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흥식
주연 : 한효주, 유연석, 천우희, 박성웅
개봉 : 2016년 4월 13일
관람 : 2016년 4월 22일
등급 : 15세 관람가
자식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부모의 숙명
지난 금요일에는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아침부터 교육을 받기 위해 당산동으로 향했습니다. 4시간동안이나 지속된 지루한 교육. 하지만 교육이 끝나고나면 회사로 복귀하지 않고 자유 시간을 만끽할 것이기에 지루한 교육도 제겐 즐거웠습니다. 드디어 교육이 끝나자 저는 지체하지 않고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보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뤄두었던 [해어화]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해어화]를 보고나서도 시간이 조금 남아 한편의 영화를 더 볼 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탈자]는 구피와 함께 보기로 했기에 제외한다고해도 [브루클린], [트리플 9], [위대한 소원] 등 보고 싶은 영화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더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해어화] 한편만 보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해어화] 한편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웅이 때문입니다. 그날 웅이는 방과후 과학캠프에 참가를 했습니다. 과학캠프가 끝나는 시간은 저녁 7시. 저는 집에 일찍 들어가 청소를 깨끗이 하고, 과학캠프장으로 웅이를 데리러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구피는 회사 체육대회 참가로 늦게 끝난다고 했기에 저는 웅이와 남자들만의 불타는 금요일밤 치킨 파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 웅이의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간다고 하네요. 웅이를 데리러가기 위해 영화도 포기하고 일찍 집에 왔건만... 하긴 이제 웅이도 초등학생이 아닌 중학생이기에 엄마, 아빠와 함께 다니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다니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따지고보면 저도 중학생일때 그랬으니까요.
웅이는 과학캠프를 끝내고 집이 아닌 외할머니집을 선택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긴 집에 오면 저와 노느라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외할머니집에서 미리 공부를 하고 오는 것도 괜찮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웅이는 공부를 끝내고나서도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외할머니집에서 자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입니다. 웅이와 금요일밤 치킨파티를 하기위해 저녁식사도 굶고 기다렸는데... 그제서야 혼자 닭다리를 뜯고 생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저는 웅이를 향한 배신감에 부르르 떨었습니다.
체육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구피는 그런 제 모습을 보며 어이없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웅이는 제게 달려와 "아빠, 삐치지 마세요."하며 안깁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웅이가 크면 클수록 웅이에게 배신감을 느낄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숙명아닐까요? 웅이는 점점 엄마, 아빠를 필요로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면 그럴수록 저와 구피는 배신감을 느끼겠죠.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섭섭한 감정을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기생, 배신감에 부르르 떨다.
그러고보니 웅이에게 처음으로 배신감을 느낀 그날, 제가 본 영화 [해어화]도 배신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1943년 일제강점기. 경성 제일의 기생 학교 '대성권번'에서 둘도 없는 단짝 친구인 소율(한효주)과 연희(천우희)는 선생 산월(장영남)의 교육 아래 예인으로 성장하고, 그 중 소율은 어린 나이에 정가의 명인이 됩니다. 정가란 가곡, 가사, 시조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정통 가곡이라고 하네요.
문제는 소율과 연희 앞에 조선 제일의 대중음악 작곡가인 윤우(유연석)가 끼어들었다는 점입니다. 윤우와 사랑하는 관계인 소율은 윤우와의 결혼을 꿈꾸고, 윤우는 상처받은 조선의 민중들을 어루만질 수 있는 노래 ' 조선의 마음'을 부를 가수로 연희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결국 윤우와 연희는 사랑하는 관계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동시에 배신을 당한 소율은 복수를 꿈꿉니다.
이렇듯 [해어화]의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너무나도 뻔한 유행곡 가사와도 같습니다. 게다가 소율의 복수도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당시 최고의 권력가인 조선총독부 경무국장(박성웅)의 애첩이 되어 권력을 움켜잡고, 윤우와 연희의 사랑을 가로막습니다. 하지만 복수를 하는 자도, 복수를 당하는 자도, 결국 마지막에 웃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어화]는 철저한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만약 단순하게 스토리 라인만을 뒤쫓으며 [해어화]를 감상한다면 이 영화는 영락없는 3류 멜로 드라마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랑, 배신, 복수라는 흔한 패턴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해어화]는 3류 멜로 드라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진한 여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아픔과 정가와 40년대 유행곡으로 이루어진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 덕분입니다.
먼저 저는 일제강점 후기라는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신의 한수라고 생각합니다. 소율은 윤우와 연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권력을 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망이 얼마남지 않은 일제강점 후기이기에 소율의 선택은 결국 그녀에게도 화살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그렇게 그녀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그녀 자신도 복수의 칼날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일제강점 후기라는 시대적 배경은 급변하는 시대라는 또다른 이야기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율이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을 위한 정가를 부르는 예인이라면, 연희는 민중의 가슴을 울리는 대중음악을 부르는 가수입니다. 결국 소율은 옛것, 연희는 새로운 것을 대변하는 캐릭터인데, 그러한 소율과 연희의 서로 다른 가치관은 결국 친구였던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소율은 왜 윤우의 뮤즈가 될 수 없었나?
[해어화]는 단순히 남녀의 삼각관계와 복수의 드라마를 그린 영화는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던대로 소율은 옛것을 대변하는 캐릭터이고, 연희는 새로운 것을 대변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윤우가 연희에게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입니다. 조선의 신분제가 무너지고, 일제강점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민중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싶었던 윤우에겐 옛것이 아닌, 새로운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윤우의 선택은 영화에서 아주 세밀하게 묘사됩니다. 처음 윤우는 소율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불러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소율은 "난 정가가 좋아요."라며 윤우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그녀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와 달리 연희는 윤우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라는 윤우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들어줍니다. 연희는 소율과는 달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정가와 대중가요는 창법에서부터 모든 것이 다릅니다. 일반인들에게 정가는 낯설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쉽게 표현하자면 판소리의 명인에게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제 아무리 정가의 명인인 소율이라고해도 윤우가 원하는 대중가요를 잘 부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윤우는 소율이 아닌 연희를 선택했고, 그것은 두 사람 관계의 균열을 가져다줍니다.
박흥식 감독은 윤우의 마음이 소율에게서 연희로 바뀌는 장면도 무리없이 연출해냅니다. 그를 위해서 소율과 연희가 같은 무대에서 '봄 아가씨'를 부르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그때 윤우의 시선은 소율에서 서서히 연희로 옮겨집니다. 그렇게 윤우는 자신의 뮤즈인 연희에게 빠져들고, 소율은 사랑과 우정에게 동시에 배신을 당하고맙니다.그리고 결국 그녀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이죠.
이쯤되면 관객 입장에서 소율이 피해자이고, 윤우와 연희는 가해자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엔 가해자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급변하는 시대에 희생되는 피해자여야만합니다. 박흥식 감독은 이 난제도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로 해결합니다. 바로 극중 윤우가 작곡한 '조선의 마음'이 해결책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연희가 '조선의 마음'을 부르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마음'을 부르는 자신의 뮤즈, 연희에서 빠져드는 윤우처럼...
윤우와 연희를 향한 소율의 복수는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도를 넘어섭니다. 이렇게되면 이번엔 소율이 악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 또한 노래로 해결되는데, 사건의 내막을 알고 달려온 윤우 앞에서 '사랑 거즛말이'를 부르는 소율의 모습은 악녀가 아닌, 믿었던 사랑에 배신당한 가녀린 여성이었습니다.
유행곡 가사같아서 더욱 애틋한 영화
이렇게 [해어화]는 음악을 통해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해냅니다. 윤우의 변심은 소율과 연희가 함께 부르는 '봄 아가씨'로, 연희의 매력은 '조선의 마음'으로, 소율에 대한 동정은 '사랑 거즛말이'를 통해 긴 설명없이 해결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음악 영화의 힘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저는 집으로 돌아와 [해어화]의 OST를 반복해서 들을 정도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음악의 힘은 컸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해어화]는 유행곡 가사와도 같은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입니다. 1940년대 당시의 문화는 양반, 혹은 권력자들이 즐기는 고급문화에서, 핍박받고 고통받던 서민들의 희노애락을 어루만질 수 있는 대중문화로 변모하고 있었던 시절이었고, 그렇기에 그러한 급변하는 시대를 대변하는 소율, 연희, 윤우는 유행곡 가사와도 같은 사랑, 배신, 이별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해어화]에서 산월은 유행곡을 경시하는 발언을 합니다. 유행이 지나고나면 잊혀지는 그런 싸구려 문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화를 느긋하게 즐길 여유가 없는 서민들에게는 순간 순간 즐길 수 있는 유행과 같은 대중문화가 더 큰 위안이 됩니다. 제게 클래식 음악보다 대중가수의 노래가 더 듣기 편하듯이 말입니다.
저는 [해어화]가 유행곡 가사와도 같은 영화이기에 더욱 애틋했습니다. 민중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싶었던 윤우의 꿈도, 노래가 너무 부르고 싶었던 연희의 바람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친한 친구에게 동시에 배신당한 소율의 복수도, 유행곡 가사처럼 그 시절의 상황에 맞물리며 제게 깊은 여운을 줬습니다.
영화 후반, 나이가 들은 소율은 방송국에서 자신이 녹음했던 윤우가 작곡을 해준 '사랑 거즛말이'를 듣게됩니다. 윤우의 배신을 원망하며 그 앞에서 불렀던 '사랑 거즛말이'와 영화 후반에 나이가 지긋이 들은 소율 앞에서 조용히 울려퍼지는 '사랑 거즛말이'는 사같은 듯 서로 달랐습니다. '사랑 거즛말이'는 정가와 대중음악의 묘한 결합이 돋보이는 곡인데, 영화 속 PD가 소율의 다른 음악은 연희의 아류작 같아서 별로인데 이 음악만큼은 다르게 느껴진다는 평에 저도 공감을 했습니다.
하지만 구피는 '사랑 거즛말이'를 듣더니 "별론데?"라고 말합니다. 하긴 [해어화]를 보고, 이 노래에 얽힌 사연을 알지 못한다면 '사랑 거즛말이'에 담겨진 애틋함을 느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대중 문화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이별 노래를 들으면 모두 내 이야기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듯이, 대중 문화라는 것은 결국 공감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 면에서 [해어화]는 윤우와 연희, 그리고 소율의 마음이 공감되어 제겐 깊은 여운을 남겨준 영화입니다.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랑은 거짓말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윤우의 변심도, 연희의 바람도, 소율의 복수도 공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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