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6년 영화이야기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 - '갑'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

쭈니-1 2016. 6. 17. 18:21

 

 

감독 : 권종관

주연 : 김명민, 김상호, 성동일, 김영애, 김향기

개봉 : 2016년 6월 16일

관람 : 2016년 6월 16일

등급 : 15세 관람가

 

 

'갑'에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을'의 비애

 

며칠 전, 저희 회사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입니다. 교보문고에서 저희 회사 제품인 전동연필깎이를 사갔던 어느 중년남성고객이 반품을 하겠다며 전동연필깎이를 택배로 보냈습니다. 문제는 전동연필깎이가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며, 더 큰 문제는 쓴 흔적까지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저희 회사 입장에서는 반품을 받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담당 여직원이 고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객은 자신은 전동연필깎이를 쓰지 않았다며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동연필깎이 안에 연필을 깎은 흔적과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품 사진을 찍어 고객에게 보내줬습니다. 그러자 고객은 버럭 화를 내며 욕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저희는 고객이 원하는대로 전동연필깎이를 반품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반품을 받은 전동연필깎이를 다시 판매를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쓴 중고 제품을 고객에게 팔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아마 2만원짜리 전동연필깎이 반품에 성공한 그 고객은 속으로 뿌듯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런 죄도 없이 고객에게 욕설을 들은 저희 여직원은 눈물을 흘리며 하루종일 속상해했습니다. 2만원. 물론 그 고객에겐 큰 돈일수도 있지만, 과연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딸뻘인 여직원에게 욕설까지 해서 쟁취해야할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을'(乙)입니다. 회사에 출근하면 직장 상사에게 '을'이고, 고객에게 '을'입니다. 아무리 부당하고  억울해도 '을' 입장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참아야만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의 '을'은 공부를 하고, 돈을 벌어서 '갑'(甲)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은 소수의 '갑'과 대다수의 '을'입니다. 아마 저희 여직원에게 '갑'질을 한 그 중년의 남성 고객도 다른 곳에서는 '을'이겠죠.

이러한 사회 분위기 때문일까요? 최근에는 부쩍 '갑'질을 하는 금수저에게 을이 통쾌한 한방을 날리는 영화가 인기입니다. 그 시발점은 [베테랑]입니다. 특수 강력사건 담당 광역수사대 경찰팀과 재벌 3세의 한판 대결을 담은 이 영화는 무려 1,341만 관객을 동원하며 2015년 최고 흥행작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기록은 [명량]과 [국제시장]에 이은 우리나라 박스오피스 역대 3위에 해당됩니다. [베테랑]이 이렇게 신드룸에 가까운 흥행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역시 '갑'을 향한 통쾌한 한방입니다.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 역시 '갑'질하는 금수저에게 날리는 통쾌한 한방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한때는 모범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브로커 활동을 하는 최필재(김명민)가 인천의 재벌 대해제철의 실세인 여사(김영애)의 추악한 실체를 벗겨내는 내용입니다. 여러모로 [베테랑]과 비슷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는 제2의 [베테랑]이 될 수 있을까요?

 

 

'을'도 이런 '을'이 없다.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을'입니다. 주인공인 최필재는 범죄자인 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에 경찰이 되었지만 동료의 배신으로 경찰복을 벗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브로커로 돈을 잘 벌고 있지만,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신구)를 모시며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범죄자와 변호사 김판수(성동일)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며 치욕적(?)으로 살아가야합니다.

'대해제철 며느리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는 권순태(김상호)는 '을' 중에서도 '을'입니다. 한때 범죄자로 살아가던 그는 어린 딸 동현(김향기)을 위해 택시운전사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그의 과거는 문신만큼이나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대해제철 며느리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게 되는데, 아무리 무죄를 주장하며 울부짖어도 그의 과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필재와 권순태는 과거에 얽매어 있습니다. 최필재는 아버지의 과거에 얽매어 있고, 권순태는 자신의 과거에 얽매어 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과거는 같은 '을'에게도 외면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경찰복을 벗는 최필재를 불쌍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아버지 피는 못속여.'라며 수근댔고, 억울함을 주장하는 권순태의 말에 귀기울이기 보다는 '개버릇 남 못준다.'라며 외면했습니다.

 

최필재가 '대해제철 며느리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을 배신하고 경찰복을 벗게 만든 옛 파트너 양형사(박혁권) 때문이지만, 그가 목숨을 걸고 대해제철과 한판 승부를 벌인 이유는 권순태의 딸 권동현(김향기) 때문입니다. 범죄자의 아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자란 최필재는 앞으로 범죄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을 권동현의 처지에 동질감을 느낀 것입니다.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의 재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베테랑]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을'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임무인 경찰이 법위 위에 군림하려하는 '갑'에 대한 통쾌한 한방이라면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는 '갑'이 되고 싶었지만 '을'일수 밖에 없는 최필재가 자신보다 더한 '을'인 권순태와 권동현을 위해 '갑'에게 힘겨운 대항을 하는 영화입니다. '을'에 '을'을 위한 '을'에 의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이렇게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가 '을'에 의한 영화인 만큼 악의 축이라 할 수 있는 '갑'도 중요합니다. 이 영화의 '갑'은 인천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대재벌의 실세인 여사입니다. 겉으로는 교양있고,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허영심 덩어리에 대해제철을 위해서라면 사람 몇명쯤 죽이는 것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갑'중의 '갑'이라고 할 수 있죠. 결국 이 영화는 '을'중의 '을'인 주인공이 '갑'중의 '갑'에 맞서 싸우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베테랑]과 다른 점

 

분명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는 [베테랑]과 비슷한 소재를 가진 같은 장르의 영화입니다. 하지만 '갑'에게 통쾌한 한방을 날리는 주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베테랑]의 경우는 서도철(황정민)을 중심으로한 특수강력사건 담당 광역수사대입니다. 서도철과 그의 팀원들은 조태오(유아인)의 돈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을'의 억울함을 대신 처리해줍니다.

그와는 달리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에서 '갑'에게 통쾌한 한방을 날리는 주체는 전직 경찰이지만 지금은 브로커인 최필재입니다. 그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대해제철 며느리 살인사건'에 끼어 들었다가 양형사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게 되고,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권순태(김상호)의 억울함도 풀어주고, 대해제철의 실세인 여사에게 한방을 날려줍니다.

[베테랑]과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의 이 작은 차이는 사실 영화를 이끌어나가는데 있어서 큰 차이가 됩니다. [베테랑]의 서도철에게는 조태오를 조사할 수 있는 수사권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서도철은 조태오를 조금씩 옭아맬수 있었습니다. 그와는 달리 최필재에게는 수사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해제철의 실세라는 거물을 잡아들이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한계는 영화의 후반부의 억지로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는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결코 제2의 [베테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가 제2의 [베테랑]이 되려면 영화를 보는 제게 통쾌함을 안겨줘야하는데,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에는 그러한 통쾌함이 [베테랑]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합니다. 그것은 앞서 설명한 수사권이 없는 최필재가 지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때문입니다.

수사권이 없는 최필재는 대해제철 수사를 하는데 있어서 치밀하게 옭아매는 것보다는 직접 몸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었던 최필재는 대해제철의 박소장(김뢰하)과 직접 대결을 할수 밖에 없고,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깁니다. 이 영화의 무리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대해제철 여사의 명령이라면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 박소장과 그의 부하들. 그런데 최필재를 죽이는데 있어서는 실패를 거듭합니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1시간 30분까지 최필재가 죽을만큼 고생을 하고, 30분 동안은 속시원하게 한방을 날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최필재를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죽도록 고생하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반격에 성공합니다. 그러한 최필재의 몰골을 보고 과연 관객들은 대리만족을 할 수 있을까요?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가 '을'의 대리만족을 위한 영화라면 권종관 감독은 분명 실패한 셈입니다.

 

 

우리 돈의 노예는 되지 말자.

 

분명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는 '갑'질하는 금수저에 대한 통쾌한 한방이 부족한 영화였습니다. 게다가 수사권이 없는 최필재의 한계 때문에 영화가 후반이 되면 될수록 점점 억지스러워진다는 약점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는 영화를 보고나서 한번쯤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영화였습니다.

대해제철은 서민에게 장학금을 지원하여 엘리트가 되도록 도와주고, 재벌간의 정략결혼이 아닌 서민과의 결혼을 통해 회사를 키워나갑니다. 얼핏 보면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그들은 돈으로써 사람들을 길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해제철의 장학금으로 엘리트가 된 사람들은 엘리트가 된 이후에 대해제철의 충직한 개가 됩니다. 장부장검사(최병모)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사는 서민 출신의 남편을 얻어 그에게 대해제철의 회장 자리에 앉히지만, 그것은 대해제철의 돈에 길들여진 말 잘듣는 평생 집사를 구한 것과도 같습니다. 뒤에서 남편을 좌지우지하는 여사에게서 남편에 대한 사랑, 존경심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영화이기 때문에 과장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의 이러한 설정이 '갑'이 되고자하는 욕심 때문에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는 '을'에 대한 슬픈 자화상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갑'이 되고 싶습니다. 그 누구도 '을'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갑'이 되고자하는 욕심에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승진을 위해 파트너인 최필재의 뒷통수를 친 양형사, 대해제철의 장학금으로 검사가 된 이후에도 대해제철의 충직한 개가 된 장부장검사, 그리고 여사가 시키는 일이라면 청부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박소장까지... 그들은 얼핏 '갑'처럼 보이지만, 사실 '을'보다 못한 돈의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와는 달리 평생 범죄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을 권동현을 위해 끝까지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려 했던 권순태와 자신과는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죽을지도 모를 고생을 하는 최필재는 분명 '을'이지만 최소한 돈의 노예는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양민들이 스스로 양반의 노비가 되어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는 천민 생활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최소한 그 당시에는 살기 위해 '을'보다도 못한 노비가 되었지만, 요즘은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을'보다도 못한 돈의 노예가 되는 셈입니다.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를 보고나니 2만원을 환불받기 위해서 거짓말과 욕설을 해대던 중년 남성 고객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겨우 2만원의 노예가 된 고객보다는 비록 아무 잘못없이 욕설을 듣고 남몰래 눈물지어야 하는 저희 회사의 여직원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린 '을'이지만 최소한 '을'보다도 못한 돈의 노예는 되지 말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가끔 나는 돈 욕심에 아주 작은 부정을 저지를 유혹에 빠진다.

그때마다 내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너, 그 돈없다고 굶어 죽지 않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