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6년 영화이야기

[시간이탈자] - 스릴러적 완성도는 낮지만, 멜로적 여운은 깊다.

쭈니-1 2016. 4. 28. 13:50

 

 

감독 : 곽재용

주연 : 이진욱, 조정석, 임수정

개봉 : 2016년 4월 13일

관람 : 2016년 4월 26일

등급 : 15세 관람가

 

 

무의미했던 과거의 시간이 중요해지고, 간절해지는 순간

 

원래 은행 업무는 저희 부서 여직원의 일이지만 그날은 별 이유없이 제가 은행 업무를 보고 왔습니다. 은행 업무를 무사히 끝내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 그런데 길거리에서 만난 낯선 남자가 다짜고짜 저를 멈춰 세웁니다. 처음엔 '도를 아십니까?'인줄 알고 경계를 했는데 알고보니 제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의 말로는 고등학교 시절 우리가 꽤 친했다고하지만 솔직히 저는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하긴 벌써 27년전 일이니 말입니다. 제가 기억을 하지 못하자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기억 안나? 너희 집에서 짜장면시켜 먹으며 같이 장 끌로드 반담 나오는 영화봤었잖아."라며 옛 추억을 꺼내들던 그는 나중에 소주나 한잔하자며 자리를 떴습니다. 그는 저희 회사에서 가까운 식자재 유통마트의 제육코너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저도 몇번 들렀던 곳이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여러번 마주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를 기억못했고, 그도 긴가민가하다가 이번에야 제게 말을 걸어온 것이죠.

이렇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고나니 그동안 잊고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저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길 바라던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에 상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었습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도 별로 없었고, 졸업을 하고나서도 취업이 되지 않아서 고등학교 시절은 제게 절망만 안겨줬을 뿐, 좋았던 추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기억해주는 친구가 있었네요.

 

시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신기합니다. 솔직히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1989년부터 1991년, 3년간은 지금까지 제게 그다지 기억에 남는,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그와 술약속을 한 후 헤어지고나니 문득 그 시절의 제 모습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집으로 돌아가 학창시절 빛바랜 사진첩이라도 펼쳐봐야할 것입니다.

[시간이탈자]는 지금의 저처럼 무의미했던 지난 시간이 갑자기 중요해지고, 간절해진 강력계 형사 건우(이진욱)의 이야기입니다. 2015년 1월 1일 뒤쫓던 범인의 총에 맞아 쓰러진 건우는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꿈을 통해 1983년의 고등학교 음악교사 지환(조정석)의 일상을 보게 됩니다. 사연인즉 이러합니다. 지환 역시 1983년 1월 1일에 강도를 만나 칼에 찔러 의식을 잃었던 것입니다. 결국 건우와 지환은 32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병원에서 같은 심장충격기로 목숨을 건진것이죠. 그리고 지환 역시 꿈을 통해 건우의 일상을 보게 됩니다.

만약 건우에게 그날의 사건이 없었다면 1983년이라는 시간은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나간 시간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1983년에 벌어진 지환의 약혼녀인 윤정(임수정)의 살인사건은 수많은 미제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983년을 사는 지환의 일상을 보게 됨으로써 그에게 1983년은 현재의 시간보다 훨씬 중요한 시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바꿀 수가 없다? 아니 바꿀 수 있다.

 

1983년을 사는 남자 지환과 2015년을 사는 남자 건우. 이 두 사람은 꿈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환은 건우를 통해 윤정이 살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이를 막기 위해 윤정을 살해한 범인으로 알려진 형철(정웅인)을 뒤쫓는 지환. 하지만 그러한 지환의 행동이 오히려 윤정의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시간을 소재로한 영화는 크게 두가지 전개를 보여줍니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은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설정과 주인공의 활약으로 과거의 사건을 바꿈으로써 현재를 바꾸는 설정이 그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은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설정으로 대표적인 영화가 [터미네이터]입니다. 인류의 지도자인 존 코너의 탄생을 막기 위해 기계들은 1984년으로 암살로봇 '터미네이터'(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보내고, '터미네이터'를 막기 위해 인간들은 카일 리스(마이클 빈)를 보냅니다. 그리고 카일 리스와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은 결국 사랑에 빠져 존 코너를 낳습니다. 만약 기계들이 '터미네이터'를 1984년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카일 리스와 사라 코너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존 코너 또한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과거의 사건은 아무리 바꾸려해도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죠.

과거의 사건을 바꿈으로써 현재를 바꾸는 설정으로 대표적인 영화는 [빽 투 더 퓨쳐]입니다. 괴짜 발명가 브라운 박사(크리스토퍼 로이드)의 타임머신 드로리안을 타고 1955년으로 가게된 마티 맥플라이(마이클 J. 폭스)는 당시 젊었던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게 되고, 얼떨결에 두 사람의 만남을 방해하는 바람에 자신이 태어나지 못할 기막힌 상황에 처합니다. 하지만 마티는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어머니를 연결시켜주고, 그렇게 바뀐 과거는 현재도 바꾸어놓습니다. [빽 투 더 퓨처]는 3편까지 제작되어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닌,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탈자]는 어떤 전개를 선택했을까요? 영화의 초반엔 윤정의 죽음을 통해 [터미네이터]와 같은 과거의 사건은 절대 바꿀 수 없다라는 설정을 선택한 듯했습니다. 만약 지환이 형철을 뒤쫓지 않았다면 윤정은 형철과 부딪혀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윤정이 형철과 부딪혀 넘어지지 않았다면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며, 공중화장실에서 살해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결국 지환이 건우를 통해 윤정의 살해사건 기사를 본 탓에 윤정은 예정된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하지만 윤정의 죽음 이후 [시간이탈자]는 [빽 투 더 퓨쳐]와 같은 과거의 사건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라는 설정으로 선회합니다. 비록 지환은 윤정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지만, 윤정의 반 아이들을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고간 학교강당 화제사건은 막아냅니다. 이렇게 지환으로 인하여 과거가 바뀌며 2015년을 살고 있는 건우의 현재도 바뀝니다. 

사실 [시간이탈자]를 보기전, 저는 윤정의 죽음을 막기 위한 1983년의 남자 지환과 2015년의 남자 건우의 활약이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일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영화 초반에 윤정이 죽음을 맞이하며 영화는 범인찾기에 몰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릴러 영화에 익숙하지 못한 곽재용 감독이 범인을 너무 쉽게 노출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진범의 첫 등장장면을 보자마자 구피에게 귓속말로 "저 사람이 진범이다."라고 말해줬고, 제 농담과도 같은 예언은 영화 후반부에 진실임이 밝혀졌습니다.

 

 

스릴러적 완성도는 낮지만, 멜로적 여운은 깊다.

 

[시간이탈자]를 연출한 곽재용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와 같은 멜로 영화들이 주로 눈에 띕니다. 특히 그의 특기는 전통멜로가 아닌 퓨전멜로입니다. 곽재용 감독의 최고 흥행작인 [엽기적인 그녀]만 보더라도 '엽기적인 그녀'(전지현)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견우(차태현)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두 사람의 사랑을 바탕으로한 멜로영화입니다. 

[시간이탈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의 외형은 분명 스릴러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재미는 스릴러가 아닌 멜로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대로 저는 진범의 첫 등장부터 그가 범인임을 눈치챘습니다. 그것은 제가 결코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느슨한 스릴러 영화들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진범들을 숨겨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범인의 범행동기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저 두리뭉실하게 그가 사이코패스라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범인과 지환의 마지막 대결은 스릴러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공포영화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범행동기를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범인의 모습은 곽재용 감독이 얼마나 스릴러 영화에 미숙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탈자]를 멜로영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영화적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영화의 초반 윤정의 죽음으로 지환과 윤정의 사랑 이야기는 더이상 진행이 불가능했지만, 2015년에 윤정과 똑같이 생긴 소은(임수정)이 건우 앞에 나타남으로써 새로운 멜로 라인이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어떻게 2015년의 소은과 1983년의 윤정이 똑같이 생겼는지에 대한 의문인데, 이러한 문제 또한 영화 초반 윤정의 대사로 간단하게 처리합니다.

[시간이탈자]의 스릴러적 요소에 대해서는 미숙함으로 보여주던 곽재용 감독은 이렇게 멜로적 요소에서는 능수능란한 노련함을 과시합니다. 소은의 등장은 [시간이탈자]의 영화적 재미에 활력을 불어놓습니다. 이미 사랑하는 윤정의 죽음으로 범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지환의 이야기는 스릴러적 요소의 미숙함 때문에 약간 느슨해진 반면, 32년전 윤정을 죽인 범인으로 의심되는 괴한에게 납치된 소은을 찾아야하는 건우의 간절함은 느슨해진 영화의 분위기를 다시 팽팽하게 조입니다.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반장(정진영)의 등장은 영화의 양념 역할을 하는데, 그들은 모두 32년전 윤정을 죽인 범인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진범을 잡음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합니다. 이렇게 [시간이탈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하는 이들의 간절하고 애틋한 멜로영화로써의 재미를 갖춰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곽재용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다.

 

1989년 [비오는 날의 수채화]로 데뷔한 곽재용 감독은 벌써 데뷔 27년차 베테랑 감독입니다. 그가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영화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흥행작을 만들어냈기 때문이고, 꾸준히 흥행작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영화적 감각이 관객에게 먹혀들어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 [비오는 날의 수채화]만 보더라도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당시 젊은 영화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엽기적인 그녀]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2001년 당시는 인터넷이 새로운 문화로 급성장하던 때였고, 곽재용 감독은 발 빠르게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하여 통통 튀는 멜로 코미디 [엽기적인 그녀]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국 곽재용 감독 영화의 역사는 저와 같은 40대와 함께 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 제 친구 중에서는 자신의 인생의 영화가 곽재용 감독의 2003년작 [클래식]이라고 자신있게 선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곽재용 감독의 영화에 특별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의붓 남매간의 금지된 비극적 사랑이라는 영화의 내용보다는 김현식, 신형원, 권인하, 강인원이 참가한 영화의 OST에 더 열광했고, [엽기적인 그녀]의 경우는 영화를 보며 많이 웃긴 했지만 영화가 원작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클래식]도 마찬가지인데, 1968년의 준하(조승우), 주희(손예진)의 사랑과 현재의 상민(조인성), 지혜(손예진)의 사랑을 통해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의 감성을 보여준 [클래식]. 하지만 저는 이 영화의 설정이 너무 진부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러한 탓에 한때는 이 영화를 인생의 영화로 꼽는 친구와 한바탕 언쟁을 벌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시간이탈자]는 [클래식]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임수정이 1인 2역을 한 [시간이탈자]와 손예진이 1인 2역을 한 [클래식], 과거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과거의 비극을 토대로 현재의 사랑을 연결시키는 방식까지... 단지 [클래식]은 정통 멜로영화이고, [시간이탈자]는 스릴러와 멜로를 결합시킨 퓨전 멜로영화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차이가 [클래식]은 너무 진부한 멜로영화로 제게 받아들여졌고, [시간이탈자]는 새로운 멜로영화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시간이탈자]를 본 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곽재용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많은 분들이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멜로영화의 레전드로 받아들이고, [엽기적인 그녀]를 곽재용 감독의 최고 영화라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고, 제 친구처럼 [클래식]을 인생의 영화라고 칭송해도, 저는 그들 영화보다 [시간이탈자]가 더 좋았습니다. 스릴러영화로써의 완성도는 낮았지만 멜로영화로써의 여운은 깊었고, 과거가 바뀜으로써 뒤바뀐 현재의 마지막 장면도 좋았습니다. 어쩌면 구피와 오랜만의 영화 나들이였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구피의 반응은 "영화가 너무 소름끼치게 무서웠어."였답니다. 역시 사람마다 영화를 받아들이는 감성은 전부 다른가봅니다. ^^

  

[시간이탈자]는 두개의 시간으로 나눠서

과거의 시간엔 비극적 사랑의 여운을,

현재의 시간엔 해피엔딩으로인한 행복한 결말을 선사한다.

비극적 사랑과 행복한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는 영리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