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영화평/2016년 아짧평

[트럼보] - 영웅도, 악당도 없는 피해자만 있는 전쟁

쭈니-1 2016. 5. 18. 18:03

 

 

감독 : 제이 로치

주연 : 브라이언 크랜스톤, 다이안 레인, 헬렌 미렌

개봉 : 2016년 4월 7일

관람 : 2016년 5월 17일

등급 : 15세 관람가

 

 

할리우드 최악의 암흑기

 

1950년대 소련과의 냉전체제로 겁을 집어 먹은 미국은 매카시즘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매카시즘은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R. 매카시의 이름에서 나온 말로, 그의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50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당시 매카시 상원의원은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수년동안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한 매카시즘은 세계 영화산업의 매카인 할리우드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배우겸 감독이었던 찰리 채플린도 공산주의자로 몰렸고, 1952년 [라임라이트]의 런던 시사회를 위해 영국에 갔다가 미국 법무부가 그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아 강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다시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20년이 흐른 1972년 4월이었다고 하네요. 

[트럼보]는 1950년대 당시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지만 증언을 거부한 '할리우드 텐'의 멤버 중 한명인 각본가 달튼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톤)의 이야기입니다. 달튼 트럼보를 비롯한 '할리우드 텐'은 증언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6개월에서 1년까지 감옥생활을 해야만했습니다. 감옥에서 출소한 후에도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라 할리우드에서의 모든 활동을 금지당하기도 했습니다.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는 할리우드도 정체가 불분명한 이념 전쟁에 지다.

 

할리우드는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운영됩니다. 영화를 흥행시켜 큰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할리우드죠. 하지만 1950년대 당시에는 그러한 자본의 논리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배우, 감독, 각본가를 채용했다가는 영화 제작자들도 공산주의자로 몰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화제작자들은 "우리는 공산주의자나, 폭력이나 비합법적인 수단을 이용해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그 어떠한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을, 그 사실을 알면서 고용하진 않을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대 최고의 각본가인 달튼 트럼보조차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감춘채 가명으로 값싼 각본들을 마구 찍어내서 입에 풀칠을 해야만 했습니다. [트럼보]는 위협을 무릅쓰고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소환에 증언을 거부하는 당당했던 달튼 트럼보가 가족을 위해 싸구려 각본가로 전락하는 과정을 씁쓸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의 분위기가 우울한 것은 아닙니다. [트럼보]과 같은 소재를 지니고 있는 어윈 윙클러 감독의 1992년작 [비공개]와는 전혀 다른 조금은 밝은 분위기의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럼보'는 비록 가족을 위해 싸구려 각본을 쓰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만행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할리우드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맞섭니다.

 

 

 

아버지로써 '트럼보'의 역할

 

[비공개]에서 데이빗 메릴(로버트 드 니로)은 동료들을 공산주의자로 밀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영화 감독으로써의 생업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트럼보'는 익명성이 보장된 각본가인 덕분에 가명으로 자신의 원하는 글을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쓴 희대의 명작 [로마의 휴일]은 동료의 이름으로, 그리고 [브레이브 원]은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이름으로 아카데미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속이고 가명으로 활동을 해야 했던 '트럼보'에게도 아픔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점 탓에 싸구려 영화를 만드는 킹 브라더스 영화사의 프랭크 킹(존 굿맨)에게 자신의 각본을 값싸게 팔아넘깁니다. 문제는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점점 가족들과 멀어졌다는 점입니다. 가족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싸구려 각본을 밤낮없이 써내려가지만 오히려 그로인하여 가족들과 점점 멀어져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건 마치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열심히 일만 할줄 알았지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줄은 모르셨거든요. 그래서 언제나 아버지가 어려웠는데, [트럼보]에서 생일을 맞이한 큰 딸 니콜라(엘르 패닝)에게 일을 해야하니 건드리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트럼보'의 모습은 저희 아버지를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트럼보'에게는 현명한 아내 클레오(다이안 레인)가 있었기에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금방 깨닫습니다.

 

 

 

얄미운 헤다 호퍼, 그리고 존 웨인

 

'트럼보'를 비롯한 '할리우드 텐'이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증언을 거부한 것과는 달리 게리 쿠퍼처럼 우호적인 증언을 한 영화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또 로버트 테일러는 동료들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트럼보]에서는 매카시즘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가십 컬럼리스트 헤다 호퍼(헬렌 미렌)와 배우 존 웨인입니다.

특히 헤다 호퍼는 영화를 보다보면 한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습니다. 모자광인 그녀는 장면 장면마다 각기다른 화려한 모자로 자신을 치장합니다. 그리고는 매카시즘을 옹호하고 할리우드내 공산주의자에 대한 두려움을 자신의 글로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명성을 키워나갑니다. 그녀가 MGM 영화사 대표를 찾아 당장 '트럼보'를 해고하지 않으면 당신도 공산주의자라는 글을 쓰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은 정말 기가 찹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헤다 호퍼와 같은 인간들이 많이 있죠.

문제는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미국을 위한 애국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후손들이 소련과 맞서 싸우는 동안 자신은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서 미국을 안전하게 지켜야한다는 믿음. 그것이 그들을 매카시즘에 열광하게 만들고 아무 죄없는 동료들을 매장시킨 이유입니다.

 

 

 

영웅도, 악당도 없는 피해자만 있는 전쟁

 

결국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미국인들은 매카시즘에 휩쓸려 자신들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부끄러운 만행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트럼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1970년 전미 작가조합 로렐상을 수상하는 '트럼보'의 연설을 보여줍니다.  그는 블랙리스트는 악마의 시절이다고 성토합니다. 하지만 그 시기를 떠올리면서 영웅이나 악당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영웅도, 악당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카시즘을 주도했던 헤다 호퍼와 같은 인물들은 그저 두려웠던 것입니다. 냉전시대의 두려움... 그것이 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든 것이죠.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동료들을 밀고하고 살아 남았던 사람들은 그저 살고 싶어 발버둥 칠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들이었고, '트럼보'처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저 자신의 가치관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뿐입니다.

그들은 모두 피해자입니다. 두려움에 의한 피해자. 그리고 그 시절을 꿋꿋하게 버틴 '트럼보'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서 마땅히 자신의 것이어야 했던 영광과 명성을 되찾습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실제 달튼 트럼보의 인터뷰 영상은 그래서 감동스러웠습니다. 매카시즘, 그리고 블랙리스트라는 암흑기를 버틴 '트럼보', 영화 [트럼보]는 그러한 그의 모습을 당당하게 그려낸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