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서극
주연 : 정이건, 장백지, 홍금보, 장쯔이
개봉 : 2002년 3월 29일
드디어 지금까지 나를 짓누르던 회사일을 모두 벗어 던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토요일 오후...
졸립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 오랜만에 술도 먹고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영화가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오늘 회사 동료와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를 보기로 했었죠. (술사주며 내가 영화보여줄테니 같이 가자고 꼬셨었습니다. -_-;) 하지만 회사일로 양복을 입고오는 바람에...
저희 회사는 자유 복장입니다. 그리고 저는 양복 무지 싫어합니다. 왠지 불편하고, 양복입은 내 모습이 너무 어색해 보이거든요. 그래서 되도록 양복은 입지 않으려 하고 (그래서 양복도 두벌밖에 없습니다. 동복, 하복... ^^;) 어쩔수없이 양복을 입은 날에는 일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불편한 껍질과도 같은 양복을 벗어던지죠. 그런데 오늘 하필 양복을 입어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왠만하면 영화보는 것을 마다할 제가 아니었지만 양복을 입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왠지 불편하고 내키지도 않는 일이었죠. 게다가 양복을 차려입은 두 남자가 <생활의 발견>이라는 쬐금은 야한 영화를 같이 본다는 것은 왠지 변태같이 보여 질것 같아서... ^^;
그래서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쉽더군요. <생활의 발견>... 너무 보고 싶었는데...
마음을 달랠 겸 집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바빠서 뒤로 미루었던 영화 목록들을 살펴보았죠. 제가 봐주기만을 기다리는 영화는 꽤 많았지만 심신이 피곤하므로 러닝타임이 짧아야하고, 내용이 단순하며, 유쾌한 영화로 골랐습니다. 그러고나니까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밴디츠>와 서극 감독의 <촉산전>이 남더군요. 하지만 <밴디츠>... 네티즌평이 무지 나쁩니다. 그렇지않아도 피곤한데 재미없는 영화보면 더 피곤해질것 같아서 그나마 평이 좋은 <촉산전>으로 선택했죠.
<촉산전>을 보기전의 느낌은 무지 부정적이었습니다.
홍콩의 스필버그라고 불린다는 서극 감독은 솔직히 90년대 초반 이후 (1992년 <황비홍>이후) 실망스런 작품만을 내놓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특히 헐리우드에 건너가 만들었던 영화 <더블팀>, <넉 오프>는 그의 명성에 비추어 본다면 실망스런 영화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런 그의 최근의 영화들은 <촉산전>에 대한 기대치를 그만큼 낮추어 놓았죠.
이 영화의 장르가 SF무협이라는 점도 <촉산전>의 제 기대치를 높이는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풍운>을 비롯한 홍콩의 SF 무협영화는 제가 보기엔 너무 유치했거든요. 아마 어색한 홍콩의 특수효과 기술도 그 한몫을 했겠지만, 무협소설을 기초한 무협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무협 소설에 익숙하지 못한 저에겐 유치할수밖에 없었죠.
그렇다고 <촉산전>에 대해 전혀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단 최근작이 아무리 실망스러웠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때 홍콩 영화계를 주름잡던 서극의 최신작이라는 점과 서극 영화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촉산>을 그 자신이 20년 후에 좀더 앞선 특수효과 기술로 리메이크한 영화이니 뭔가 틀려도 틀릴것이라는 약간의 기대가 있기는 있었죠.
게다가 출연 배우들을 보니 화려하더군요. 정이건이라는 SF 무협 영화의 단골배우는 그렇다고쳐도 <파이란>에서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장백지와 왕년의 스타 홍금보 그리고 <와호장룡>과 <러시아워2> 그리고 <무사>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장쯔이까지...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초반의 느낌은 거의 절망이었습니다. 제가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드러났죠. 내용은 유치했으며 화면은 여전히 현란했지만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은 평면적이었죠. 도대체 제가 좋아 할 꺼리가 전혀 보이지 않더군요.
그 중에서 가장 심한 것은 바로 단선적인 캐릭터입니다. 유치찬란한 화면과 스토리야 이 영화의 장르적 특성상 이미 각오는 되어 있었으므로 어느정도 참아 줄수 있었지만 도대체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어보이는 캐릭터들의 그 무표정은...
그 중 제일 심했던 것이 바로 현천종역의 정이건입니다. 현천종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고, 자신의 사부를 남몰래 사랑했던 비련의 주인공이며, 악귀인 유천에게 문파가 멸망당하고 남몰래 사랑했던 사부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이 영화속 다른 캐릭터에 비해 가장 할 이야기가 많았던 그런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그 무뚝뚝한 표정을 과시하더군요.
그래서 전 현천종이 자신의 사부였던 고월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 초반 유천의 공격으로 고월이 죽었을때 그 심드렁한 표정...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는 여인을 저 세상에 보낸 표정이라고 할 수 있는지... 뭐 무공을 쌓은 고수들은 그렇게 내색을 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현천종이외에도 이 영화의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원래 캐릭터 설정이 저런 것인지... 아니면 배우들의 연기력이 부족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않을 정도로 어색하고 뻣뻣해 보였습니다. 특히 정락천역의 장쯔이... 그녀는 왜 이 영화에 출연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정락천이라는 캐릭터는 차라리 없는 것을 더 좋았을뻔한 그런 캐릭터이던데...
아마 월드 스타로 발돋음한 장쯔이의 덕을 보려한 서극 감독의 얄팍한 상술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 군요.
영화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 그런대로 이 영화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저한테는 전혀 맞지 않는 이 영화에 적응을 하기 시작한 것은 현천종의 친구였다가 나중엔 마귀에게 지배당하는 단진자라는 캐릭터 덕분입니다.
작고 힘없어 보이는 매혹적인 마귀를 구하려다 그에게 속아 결국 정신을 지배 당하는 단진자는 이 영화의 캐릭터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사실적입니다.
도대체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캐릭터 속에서 그나마 이해가 되는 캐릭터를 만나고나니 어느정도 안정이 되더군요.
게다가 날개달린 갑옷을 입은 단진자의 그 현란한 액션씬은 유치하게만 느껴지던 이 영화의 특수효과 중에서도 제법 멋있다는 생각이 들은 유일한 장면입니다.
천뇌쌍검, 삼원합일... 그 이름조차도 왠지 적응이 되지 않는 이 영화의 그 허무맹랑한 특수효과들은 그러나 마음을 열고 봐주니 헐리우드와는 또다른 홍콩의 특수효과가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분명 현란한 특수효과는 예전에 비해 매끄러워 진것은 인정하겠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스토리를 즐기기엔 저에겐 너무나도 많은 장애가 있었습니다.
<촉산전>이 끝나고 느낀 것은 차라리 이 영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으면 더 재미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서극 감독이 1997년도에 만든 애니메이션 <천녀유혼>은 그의 최근작 중에서 그마나 제가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중국의 고대 설화를 재치있게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천녀유혼>은 비현실적인 내용과 대단한 성공을 거둔 전작이 있다는 점, 그리고 특수효과가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 <촉산전>과 같습니다.
하지만 <천녀유혼>이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되면서 상상력이 가득 넘치는 유쾌한 영화가 되었던데 반에 SF 무협을 표방한 <촉산전>은 현란한 홍콩식 특수효과만 가득한 속빈 강정같은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감정이입이 전혀 안되는 <촉산전>의 캐릭터들을 만약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다면 어쩌면 정이건과 장백지의 사랑이 더욱 애절하게 보여질 것이며 장쯔이의 캐릭터도 어쩌면 좀더 코믹하게 살아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물론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