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누도 잇신
주연 : 니노미야 카즈나리, 아이바 마사키, 오노 사토시, 사쿠라이 쇼
개봉 : 2007년 6월 14일
관람 : 2007년 6월 20일
등급 : 연소자 관람가
이누도 잇신과 만나다.
이누도 잇신... 이 낯선 이름이 제 머리 속에 각인되어 버린 것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정말로 이상한 제목의 영화 때문입니다. 당시엔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일본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그저 '영화 제목 참 특이하다.'라며 그냥 그렇게 잊어버렸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저 시큰둥한 표정으로 '볼 영화가 없으니 이 영화라도 보자.'라는 심정으로 보게 되었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영화 속에 빠져드는 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조제와 츠네오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외에도 최근 [메종 드 히미코], 이렇게 단 두 편의 영화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시선은 이 두 편의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게이와 게이를 증오하던 한 여성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메종 드 히미코]. 이누도 잇신 감독은 이렇게 사회의 아웃사이더를 향한 관심과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해피엔딩도, 그렇다고 비극도 아닌 마지막 영화의 끝맺음의 묘한 여운입니다.
이제 겨우 두 편의 영화만으로 이누도 잇신 감독의 특징을 정의내리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최근 국내에 개봉된 [황색눈물]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잘 묻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전 [황색눈물]이 좋았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누도 잇신 감독의 최고영화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라고 생각하지만... ^^;
누가 그들을 욕하랴!
[황색눈물]은 도쿄올림픽을 앞둔 1963년 일본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고도경제성장으로 한껏 들떠있는 도쿄에서 예술가의 꿈을 안은 4명의 젊은이들이 3평 남짓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듭니다. 서정적인 아동 만화가를 꿈꾸는 에이스케(니노미야 카즈나리), 가수 지망생 쇼이치(아이바 마사키), 화가를 꿈꾸는 케이(오노 사토시), 소설가임을 자처하는 류조(사쿠라이 쇼). 그들은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며 하루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냅니다.
어쩌면 이들 캐릭터를 보며 한심한 것들이라고 욕할 분들이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 그들은 한심합니다. 에이스케를 제외하고는 다른 녀석들은 돈벌이에 나서면 예술가의 순수성이 더럽혀진다며 하루 끼니를 집안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는 것으로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배고픈 시절도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녀석들의 이상한 논리는 단지 일하기 싫어 내세우는 변명에 불과합니다.
결국 쇼이치의 기타와 류조의 만년필, 그리고 각종 옷까지 전당포에 맡기고 그것으로 식당에서 밥을 시켜 먹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예술을 한다는 것들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물품들을 전당포에 맡길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알 수 없더군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못 말리는 젊음과 꿈이. 저도 한때는 영화 평론가가 되겠다며 직장도 그만두고 6개 월동안 방안에 처박혀 앉아 영화보고 글 쓰는 것에만 몰두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땐 그냥 그것이 좋았습니다. 제 글을 신문사나 영화사에 보낼 생각도 못하고 그저 무작정 글만 써내려갔습니다. 그런다고 영화 평론가가 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아마 그들도 그랬을 겁니다. 가수, 소설가, 화가가 되고 싶다던 그들은 그를 위해서 그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집안에 누워 빈둥거리며 노래 부르고, 그림 그리고, 글 쓰기만 할뿐입니다. 단지 유일하게 돈벌이를 하고 있던 에이스케만이 자신의 꿈과 이상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이 백수건달들이 한심하다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젊음이 있기에 그런 무모한 꿈과 대책 없는 행동들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도 점차 성인이 되며 자신의 꿈을 버리고 사회에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런 추억 하나 없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아마도 그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에이스케가 며칠 동안 밤낮을 지새우며 만화가의 조수 일을 해서 벌어온 목돈. 이제 이 한심한 녀석들은 이 목돈을 바탕으로 여름동안 자신들이 하고 싶은 꿈과 이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합니다.
에이스케는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만화를 그리고, 쇼이치는 열심히 노래를 작곡하며, 케이는 첫눈에 반해버린 여인의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류조는 자신의 첫 소설을 위해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하지만 여름이 지나가고 그들의 꿈과 이상은 좌절됩니다. 에이스케의 만화는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고, 쇼이치는 더 이상 노래를 작곡할 수 없었으며, 케이는 부유한 집안의 여인과의 결혼으로 자신의 안정된 예술 활동을 보장받으려다가 좌절됩니다. 그리고 류조는 제목이외에 소설의 단 한 장도 써내려가지 못합니다.
이제 그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각자의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그래서 불행했을까요? 글쎄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결코 불행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이누도 잇신 감독의 특기인 해피엔딩도, 비극도 아닌 묘한 엔딩이 힘을 발휘합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츠네오와의 사랑으로 인하여 조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사회를 향해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 사오리는 결국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게이 아버지와 화해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루히코를 비롯한 다른 게이들과의 벽을 허물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지워냅니다.
[황색눈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결코 꿈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바쳤던 여름날의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는 것이다.
여름날이 시작하기 전, 에이스케는 친구들에게 묻습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아냐고... 이에 친구들은 말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그 해 여름, 그들은 바로 그러한 자유를 실천합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그들은 깨닫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는 것. 그것은 분명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생기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맘이 생기는 순간 더 이상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그들이 말한 자유를 얻어내려면 평생 그 누구와의 관계도 허락하지 않고 혼자 지내야합니다.
에이스케는 자신에게 들어온 좋은 일거리를 나와는 맞지 않다... 라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하지만 3명의 동거인이 생기는 순간 출판사를 찾아가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 달라고... 그는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친구들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 셈이죠.
쇼이치는 자신에게 다가온 토키에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그 역시 토키에를 사랑하게 된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토키에와의 사랑을 거부한 이후 쇼이치는 더 이상 작곡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진심을 저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이 그의 발목을 잡은 거죠.
케이는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불태웁니다. 하지만 그 여인이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우연히 찾아온 부유한 결혼의 꿈이 무너졌을 때 그는 자신의 붓을 꺾어버립니다.
쇼이치는 카페의 여종업원에게 사랑을 느끼고 언제나 카페에서 글을 쓰며 그녀를 훔쳐봅니다. 하지만 정작 글은 단 한 줄도 써내려가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타인과 관계를 가지게 되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겠다는 유아적 발상이 서서히 무너집니다. 그리고 결국 꿈을 포기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자유, 그것을 위해서 과연 사랑을 포기해야만 할까요? 글쎄요. 바꿔 생각한다면 사랑이 없는 삶과 그 삶의 자유는 과연 행복할까요? 행복하지 않다면 그런 자유는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비록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서정적인 아동 만화는 실패했지만 기차안에서 그 만화를 재미있게 읽어주는 꼬마를 보며 미소를 짓는 에이스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알아주는 단 한사람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행복을 느낄 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요?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