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류승완
주연 : 전도연, 이혜영, 정재영, 류승범
개봉 : 2002년 3월 1일
2002년 3월 17일 일요일... 드디어 저 혼자 영화보러 극장에 갔습니다. 아마 고등학교때 이후 처음이니 10년만에 절대 혼자 영화보러 가지 않겠다던 제 결심이 깨진 셈이되는 군요.
하지만 어쩔수없는 선택이었죠. 우연히 생긴 기한이 3월 17일까지인 공짜 영화표 한장... 전 같이 영화보러 갈 사람을 구하기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더군요. 하긴 누가 이 화창한 봄날에 저와 영화를 보러 가고 싶겠습니까? 애인과 함께 보내지...
그래서 정말 큰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까짓거 혼자 영화보는 거야!!!
일요일 아침... 비장한 각오로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입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습니다. 극장은 강남의 주공공이. 일요일이라서 수많은 연인들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데이트하는 그 곳에 전 혼자 어색하게 영화를 보러 가야 합니다.
혼자 영화보러 간다는 소릴 들은 제 여동생의 한마디...
"미쳤어!!!" -_-;
하지만 공짜영화표를 버릴순 없었죠. (공짜에 대한 쭈니의 집념... ^^;)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데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그런 기분이 들더군요.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드디어 강남역에 도착했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따뜻한 날씨 덕분에 많은 연인들이 한결 가벼운 옷차림으로 서로 손을 꽉 잡고 걷더군요.
전 주공공이에 가서 영화표를 바꾸고 남는 1시간 정도의 시간을 위해 대형 서점에 갔습니다. 시간때우기에는 서점만큼 좋은 곳은 없죠. 그 곳에서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을 한권 다 읽었습니다. 그 책에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전 아직도 제가 혼자라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_-;
암튼 그 책을 다 읽고 나니 영화 시작할 시간이 되더군요. 서서히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강남역에 헤어진 그녀와의 추억이 의외로 많이 숨겨져 있더군요. 주로 강북에서 데이트를 해서 몰랐는데...
주공공이라는 극장에선 작년 여름 그녀와 <툼 레이더>라는 영화를 봤었죠. 그때 안젤리나 졸리의 몸매가 너무 멋있다며 황홀한 표정을 짓다가 그녀한테 혼났었는데... 영화를 보고나서 함께 식사를 했던 분식점도 보이고, 여행을 가서 입을 옷을 고르기위해 함께 갔던 옷가게도 보이는 군요.
이래서 혼자 밖에 나오기 싫었는데... 암튼 그녀의 그 부드럽던 미소를 회상하며 전 무거운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섰습니다. 그리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하필 제 곁에 어떤 다정한 연인이 앉더군요. 젠장...
그들은 영화가 시작하기전 영화의 예고편이 나오자 '저 영화 재미있겠다. 우리 다음에 저 영화 보러가자.'며 귓속말을 주고 받습니다. 짜슥들... 나도 그랬었는데...
암튼 아직 완벽하게 그녀를 잊지못한 지금... 이렇게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극장에는 그녀와의 추억이 너무 많이 숨겨져 있으니까요.
암튼 그녀와의 추억때문에 씁쓸한 기분으로 본 영화는 <피도 눈물도 없이>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주인공인 전도연을 보니 그녀와 함께 봤던 <해피엔드>라는 영화가 생각나는군요. 그땐 그녀와 함께 그 영화를 보며 전도연의 그 전라연기에 감탄을 주고 받았었는데... 에궁~ ^^;
<피도 눈물도 없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인터넷 영화 <다찌마와 리>로 영화계에 주목을 한몸에 받았던 류승완감독의 신작입니다. 전 그의 전작들을 한편도 보지 못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워낙 매스컴에서 엄청난 신인 감독이라고 떠들어대는 통에 저도 덩달아 기대를 하게 됐죠. 게다가 우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펄프 느와르라는 장르를 들고 왔으니...
이 영화 기본적으로 돈 가방을 사이에 두고 몇명의 인간 군상들이 펼치는 돈 가방 쟁탈전입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그들의 목표는 한결같이 돈 가방입니다. 그리고 예상치못한 반전과 배신속에 돈가방의 행방은 점점 묘연해지죠. 결국 영화는 돈 가방을 차지하는 최후의 승자를 향해 열심히 치닫습니다.
영화가 진행되며 관객들은 과연 돈 가방이 누구의 차지가 될것인가에 관심이 모아 질겁니다. 그런데 전 생각이 다릅니다. 이 영화의 묘미는 '누가 돈가방을 차지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돈 가방을 차지 할까?'라고 생각한거죠.
이런 영화의 경우 등장 인물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작전을 세웠느냐가 중요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돈 가방을 차지하려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완벽한 계획을 세운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될테니까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그 치밀한 작전이 부족합니다. 관객들이 보고나서 무릎을 칠 정도로 주인공의 작전이 치밀해야 영화의 그 수많은 반전들이 이해가 될텐데...
이제 이 영화속의 치밀하지 못한 계획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먼저 이 영화의 독불과 그의 보스인 KGB의 계획부터 살펴보죠.
그들의 계획은 아주 간단합니다. 호텔 인수건때문에 돈이 필요했던 KGB는 독불이 관리하는 불법 투견장에 가짜 경찰들을 투입하여 어수선한 틈을 타 사람들이 내기에 건 돈들을 떼어먹으려 합니다. 가짜 경찰들이 소동을 피우고 사람들은 도망치고 그 와중에 돈을 빼돌리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죠. 그런데 그 계획을 독불의 동거녀인 수진이 듣게 됩니다.
수진의 계획은 이러합니다.
가짜 경찰들이 들어닥치기 전에 돈 가방을 경선에게 주는 겁니다. 경선은 소란한 틈을 타 사람들 틈에 섞여 투견장을 빠져나오고 수진은 가짜 돈가방을 준비하여 독불을 속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수진의 이러한 계획속에는 동네 양아치들인 채민수 일당과 진짜 경찰의 습격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죠.
채민수 일당은 독불에게 돈 가방을 건네받은 KGB의 심복인 침묵맨을 덮쳐 돈 가방을 가로채려 하고 경찰들은 이번 기회에 거물인 KGB를 체포하려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계획입니다.
이처럼 이 영화의 계획들은 하나같이 아주 간단한 것들입니다. 치밀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죠. 게다가 제가 보기에는 이 계획들에는 헛점 투성이니...
그러면 이제부터 이 계획들의 헛점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이들의 계획의 헛점에 가장 결정적인 역활을 한 캐릭터는 바로 독불의 심복이며 KGB가 투견장에 심어놓은 뿌락지인 쌕쌕이입니다. 그는 수진을 꼬셔 돈 가방을 빼돌리자고 제안하죠. 하지만 그럼으로써 돈 가방을 노리는 모두의 계획이 틀어집니다.
먼저 계획이 틀어지는 인물은 바로 쌕쌕이의 보스인 KGB입니다.
계획대로라면 그 돈 가방은 아주 안전하게 침묵맨에 의해 KGB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만약 그가 침묵맨을 믿지 못했다면 쌕쌕이라는 히든 카드를 이용, 돈을 안전하게 받고 싶었겠지만 제가 KBG의 입장에서 본다면 쌕쌕이보다는 침묵맨이 휠씬 더 믿음이 갈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쌕쌕이를 시켜 계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게다가 돈 가방이 바뀌었다는 침묵맨의 보고를 들은 KGB는 노발대발하며 침묵맨에게 독불을 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KGB는 쌕쌕이의 계획을 몰랐다는 이야기인데...
쌕쌕이가 돈가방을 빼돌리기위해 일부러 수진과 계획을 짠 것이라면 무엇때문에 KBG에게 보고를 했을까요? KGB가 쌕쌕이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면 무엇때문에 아직 쓸모가 많은 독불을 쳤을까요?
쌕쌕이의 등장은 수진의 계획에도 영향을 미치죠.
수진은 경선보다는 독불의 신임이 두터운 쌕쌕이를 이용하는 것이 났다는 생각에 애초의 계획을 바꿔 돈 가방을 3개를 준비합니다. 하나는 독불이 침묵맨에게 전해주고, 하나는 수진이 경선에게 전해줍니다. 그리고 진짜 돈 가방은 수진과 쌕쌕이가 들고 튀죠. 그런데 왜 이런 모험을 했을까요?
제가 수진이라면 독불의 심복인 쌕쌕이를 믿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만난지는 얼마안되지만 독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선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쩌면 쌕쌕이의 제안이 수진을 믿지못하는 독불의 함정일거라고 의심했겠죠. 하지만 수진은 기꺼이 쌕쌕이를 믿습니다.
나중에 수진이 경선에게 설명할때 돈 가방을 쌕쌕이와 빼돌리고 쌕쌕이를 따돌린 후 돈 가방을 경선과 함께 나눠 가지려고 했다는데... 왜 이런 불필요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쌕쌕이를 끌어들임으로써 수진은 또 하나의 증인과 적을 만든 것 뿐입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될바엔 저같으면 경선까지도 배신했을 겁니다. 어차피 경선 몰래 돈 가방을 들고 나왔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경선에게 돈을 나눠줄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보기엔 수진과 경선의 사이가 그렇게 각별해보이지도 않던데...
쌕쌕이의 등장과는 무관하지만 채민수 일당과 경찰의 계획도 허술하기 그지 없습니다. 채민수 일당은 애초에 경찰의 뿌락지 노릇을 하며 독불과 KBG의 계획을 들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계획에 경찰이 투입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텐데... 왜 이런 위험한 모험을 한거죠? 단지 돈가방을 들고 가는 침묵맨을 덮쳐 돈 가방을 빼돌린다라는 계획은 경찰이 개입된 경우 돈 가방의 행방이 묘연해지면 가장 먼저 의심받고 추적당할 것임으로 위험하고 허술한 계획에 불과합니다.
채민수 일당이 독불과 KGB의 대화 내용이 녹음된 일부를 지워버렸다고는 하지만 그건 수사 과정에서 당연히 들어날 문제입니다.
경찰 역시 그러하죠. KGB가 얼마나 거물인지는 모르지만 투견장을 덮쳐 그를 체포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불법 투견장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는 모르지만 투견장 현장을 덮치는 것은 아무때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투견장이 옮겨가는 것은 아닐테니...
물론 독불과 KGB의 밀담을 담은 테잎을 듣고 무언가 음모가 있을거라는 생각에 덮친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래봤자 투견장인데... 음모가 있어봤자 얼마나 큰 음모가 있었겠습니까?
이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께는 영화의 줄거리도 설명하지 않은채 다짜고짜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계획에 딴지를 걸어 어리둥절 했을 겁니다. 그러나 줄거리 설명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
분명 이 영화, 멋있습니다. 류승완 감독은 CF 감독을 했더라면 분명 크게 성공했을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면은 보기드물게 감각적이고 캐릭터들은 개성이 넘칩니다. 특히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솜씨도 분명 예사롭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걸출한 신예 감독이 등장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더군요.
하지만 장르가 장르인지라 조금 더 신중해야 했습니다. 이런 영화의 경우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관객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으로 극장을 나와야 하죠.
하지만 이렇게 제가 봐도 허술해보이는 계획만으로는 요즘처럼 똑똑한 관객들 뒤통수는 커녕 눈썹 하나 건들지 못합니다.
아직 우리 영화계엔 생소한 장르이기에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움이 남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