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영화평/2017년 아짧평

[어 퍼펙트 데이] -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다 했다.

쭈니-1 2017. 10. 31. 16:28

 

 

감독 : 페르난도 레온 아라노아

주연 : 베니치오 델 토로, 팀 로빈스, 올가 쿠릴렌코, 멜라니 티에리, 페자 스투칸

개봉 : 2017년 9월 21일

관람 : 2017년 10월 29일

등급 : 15세 관람가

 

 

NGO 구호단체요원들의 하루

 

지구촌엔 전쟁의 상처가 진행중인 곳이 많습니다. TV 뉴스를 보며 그곳의 상황을 볼때마다 제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다행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렇게 저는 안전한 곳에 앉아 마치 남일처럼 그들의 아픔을 걱정하고 있지만, 위험천만한 그곳에 직접 뛰어 들어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 퍼펙트 데이]는 NGO 구호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 출신 작가 파올라 파리아스의 소설 <비가 내릴 듯한>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보스니아 내전 후 여전히 전쟁의 후유증으로 가득한 어느 한 마을을 배경으로 NGO 구호단체 요원들의 웃지못할 임무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마을의 유일한 우물에 빠진 덩치큰 남자의 시체를 꺼내는 것. 우물 오염을 걱정한 팀의 리더 맘브루(베니치오 델 토로)와 조력자 B(팀 로빈스), 소피(멜라니 티에리)는 밧줄을 이용해서 시체를 꺼내려 하지만 번번히 실패하며 최악의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우물에서 시체 하나 꺼내는 일이 뭐가 그렇게 힘든 임무인걸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맘브루 팀이 결국 임무에 실패할 정도로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처음엔 밧줄 하나만 있으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폐허가된 마을에서 밧줄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UN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UN은 황당한 이유로 오히려 우물에서 시체를 꺼내는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과연 그들은 이 어이없는 상황을 어떻게 슬기롭게 넘길까요?

 

 

 

결국 그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어 퍼펙트 데이]의 NGO 구호단체 요원들의 모습은 우리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삶에 찌들어 있고, 남녀 관계로 복잡할 따름입니다. 맘브루가 정확히 그러합니다. 그는 NGO 구호단체를 이끈 베테랑 리더이지만, 이제 그만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료인 B는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해대고, 신참 소피의 치기어린 행동은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들 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소년 니콜라에게 축구공을 구해줘야 하고, 요원 감시를 위해 파견된 현장 분석가 카디야(올가 쿠릴렌코)는 맘브루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밧줄 하나만 구하면 될텐데... 이웃 마을의 상점에선 밧줄을 내어줄 수 없다고 버티고, 집에 밧줄이 있다는 말에 찾은 니콜라의 폐허가된 집에는 니콜라를 할아버지한테 맡기고 안전한 곳으로 떠났다는 니콜라 부모의 시체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어렵사리 니콜라 부모의 목을 맨 밧줄을 풀어 가져오지만 이번엔 UN이 원칙에 어긋난다며 우물에서 시체 꺼내는 것을 막아섭니다.

결국 맘브루는 하루종일 우물에서 시체 꺼내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이 단순해보이는 임무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만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는 난민촌의 막힌 변기를 뚫는 것. NGO 구호단체라고 한다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속의 그들은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했다.

 

우물에서 시체 하나 꺼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발길을 돌리는 맘브루 일행.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하늘에서 내린 비로 우물이 넘쳐나 우물 속의 시체는 자연스럽게 꺼내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물 속의 시체를 처리해준 고마운 비는 맘브루 일행의 다음 임무인 난민촌의 막힌 변기 뚫기에 최대 난관이 됩니다. 맘브루 일행은 분명 이 새로운 임무 때문에 또 동분서주하고 우왕좌왕할테지만, 우물에서 시체를 꺼내는 일과 마찬가지로 막힌 변기 뚫기 역시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존재는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닐까요? 동분서주, 우왕좌왕하면서 간단한 임무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그들. 어차피 그들이 없어도 우물에서 시체 꺼내는 일처럼 해결될 일은 자연스럽게 해결될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꼭 필요한 존재들이라 생각합니다. 저처럼 분쟁지역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며 잘 해결되길 바라는 사람만 있다면 지구촌 분쟁은 어쩌면 영영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NGO 구호단채 요원들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에 서투르고 뭔가 모자라지만, 분쟁 지역에 직접 뛰어 들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만으로도 우리 지구촌의 분쟁은 점점 사라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아주 특별한 동분서주, 우왕좌왕이 멋있어 보였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