나쁜 버릇과도 같다는 것을. 만약 아카리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다하더라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은 단지 아름다운 추억일 뿐, 현실에서는 그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 [초속 5센티미터]를 보며 마지막 3화에서 타카키, 아카리, 그리고 카나에의 사랑을 끝맺어주는 무언가의 스토리가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깔끔한 마무리 따위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그저 관객들에게 가슴 속 깊이 잊혀진 그러나 분명 가슴 속 그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을 어린 시절의 순수한 사랑을 되새겨 줄 뿐입니다.
그렇기에 갑작스런 뮤직 비디오로 끝을 낸 [초속 5센티미터]를 보고난 후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화면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의 부재 때문에 조금 실망하여 극장에서 나왔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타카키가 그랬던 것처럼 아프고, 외로웠습니다. 아주 잠시동안...
그래,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사랑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혼자 행복해하고, 혼자 아파했던 그 시절.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 아픔이 습관화되어 나도 참 많이 혼자 괴로워하고 외로워했는데... 이젠 그런 기억마저 희미해져 버렸네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일상생활에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독의 희망은 최소한 제겐 잊혀진 아픈 사랑의 기억을 꺼내들게 하는 위력을 발휘하고 마는 군요. 하지만 지금은 그 아픔도 추억으로 생각하며 웃을 수 있습니다. 아마 타카키도 세월이 흐르면 습관화된 외로움조차 잊고 새로운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겠죠. 그것이 인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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