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6년 영화이야기

[인페르노] - 이건 누가 뭐래도 사랑 이야기이다.

쭈니-1 2016. 10. 28. 16:54

 

 

감독 : 론 하워드

주연 : 톰 행크스, 펠리시티 존스, 벤 포스터, 오마 사이, 시드 바벳 크누센

개봉 : 2016년 10월 19일

관람 : 2016년 10월 27일

등급 : 15세 관람가

 

 

사랑이란 술과 같은 것.

 

저는 사랑이란 바로 "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을 마실땐 알딸딸한 것이 기분도 좋고, 술에 취하면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술을 과하게 마신 다음 날의 숙취는 그 어떤 것보다 괴롭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할때는 마냥 좋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사랑이 깨지고 나면 실연의 아픔은 그 어떤 것보다 괴롭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제가 이렇게 '사랑이란 술이다.'라고 단정지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젊은 시절 몸소 체험을 해봤기 때문입니다. 특히 실연을 당했을 때의 아픔은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저는 그 아픔을 치유하는데 정확히 1년이 걸렸고, 그즈음 구피를 만나 새로운 사랑에 빠지며 14년 동안 구피와 웅이를 향한 사랑에 흠뻑 취해 지금까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저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보다, 사랑이 깨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 갑자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냐고요? 그것은 지난 목요일 밤에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인페르노]를 보고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페르노]는 멜로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댄 브라운의 베스트샐러를 원작으로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를 잇는 하버드대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 교수의 활약을 담은 스릴러 영화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페르노]를 보는 내내 이 영화에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로버트 랭던이라는 캐릭터를 처음 알린 [다빈치 코드]는 대표적인 음모론 영화입니다. 천재 화가이자 발명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소재로 카톨릭의 비밀단체인 시온 수도회가 숨기고자 했던 예수의 충격적인 비밀을 랭던과 소피 느뷔(오드리 토투)가 밝혀내는 것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다빈치 코드]는 그 과정에서 누명, 추격전, 반전 등 할리우드 스릴러의 전형성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2편인 [천사와 악마]는 아예 바티칸 안으로 들어갑니다. 강력한 에너지원인 반물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고대의식인 '콘클라베'가 집행되기전 가장 유력한 4명의 교황 후보가 납치됩니다. 카톨릭 교회의 탄압에 의해 해체된 비밀결사대 일루미나티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 조직으로 지목된 가운데 일루미나티는 반물질로 바티칸을 폭파시키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랭던은 바티칸 곳곳에 숨겨진 일루미나티의 단서를 파혜치며 바티칸을 구하고 숨겨진 음모를 밝혀냅니다.

사실 3편인 [인페르노]도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전세계 인구를 절반으로 줄일 것을 주장한 천재 생물학자 베르트랑 조브리스트(벤 포스터)가 자신의 급진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만들어내고 제2의 흑사병을 일으키려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랭던과 그의 담당의사인 시에나 브룩스(펠리시티 존스)는 유럽 전역을 돌며 조브리스트의 음모를 막아냅니다.

 

 

왜 단테인가?

 

이렇듯 [인페르노]는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와 비슷한 구조를 지닌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영화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인페르노]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가 되는 것이 단테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테라고 한다면 <신곡>이라는 어마무시한 장편 서사시를 쓴 13세기 이탈리아 시인으로 기억합니다. 현재의 지옥 풍경은 단테의 <신곡>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네요.

<신곡>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단테는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다가 빛이 비치는 언덕 위로 다가가려 했으나 3마리의 야수가 길을 가로막습니다. 그때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를 구해 주고 길을 인도합니다. 그는 먼저 단테를 지옥으로, 다음에는 연옥의 산으로 안내하고는 꼭대기에서 단테와 작별하며 베아트리체에게 그의 앞길을 맡깁니다.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된 단테는 천국에까지 이르고, 그 곳에서 한순간 신의 모습을 우러러보게 된다는 것이 전체의 줄거리입니다.

<신곡>에서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70년에 태어난 로마의 철학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단테를 천국으로 안내한 베아트리체는 누굴까요? 그녀는 단테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으로 그녀를 향한 단테의 간절한 사랑은 단테가 누명을 쓰고 1302년 피렌체에서 추방되면서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곡>은 단테가 1307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1321년 죽음을 맞이하기 바로 직전에 완성되었습니다.

 

[인페르노]에서도 그러한 단테의 사연이 언급됩니다. 죽음을 맞이한 단테의 얼굴 석고상을 전시중인 박물관에서 박물관 안내원은 단테의 석고상이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고향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시에나는 단테가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향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신곡>에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신곡>은 사후의 세계를 중심으로한 단테의 여행담입니다. 그런데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을 여행한 단테는 베아트리체와 만나 천국을 안내받게 됩니다. 그만큼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그리워했고, 그녀와 함께 한다면 죽음도 천국일 것이라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이 공존하는 단테의 <신곡>은 [인페르노]에서 고스란히 인용됩니다.

조브리스트는 인류에게 질문을 합니다. '당신에게 두개의 버튼이 있습니다. 첫번째 버튼을 누르면 인류의 절반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지만 두번째 버튼을 누른다면 100년후 인류는 멸망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버튼을 누르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느 버튼을 누르겠습니까? 지금 당장 뼈를 깎는 고통을 선택함으로써 미래의 번영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외면하고 잠시 동안의 평안을 선택하겠습니까? 조브리스트는 첫번째 버튼을 선택했고,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믿었습니다. 

 

 

조브리스트는 인류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이후 영화의 스포가 가득합니다.)

 

대개 최후의 심판설을 믿고 실행에 옮기려 하는 이들은 잃을 것이 없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현재가 불행하기 때문에 오히려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실행하려합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조브리스트는 모든 것을 가진 행복한 남자입니다. 천재 생물학자이며, 백만장자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에겐 사랑하는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인류의 절반을 학살하려 했습니다.

조브리스트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해도 인류 멸망은 100년 후에나 이뤄질 것입니다. 다시말해 조브리스트의 살아생전에는 인류 멸망이라는 대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조브리스트가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다면 굳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만드는 위험한 짓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류를 사랑했고, 어떻게든 인류를 구원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죠.

애초에 조브리스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전세계 인구로 인하여 결국 지구의 자연이 훼손되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 생각했고, WHO의 사무총장 엘리자베스 신스키(시드 바벳 크누센)에게 식수와 음식에 불임약을 섞으라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이 묵살당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바이러스에 의한 인류 절반의 학살을 계획한 것이죠.

 

그로인하여 그는 WHO를 비롯한 정부기관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엔 자살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조브리스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면서까지 인류를 지옥으로 몰아넣으려 했던 것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향한 조브리스트의 지나친 사랑이 이 모든 비극의 원인입니다. 돈 때문에 조브리스트의 바이러스를 빼앗으려 했던 WHO요원  크리스토프 브루더(오마 사이)와는 다릅니다.

비록 조브리스트의 계획은 랭던에 의해 저지되지만, 만약 100년 후 조브리스트의 예언대로 인류가 멸망을 맞이한다면 100년 전의 사건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당장 조브리스트는 미치광이 테러리스트이고, 랭던은 테러를 막은 영웅이지만, 만약 그때가 된다면 조브리스트는 인류를 구원하려 했던 선지자이고, 랭던은 인류 구원의 마지막 희망을 막은 악당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랭던과 조브리스트에 대한 평가는 어쩌면 100년 후에 이뤄져야 마땅할지도 모릅니다.

[인페르노]가 다른 스릴러 영화와 다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스릴러 영화는 선과 악의 구분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인페르노]에는 브루너를 제외하고는 확실한 악이 없습니다. 브루너도 영화 후반에 가서야 본성을 드러냅니다. 조브리스트를 도와 이 모든 음모를 꾸몄던 사설 경비업체 대표 해리 심(이르판 칸)도 조브리스트의 계획을 알고나서는 랭던 교수를 도우며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기까지합니다. 이것이 [인페르노]의 영화적 묘미입니다.

 

 

랭던의 사랑과 시에나의 사랑

 

[인페르노]는 결국 인류를 향한 조브리스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의 사랑은 미쳤고, 섬뜩합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천국에 도달하기 전에 지옥과 연옥을 먼저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브리스트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인류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는 이성적이지 못했고, 자신이 살아생전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인페르노]는 인류를 향한 조브리스트의 사랑 외에도 두개의 서로 다른 사랑이 나옵니다. 첫번째 사랑은 조브리스트를 향한 시에나의 사랑입니다. 사실 [다빈치 코드]에서는 소피가 랭던과 함께 했고, [천사와 악마]에서는 비토리아 베트라(아예렛 주어)가 랭던과 음모를 파헤쳤습니다. 그렇기에 [인페르노]의 시에나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스릴러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여성 캐릭터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입니다. 솔직히 소피, 비토리아와는 달리 랭던의 담당의사에 불과한 시에나가 랭던과 목숨을 건 위험한 모험을 한다는 설정은 무리수가 뒤따릅니다.  

그렇기에 저는 영화 내내 시에나의 진짜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시에나가 조브리스트의 연인이었고, 조브리스트가 해내지 못한 일을 시에나가 마무리하려고 한다는 반전이 제시되었을때 그제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쾌감을 느꼈습니다. 조브리스트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을 마무리하려 했던 시에나. 조브리스트가 자살한 마당에 조브리스트를 향한 시에나의 사랑은 댓가가 없습니다. 그저 사랑했기에 시에나는 조브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랭던은 사랑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을 위해 사랑을 포기합니다. 랭던을 사건에 끌어들인 엘리자베스는 과거 랭던과 사랑했던 관계입니다. 하지만 랭던은 하버드에서 기호학자의 삶을 선택했고, 엘리자베스는 WHO에서 일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브리스트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이 진짜 사랑일까요? 사랑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 시에나의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도록 조용히 자신의 사랑을 속으로 삼키는 것이 진짜 사랑일까요? 어쩌면 누구의 사랑이 진짜인지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한 사랑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 사랑도 진심을 담았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인페르노]가 끝나자 저는 마치 멜로영화를 본 것처럼 가슴 한편이 아려왔습니다. 조브리스트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시에나의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고,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를 붙잡지 못하는 랭던과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표정에서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스릴러 영화에서 멜로영화에서나 느낄법한 아련함을 느끼다니 조금 어색했지만, 이런 아련함이 있었기에 [인페르노]는 누가 뭐래도 제게만큼은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조브리스트는 지옥에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인류를 지켜볼 것이다.

100년 후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며...

만약 우리가 급진적인 방법이 아닌 슬기로움으로 조브리스트의 예언을 무너뜨린다면

조브리스트는 그제서야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