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장규성
주연 : 차승원, 유해진
개봉 : 2007년 3월 29일
관람 : 2007년 4월 4일
등급 : 12세 이상
돼지목살 김치찌개에 무너지다.
퇴근을 몇 분 앞둔 평일 오후. 갑자기 메신저로 직장 동료가 저녁을 사주겠다며 꼬드깁니다. 오늘만큼은 술 안 먹고 집에 일찍 들어가 웅이에게 아빠노릇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신사동에 정말 맛있는 돼지목살 김치찌개집이 있다는 말에 결심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동료들과 함께 연예인들이 자주 온다는 비좁은 김치찌개 집에서 돼지목살 김치찌개와 초란탕에 소주를 반주로 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나니 하루 동안의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것만 같더군요. 하긴 이런 맛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고된 샐러리맨 생활을 버티는 것이겠죠.
김치찌개와 소주 그리고 후식으로 캔커피까지 1차적인 욕구를 채우고 나니 모두들 2차적인 지적 욕구가 그리웠는지 제게 영화 보러가자며 조릅니다. 구피에겐 밥만 먹고 얼른 집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했건만 또다시 그 약속은 영화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CGV 압구정에 갔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매표소 직원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영화가 뭐예요?"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대답은 [300]이었습니다. 하필 제가 이미 본 영화를... 다른 동료들은 좋다고 환호성이지만 전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300]은 됐고요... 그 다음으로 빨리 볼 수 있는 영화는요?"
이번엔 [이장과 군수]였습니다. 모두들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제가 선동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영화를 사랑해야지. 그냥 이 영화 보며 실컷 웃자고."
하지만 솔직히 저 역시 [이장과 군수]는 그리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고편에서부터 [선생 김봉두]와 [여선생 VS 여제자]의 짬뽕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코미디 영화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인데 기본은 하겠지 라며 내 스스로를 안심시켰지만 영화를 보니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패러디, 혹은 자기 복제의 달인
이 영화의 감독인 장규성 감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코미디 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감독중 하나입니다. 데뷔작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코믹 패러디 영화라는 [재밌는 영화]를 선보이며 코미디 영화에 첫발을 내딛은 그는 [선생 김봉두], [여선생 VS 여제자]를 통해 흥행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선생 김봉두], [여선생 VS 여제자] 그리고 [이장과 군수]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자기 복제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하필 패러디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해서인지도 모르겠군요. 자기 복제 역시 자기 영화의 패러디의 한 종류이니까요.
시작은 [선생 김봉두]였습니다. 이 영화의 경우는 당시 공전의 히트를 친 [집으로]의 코믹 버전이라 할 수 있으며, 윤제균 감독이 만들어낸 슬픈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로 재빠르게 편입하는 기동성을 보여줬고, 차승원은 [투캅스], [할렐루야]의 박중훈을 연상시키는 코믹 연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며 영화의 웃음을 뒷받침했습니다. 한마디로 여러 흥행 요소들을 적절하게 뒤섞어 새로운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낸 셈이죠.
하지만 [선생 김봉두]는 신선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런 뛰어난 믹스(mix)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기에 장규성의 능력은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욕심이 지나쳐서일까요? [여선생 VS 여제자]는 아예 대놓고 [선생 김봉두]의 여성 버전을 외칩니다. 이제부터 장규성 감독이 자기 복제를 하기 시작한 거죠.
[선생 김봉두]와 [여선생 VS 여제자]는 많은 면에서 상당히 닮은 영화입니다. 주인공의 직업이 선생이라는 것 외에도 선생이라는 어찌 보면 근엄한 직업을 코믹하게 표현함으로써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기본 설정과 어른인 선생과 아이인 어린 학생의 자연스러운 대결 구도로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도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정도는 애교로 넘어 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규성 감독의 자기 복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이장과 군수]를 통해 다시한번 자기 복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여선생 VS 여제자] 제 2탄.
[이장과 군수] 역시 아예 대놓고 [여선생 VS 여제자]의 또 다른 모습임을 감추지 않습니다.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두 상반된 캐릭터의 대결구도에서부터 애증이 담긴 서로의 관계까지...
먼저 [여선생 VS 여제자]부터 살펴보면, 이 영화는 노처녀 여선생인 여미옥(염정아)이 서울에서 전학온 새침떼기 여학생 고미남(이세영)과 꽃미남 남선생 권상춘(이지훈)을 사이에 두고 코믹한 대결을 벌이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코믹 대결 코드는 미남에 비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미옥이 오히려 대결에서는 미남에게 밀리는데 있습니다. 어린 학생에게 질수 없다는 미옥의 자존심은 그들의 대결을 점점 확장시킵니다.
[이장과 군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 춘삼(차승원)은 언제나 반장이었고, 대규(유해진)는 만년 부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대규는 군수가 되어 있고, 춘삼은 촌동네 이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높은 지위를 유지했던 춘삼은 그러한 자신의 위상을 대규에게 빼앗기며 자존심 회복을 위해 '절대로 대규에게만은 질수 없다'라는 딴지 정신으로 대규와의 싸움을 점점 발전시키는 겁니다.
이러한 두 캐릭터의 기본 설정은 물론이고, 마지막의 화해 역시 닮아 있습니다. 서로 치고 받고 싸웠지만 결국엔 진정한 사제간의 정을 확인했던 [여선생 VS 여제자]처럼 [이장과 군수] 역시 진정한 우정의 재발견으로 막을 내리며 [선생 김봉두]에게서부터 이어온 슬픈 코미디의 명맥을 잇습니다.
여기에 [선생 김봉두]에서의 연기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차승원이 코믹 연기까지 더해지고 나니 영화를 보기 전 우려했던 대로 [선생 김봉두]와 [여선생 VS 여제자]의 짬뽕 분위기가 확 풍기더군요.
자기 복제는 이제 그만
분명 자기 복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잘 만드는 장르의 영화를 꾸준히 발전시킴으로써 영화적 재미를 증폭시킨다면 자기 복제라고해서 '또 이런 식의 영화야?'라고 외면할 필요는 없는 거죠.
하지만 장규성 감독의 문제는 자기 복제를 통해 만들어진 영화들이 점점 그 재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선생 VS 여제자]는 [선생 김봉두]보다 재미없었고, [이장과 군수]는 [여선생 VS 여제자]보다 재미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복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복제품이 원제품보다 더 나은 경우는 드무니까요.
장규성 감독은 분명 코미디 영화에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너무 자기영화 복제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면 다시한번 요절복통 코미디 영화를 언제든지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차기작은 [트로트의 여왕]이라는 영화로 댄스가수 지망생 딸 VS 3류 트로트 가수 아빠의 이야기라는 군요. 아직 어떤 영화인지 알 수 없지만 혹시 이번엔 서로 다른 음악적 취향을 가진 부녀의 대결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로 [여선생 VS 여제자], [이장과 군수]에서부터 이어지는 대결 3탄이라면 이번엔 아무리 극장에서 시간대가 딱 맞아 떨어지더라도 차라리 이미 본 영화를 볼 것입니다.
제발 자신의 재능을 자기 복제로 허비하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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