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6년 영화이야기

[스플릿] - 이쯤되면 꽤 잘 만든 스포츠 영화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쭈니-1 2016. 11. 14. 17:44

 

 

감독 : 최국희

주연 : 유지태, 이정현, 이다윗, 정성화

개봉 : 2016년 11월 9일

관람 : 2016년 11월 11일

등급 : 15세 관람가

 

 

볼만한 영화가 없어서 봤지만...

 

금요일, 외근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회사로 복귀하기에는 어정쩡한 시간, 결국 저는 집에 일찍 들어가 푹 쉬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문득 11월 들어서 극장에서 단 한편의 영화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10월 마지막주 일요일에 2016년 최고 기대작 중의 한편이었던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고나니 한동안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일찍 들어가 뒹굴거리느니 오랜만에 극장에 가자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큰 맘먹고 극장에 도착했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를 한번 더 봐야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영화는 [닥터 스트레인지]와 같은 날 개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극장 관람을 포기해야했던 애니메이션 [쿠보와 전설의 악기]였지만, 이 영화는 주말에 웅이와 함께 봐야겠다는 생각에 또다시 잠시 뒤로 미뤄놓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쿠보와 전설의 악기]마저 미뤄놓고나니 남은 영화는 [스플릿]뿐이었습니다.

[스플릿]은 유지태, 이정현, 이다윗이 주연을 맡은 볼링을 소재로한 스포츠 영화입니다. 제가 싫어하는 소재의 영화는 분명 아니지만, 그래도 극장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매력 또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1월 들어서 처음으로 극장에 왔는데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아무 영화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별 기대없이 [스플릿]을 선택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스플릿]을 굉장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어쩌면 [스플릿]에 대한 제 기대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스플릿]은 스포츠를 소재로한 영화답게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포츠의 명승부로 저를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배우들의 명연기도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사실 주연을 맡은 유지태의 경우는 [봄날은 간다], [올드보이]라는 확실한 대표작이 있지만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인식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올드보이]의 경우는 유지태보다는 최민식이 더 주목을 받았기에 유지태의 존재감은 희미했습니다. 게다가 유지태의 최근작인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의 흥행 실패는 영화배우로써 그의 입지를 더욱 불안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스플릿]에서 유지태는 어깨에 힘을 뺀 듯한 자연스러운 연기로 연기경력 20년의 내공을 유감없이 선보였습니다.

사정은 이정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데뷔작인 [꽃잎]에서 신인배우답지 않은 과감한 연기를 선보였던 이정현. 하지만 그 이후에는 그녀의 몸에 맞는 배역을 좀처럼 찾지 못했습니다. 구피는 이정현이 배우가 아닌 가수로 알고 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스플릿]에서 그녀는 유지태와 마찬가지로 어깨에 힘을 뺀 듯한 자연스러운 연기로 색다른 매력을 선보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이름... 이다윗

 

하지만 역시 뭐니뭐니해도 [스플릿]에서 가장 돋보였던 배우는 이다윗입니다. 분명 이다윗은 제게 낯선 배우였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아주 오랫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 실력파 배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 장훈 감독의 [고지전], 독립영화로 호평을 받은 [명왕성], [신촌좀비만화] 등의 영화에서 연기력을 착실하게 키워나간 이다윗은 [스플릿]에서 정신지체장애인이면서 볼링의 천재인 영훈 역을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스플릿]에서 영훈의 캐릭터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때 볼링계의 전설이었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도박볼링판에서 선수로 뛰며 별볼일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철종(유지태)의 경우는 이런 류의 영화에서 너무 흔한 캐릭터입니다. 철종의 조력자이자 도박볼링판의 브로커인 희진(이정혐) 역시 그다지 특별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하지만 영훈은 다릅니다. [스플릿]이 그저 그런 영화가 아닌, 특별한 재미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영훈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제가 [스플릿]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도 영훈의 등장부터입니다. 폼이 중요한 볼링에서 우스꽝스러운 폼으로 혼자 볼링을 하는 영훈. 하지만 그의 볼링공은 백발백중 스트라이크입니다. 그러한 영훈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철종은 그를 도박볼링판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짜장면에서는 꼭 오이를 넣어야 하고, 음료수는 밀키스만 마시는 영훈. 처음에 철종과 희진은 돈을 벌기위해 영훈을 끌어들이지만, 점차 그들은 돈보다 더 소중한 가족이 됩니다.

 

영훈은 베리 레빈슨 감독의 걸작 [레인맨]의 레이몬드(더스틴 호프만)를 연상시킵니다. [레인맨]은 아버지가 엄청난 재산을 자폐증환자인 형, 레이몬드에게 물려주고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찰리(톰 크루즈)가 유산을 빼앗기 위해 레이몬드와 여행을 떠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레이몬드는 숫자를 모조리 외울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고, 그를 이용해서 찰리는 도박판에서 큰 돈을 법니다. 하지만 결국 찰리는 레이몬드와의 여행을 통해 돈으로는 살 수 없는 형제애를 깨닫게됩니다. 

[레인맨]이 자폐증환자인 레이몬드의 기괴한 행동으로 영화적 재미와 감동을 완성했다면, [스플릿]은 정신지체장애인인 영훈의 엉뚱한 행동을 통해 무거워질 수 있는 영화에 웃음짓게 하고 , 영화의 마지막에는 감동마저 안겨줍니다. 영훈의 엉뚱한 행동들의 이유가 밝혀지는 영화 후반부에서는 철중이 느꼈을 법한 감동이 제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정신지체장애인 볼링천재와 한때 볼링계의 전설이었지만 지금은 인생의 패배자일 뿐인 철중의 조합은 [스플릿]의 영화적 재미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두 캐릭터 모두 과거의 말못할 상처를 안고 있고, 현재는 비루하기 짝이 없지만, 볼링에 대한 천부적 재능으로 똘똘 뭉쳐 미래를 개척해나갑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영훈을 응원하게 되었고, 영훈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철중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스플릿]을 예상외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볼링의 불문율... 나도 경험한 적이 있다.

 

[스플릿]은 볼링을 소재로한 스포츠 영화입니다. 스포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마지막 승부의 묘미입니다. 그리고 [스플릿] 그러한 마지막 승부를 잘 살려냈습니다. 솔직히 저는 볼링을 잘 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볼링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때 체육 수업을 통해서입니다. 난생 처음 볼링장에 갔던 저는 영훈의 우스꽝스러운 폼처럼 말도 안되는 폼으로 친구들의 비웃음을 들으며 볼링공을 굴렸습니다.

저는 그냥 한가운데로 볼링공을 던진다는 생각으로 공을 굴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 볼링공은 10개의 볼링핀을 모두 넘어뜨리는 스트라이크였습니다. 체육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제게 다시한번 공을 던져보라고 시키셨는데, 두번째 공도 스트라이크였습니다. 하지만 폼이 엉망인 관계로 체육점수를 좋게 받지는 못했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간간히 친구들과 볼링을 쳤었는데 역시나 폼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점수는 꽤 좋았습니다. 친구들은 개인 볼링공과 온갖 멋진 폼으로 볼링을 했지만 엉터리 폼을 지닌 제게 항상 게임에서 졌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가 볼링을 굉장히 잘 한다는 착각에 빠졌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착각으로 인하여 결국 대망신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대학 졸업후 첫 직장에서 직장 상사와 볼링을 치려 갔는데,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볼링을 잘한다고 자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 볼링공은 평소와는 달리 연거푸 똥통(전문용어로는 거터)에 빠졌습니다. 너무 잘하고 싶은 욕심에 평소와는 달리 손목에 힘을 너무 줬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제 경험은 [스플릿]에서 철중과 두꺼비(정성화)의 마지막 대결에서 드러납니다. 결국 볼링은 멘탈 게임입니다. 누가 주변을 인식하지 않고 볼링에 집중하느냐가 게임의 승패를 갈라놓습니다. 영훈이 볼링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놀라운 집중력 덕분입니다. 이를 잘 알기에 두꺼비는 철중의 아픈 과거를 건드리며 철중의 집중력을 흐트러놓으려합니다. 하지만 철중은 두꺼비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고, 이로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은 오히려 두꺼비가 된 것입니다.

요즘 저는 볼링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볼링을 했던 것이 5년 전 회사 동료들과 했던 게임이 마지막이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스플릿]에서 영훈의 우스꽝스러운 폼을 보며 대학시절 제가 떠올랐고, 철중과 두꺼비의 마지막 승부에서는 한때 볼링을 굉장히 잘한다는 착각에 빠졌다가 대망신을 당했던 그날의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추억들이 있기에 저는 [스플릿]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스플릿]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요소들 때문입니다. [스플릿]은 영훈이라는 흥미로운 캐릭터를 창조했고, 그 덕분에 너무 뻔해질 수 있는 영화에 활기와 감동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까지 스포츠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묘미를 제대로 살려냄으로써 긴장감을 유지했습니다. 이쯤되면 꽤 잘만든 스포츠 영화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습니다.

 

 

요즘 프로야구의 승부조작에 대한 단상

 

하지만 제가 [스플릿]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이유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스플릿]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요즘 프로야구의 최대화두인 승부조작 사건에 대한 의미있는 한방을 제대로 날려줬다는 것도 [스플릿]에 대한 제 만족의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의 최고 인기 스포츠 중의 하나인 프로야구는 2016년 승부조작 사건으로 큰 홍역을 치뤘습니다. 프로 선수들이 돈을 받고 승부를 조작했다는 사실은 제게 크나큰 충격 중에서도 충격이었습니다.

[스플릿]은 비록 프로야구가 아닌 볼링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승부조작이라는 동일한 키워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때 볼링계의 전설로까지 불리웠던 철종이 이렇게 처절하게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승부조작의 덫에 걸렸기 때문이고, 두꺼비가 결국 철종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철종에게 승부조작을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철종에게 개인전은 우승을 했으니 단체전을 져도 되지 않냐고 회유하는 승부조작 브로커의 모습에서 승부조작의 덫에 걸린 프로야구 선수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보였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냥 볼넷 하나 뿐인데 뭐 어떠냐는 안일한 생각이 젊은 프로야구 유망주들을 수렁으로 몰아 넣은 것입니다. 그저 잠깐의 쾌락과 몇푼의 돈으로 팔아버린 그들의 미래. 철종의 모습을 통해 승부조작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는 [스플릿]에 대한 관람을 마쳤습니다.

 

  내 인생의 스트라이크는 자기 자신에게 떳떳할 때 이뤄진다.

하지만 스트라이크를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언제나 남아있는 스페어 핀을 처리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