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주연 :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아드리아나 바라자, 야쿠쇼 코지, 키쿠치 린코
개봉 : 2007년 2월 22일
관람 : 2007년 2월 24일
등급 : 18세 이상
달콤한 휴일의 늦잠을 포기하다.
설날 연휴로 인한 명절 증후군 때문인지, 아니면 유난히 짜증나는 일이 많았던 회사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몸과 마음이 무척이나 피곤한 채 황금 같은 주말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말이면 최소 오전 11시까지 늘어지게 자면서 일주일의 피로를 풀었지만 이번 주말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보고 싶은 영화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구피는 당직이라며 토요일에도 출근을 하고 홀로 남은 저는 늦잠의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고 일찌감치 일어나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무려 한 시간동안이나 고민하며 짠 영화보기 스케줄에 따르면 일단 무조건 [바벨]을 보고(AM 10:10), [록키 발보아](PM 1:00), [복면달호](PM 1:40), [1번가의 기적](PM 2:10)중 한편을 골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휴일을 반납할 정도로 제게 [바벨]은 너무나도 보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이미 아카데미의 최후 향방은 [디파티드] 혹은 [바벨]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바벨]을 보지 않고 아카데미 시상식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바벨]은 예상대로 작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바벨]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은 어렵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왜냐하면 [크래쉬]엔 절망 끝에 희망이 보였지만, [바벨]에는 절망만 보일뿐 희망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난 이 영화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쯤에서 '누가 감히 깐느 영화제에서도 인정한 이 영화를 욕해?'라고 흥분하실 분들을 위해 변명 한마디를 늘어놓자면, 전 결코 이 영화를 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4개의 도시에서 6개의 언어로 만들어지며 사람들 간의 언어 소통의 단절이 가져오는 비극을 그려낸 [바벨]은 누가 뭐래도 대단한 영화임에 분명 합니다.
겨우 3번째 연출작인 이 영화로 깐느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연출력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할리우드 스타급 배우인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물론이고, 이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아드리아나 바라자와 키쿠치 린코의 연기도 눈시울을 적십니다. 특히 과감한 전라연기를 펼친 기쿠치 린코의 연기는 이 영화의 쟁쟁한 배우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카데미를 수상하지 못할 것이라는 제 예상은 이 영화의 작품성과 별도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작년 비슷한 형식을 지닌 [크래쉬]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것도 [바벨]의 수상 가능성이 낮은 가장 큰 이유이며, 앞에서도 언급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영화의 결말 역시 보수적인 아카데미 회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적합해 보입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아카데미의 향방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될 것이며, 만약 [바벨]이 작품상을 수상한다면 전 조용히 글을 수정해야할 지경에 몰릴지도 모르지만 올해는 아무래도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대한 예우 때문이라도 [디파티드]가 작품상을 수상하지 않을 런지...
안타까움과 분노
[바벨]은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에피소드는 모로코에서 염소를 키우는 한 소박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에게 장총을 구입하고 그 총을 어린 두 명의 아들들에게 주며 염소를 자칼에게 지키라고 시킵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그들은 서로에 대한 시기심과 호기심이 발동하여 관광버스를 향해 한발의 총을 쏘고 그 총알은 우연히도 미국인 관광객인 수잔(케이트 블란쳇)의 어깨에 관통합니다.
이 에피소드를 보며 제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입니다. 총이라는 위험한 물건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어린 아들들에게 전해 주는 무심한 아버지의 행위에서 어쩌면 그들의 비극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한 순간의 호기심으로 인해 전 세계를 위협에 빠뜨리는 테러리스트로 몰리고 두려움에 도망을 치려했던 이 순진한 모로코의 가족들은 결국 예정된 비극을 맞이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자신이 돌보는 주인집 아이들을 데리고 아들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멕시코를 방문하는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의 이야기입니다. 단지 그녀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가했다가 집인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일뿐인데 멕시칸이라는 이유로 미국의 국경을 지키는 경찰의 의심을 받고 사막에 내버려집니다.
이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동안 제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였습니다. 도대체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사막에 버려지고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저렇게 사경을 헤매야만 하는 것인지... 결국 16년을 살며 이젠 조국과도 같은 미국에서 강제 추방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에서 미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그들의 삶에 분노가 치밀어 왔습니다.
두려움과 답답함
세 번째 에피소드는 세 째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서먹해진 부부 관계를 회복하고자 모로코로 여행을 떠난 리처드(브래드 피트)와 수잔의 이야기입니다.
이름이 알려진 할리우드 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한 탓에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이 에피소드는 이 영화의 포스터에서의 브래드 피트의 울음처럼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제게 안겨줍니다.
갑작스런 아내의 총상으로 절망에 빠진 리차드. 설상가상으로 낯선 모로코의 시골길엔 변변한 병원이나 의사 한명 찾아 볼 수 없고, 일행은 테러의 두려움으로 리차드와 수잔을 남겨둔 채 도망을 갔으며, 미국은 외교적 문제 때문에 리차드와 수잔을 방치해 둡니다.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애원을 하고 분노를 터트려 보지만 그들의 문제는 단지 뉴스거리에 불과합니다. '테러다, 아니다'라는 미국과 모로코의 설전이 진행되는 동안 수잔은 출혈과다로 점점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기만 합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일본의 야스지로(야쿠쇼 코지)와 그녀의 장애인 딸 치에코(키쿠치 린코)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자살로 마음의 문을 닫은 치에코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처녀성을 없애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그녀를 남자 아이들은 괴물보듯이 봅니다.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해 조금 동떨어진 듯이 보이면서도 언어의 장애에 대한 문제를 가장 원초적으로 풀어나간 이 에피소드에서 저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처녀성을 없애기 위해 팬티를 벗고 남자에게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상한 아이'라는 매서운 눈초리뿐입니다. 클럽에서 만난 남자 아이들도, 치과 의사도,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온 형사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그녀이기에 이 에피소드는 소음과 정적을 오가며 말도 안 되는 욕망에 사로잡힌 치에코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합니다.
희망은 어디에?
이미 [21그램]에서 관객을 혼돈에 빠뜨리는 편집의 묘미를 보여줬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바벨]에서도 4개의 에피소드를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 배열해 놓음으로써 마지막 관객 스스로 퍼즐을 맞추는 재미를 안겨줍니다.
단지 이 영화에 대한 워낙 많은 정보를 들은 탓에 영화의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각 에피소드간의 상호연간성을 유추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마음 한켠에 묵직한 그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절망입니다. 테러리스트로 몰린 모로코의 가족들도, 미국에서 추방당한 멕스코인 유모도, 낯선 곳에서 갑작스런 변고를 당한 미국인 관광객도, 마음을 다친 후 처녀성을 없애는 것에 집착하는 일본인 소녀도. 그들의 그 어디에도 절망만 있을 뿐 희망은 없습니다.
물론 해석하기에 따라 수잔은 목숨을 건졌기에 리차드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며, 야스지로와 치에코의 그 감동적인 포옹은 부녀간의 단절이 해소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가 안겨준 그 묵직한 절망을 해소시킬 희망으로는 왠지 부족해 보입니다.
모든 영화에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에 희망이 안 보인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어쩌면 참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난 후 무거워진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엔 [크래쉬]처럼 너무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영화다운 희망이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는 것. 그것은 너무 이기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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