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엽위신
주연 : 견자단, 사정봉, 여문락, 동결
개봉 : 2007년 5월 10일
관람 : 2007년 5월 10일
등급 : 12세 이상
길을 잃다.
전 타고난 길치입니다. 툭하면 방향 감각을 상실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기 일쑤죠. 하지만 길을 묻는 것은 싫어해서 무작정 제 감으로 길을 찾겠다고 나서다가 한참을 헤맨 적이 여러 번 있었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길을 나선 친구들은 절대 제 방향 감각을 믿지 않는답니다. 구피는 더더욱 그러하고요.
그래도 다행히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해서 길을 잃어도 그냥 걷습니다. 길을 걸으며 낯선 사람들과 낯선 풍경들을 보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그러다 낯익은 풍경을 만나면 기쁨이 두 배가 되기도 하고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면접 약속이 잡혀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부천의 소사. 언제나 그랬듯이 서울의 경계선을 넘어가면 제 방향 감각은 서울에서보다 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도 면접 장소는 잘 찾아갔건만 면접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찾아봐도 집 근처로 가는 버스는 보이지 않고, 날씨도 좋고, 시간도 남고, 서울과는 달리 조용한 풍경이 맘이 들어 또 다시 무작정 걸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요? 저 멀리서 낯익은 로고 하나가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C.G.V.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로고가 보이는 건물로 가보니 그곳이 바로 CGV 역곡이더군요. 이렇게 한적한 곳에도 CGV가 있다는 것에 놀라며 기념으로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습니다.(영화 보는 핑계도 가지가지죠? ^^)
제가 고른 영화는 [용호문]. 평일 낮인데다가 한적한 곳에 위치해서인지 극장 안엔 저를 포함해서 단 세 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도 저는 물론이고 나머지 두 명도 혼자 영화를 보러 오셨더군요. 그 중엔 여자 한분도 계셨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출구에서 마주친 우리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마치 '뭐 하는 사람이 길래 이 시간에 혼자 영화를 보냐?'는 눈빛을 주고받았답니다. ^^;
[용호문]이 추구하는 무협 영화의 길은?
[용호문]은 오프닝부터 '난 동양의 마블 코믹스 영화이다.'라고 선포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영화 자체가 35년간 연재되고 있는 베스트셀러 무협 만화를 각색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원작 만화의 장면을 빠른 편집으로 삽입한 오프닝은 노골적으로 동양의 마블 코믹스 영화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일단 그러한 영화의 시작은 제게 흥미를 불어넣었습니다.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는 저로써는 만화적인 상상력 면에서는 결코 코믹스에 뒤지지 않는 중국의 무협 만화, 혹은 소설들이 감각적인 액션 영화로 탄생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죠.
사실 90년대 초반에 나온 [동방불패]만 하더라도 굳이 동양의 코믹스 영화를 표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국 영화만의 독특한 만화적 상상력과 이중적인 캐릭터의 묘미, 그리고 비극적인 엔딩으로 절 매료시켰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매력은 [백발마녀전] 등 몇몇 무협 영화에 명맥을 유지하더니만 결국 [풍운], [중화영웅]같은 캐릭터와 스토리를 무시하고 SF적 요소만 강조하는 무협 영화로 퇴화하고 말았습니다.
최근엔 장 이모우 감독의 [영웅], [연인], [황후화], 첸 카이거 감독의 [무극] 등 거장들이 무협 영화에 가세하며 규모를 앞세운 무협 영화의 블록버스터 화를 선언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특수효과는 유치했고, 규모도 작았으며, 화려하지도 않았던 15년 전 [동방불패]가 그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이러한 상황에서 개봉된 [용호문]은 일단 규모를 앞세운 블록버스터 무협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애절한 스토리와 이중적 캐릭터를 내세운 [동방불패]와 같은 영화이냐, 아니면 화려한 특수효과만을 내세운 [풍운], [중화영웅]같은 영화이냐가 문제인데... 아쉽게도 [용호문]은 후자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캐릭터는 어디에 팔아 먹었냐?
[용호문]은 어머니와 용호문을 떠나 살게 된 형 소룡(견자단)과 아버지와 함께 용호문을 지킨 동생 소호(사정봉)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충분히 이 엇갈린 두 형제의 운명을 따라가며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꾸며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엽위신 감독은 캐릭터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 듯이 보이네요.
어머니와 소룡이 왜 용호문을 떠나야 했는지는 간단한 몇 마디 대사로 끝내버립니다. 소룡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소룡과 용호문,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곁에 남은 동생 소호와의 애증의 관계를 먼저 상세하게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캐릭터에 대한 엽위신 감독의 무신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소룡과 루샤(이소염)간의 관계는 아예 관객들의 상상력에 맡겨버립니다. 루샤는 소룡, 소호와 대치하게 되는 악의 소굴 나찰문의 두목인 화운사신의 양녀이자 오른팔 격인 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소룡을 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그녀의 캐릭터는 이 영화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영화의 또 다른 축이라 할수 있는 화운사신은 그저 무시무시한 악당에 불과하고, 갑자기 등장하여 용호문에 입문하여 화운사신과 맞서는 석호룡(여문락)과, 소룡과 소호의 사이에서 미묘한 러브 라인을 형성하듯(?) 보이는 마소영(동결)까지 캐릭터의 묘사는 지극히 평면적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주인공중 하나인 소호마저도 아예 캐릭터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영화의 상황에 맞게 싸우고 다치고 다시 싸우기만 할뿐, 캐릭터의 개성 자체가 결여된 주인공을 바라보며 이 영화는 캐릭터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코믹스 영화가 아닌 그저 특수효과에만 신경 쓰는 할리우드의 속빈 액션 영화를 표방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갑니다.
그래, 액션만으로 만족하마.
어쩌면 저는 단지 오프닝과 [동방불패]의 아련한 추억만으로 이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중국 무협 영화는 오랜 시간을 거쳐 거장의 허영심과 액션의 무한 질주만을 채워주는 영화들로 탈바꿈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옛날이여!'을 외쳤으니 영화에 대한 불만만 가득했을 수밖에요.
제 과욕을 인정하고 영화가 원하는 대로 액션의 측면에서만 영화를 바라본다면 [용호문]은 그리 나쁜 점수를 줄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이미 할리우드도 인정한 전 세계적인 무술 감독 겸 배우인 견자단은 이 영화에서 주연은 물론이고, 무술 감독까지 겸비하며 영화의 액션적인 재미를 극대화 시킵니다.
특히 이 영화가 지닌 액션이 화두는 사람의 몸과 돌의 부딪힘이 아니 었나 개인적으로 생각이 되네요. 특히 소룡, 소호, 호룡이 모두 집결하여 화운사신과 맞서 싸우는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돌로 된 계간과 시설로 가득 찬 화운사신의 소굴에서 맘껏 그 돌을 온 몸으로 깨부수며 돌과 몸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를 통해 액션의 쾌감을 전해줍니다.
그 외에도 만화적인 공간의 연출이 돋보였던 초밥집에서도 집단 난투극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비장함을 강조했던 공터에서의 액션씬 등은 '과연 견자단이다.'라는 탄성이 나올 만합니다.
중국의 영화인들은 다수가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전 세계적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국 영화는 같은 동양권에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런 시원시원한 액션 영화를 보고 서양의 관객들은 '중국의 액션 영화는 역시 달라'를 외칠지도 모르지만 스토리와 캐릭터를 동반하지 못한 텅 빈 액션은 그리 오래 기억되지 못할 것입니다. 동양의 관객들이 중국 영화에 재미를 잃어가듯이 이제 몇 년 후면 서양의 관객들 역시 이런 단순한 액션 영화에 싫증을 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제발 그러한 것을 중국의 영화인들은 빨리 깨달아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