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조성희
주연 : 이제훈, 김성균, 박근형, 노정의, 김하나, 고아라
개봉 : 2016년 5월 4일
관람 : 2016년 5월 11일
등급 : 15세 관람가
의적 '홍길동'이 아닌, 탐정 '홍길동'
가정의 달인 5월, 우리나라의 극장가는 할리우드의 슈퍼 히어로 영화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다른 영화들이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를 피해 개봉일을 조정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러한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 맞짱을 뜨겠다며 겁없이 덤벼든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입니다.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우리나라 전통의 슈퍼 히어로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입니다. '홍길동'은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미 수도 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TV 드라마에서는 김석훈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1998년작 <홍길동>과 강지환이 '홍길동'으로 출연했던 2008년작 <쾌도 홍길동>이 있고, 비디오용 영화로는 1987년 김청기 감독, 심형래 주연으로 제작된 <슈퍼 홍길동>이 있습니다. 특히 <슈퍼 홍길동>의 경우는 심형래에 이어 코미디언 김정식을 내세워 무려 7편까지 제작되었었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신동헌 화백의 1967년 흑백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1995년 컬러 애니메이션 [돌아온 영웅 홍길동], 그리고 2011년에 개봉했던 3D 애니메이션 [홍길동 2084]가 있습니다. 영화로도 꽤 많이 만들어졌는데, 가장 최근 작은 2009년 [홍길동의 후예]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경우는 정통 '홍길동' 영화라기 보다는 우리나라의 대표 의적 '홍길동'의 이미지만을 차용한 조금은 변칙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쯤되면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의 개봉 소식을 듣고 "또 '홍길동'이야?"라는 의문이 들법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 앞에 붙여진 '탐정'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합니다. 왜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이 아닌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은 탐정이 아닌 의적인데 말이죠. 차라리 제목이 '의적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이라면 이해가 될텐데 말입니다.
저는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의 영화정보를 보고 가장 먼저 [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이 떠올랐습니다. 조선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조금은 엉뚱한 명탐정(김명민)이 고위 관리층의 비리를 밝혀내는 내용을 담은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해서 2015년 2편인 [조선명탐정 : 사라진 놉의 딸]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의 직업(?)이 탐정이라는 점도 같고, 영화에서 여배우를 활용하는 방법도 비슷합니다. [조선명탐정 시리즈]의 경우는 1편에서는 한지민을, 2편에서는 이연희를 베일에 휩싸인 의문의 여성 캐릭터로 활용했고,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 역시 고아라의 기존 이미지를 깨뜨리고 '홍길동'(이제훈)의 든든한 후원자 황회장 역으로 캐스팅하였습니다.
할리우드의 거대한 자본력이 투자된 미국을 상징하는 슈퍼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에 당당하게 맞선 우리나라의 토속 히어로 '홍길동'. 하지만 스스로 히어로가 아닌 '탐정'이라고 밝힌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요?
만화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듯한 영상과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를 본 이후 또다시 한동안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못했던 저는 무려 11일만에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을 봤습니다. 사실 [조선명탐정 시리즈]처럼 적당히 코믹하고 적당히 짜임새가 있는 추리극을 기대했는데, 막상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제가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제가 기대했던 것처럼 적당히 코믹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코믹은 주인공인 '홍길동'이 아닌, '홍길동'이 얼떨결에 동행하게된 원수의 핏줄인 동이(노정의)와 말순(김하나)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짜임새가 있는 추리극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추리극은 영화의 주요 뼈대가 아닌 그저 '홍길동'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코믹 스릴러 장르였던 [조선 명탐정 시리즈]와는 달리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액션영화에 가깝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재미는 만화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듯한 영상과 캐릭터입니다. 솔직히 영화의 초반에는 '홍길동'의 과거와 어머니를 죽인 원수인 김병덕(박근형)에 대한 복수극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보느라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말순이가 '홍길동'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귀엽고 웃겨서 제 시선은 온통 말순이에게 향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영화 중반부에 강성일(김성균)이 등장하면서 그제서야 저는 이 영화가 [씬 시티]와 굉장히 많이 닮아 있다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2005년작인 [씬 시티]는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 만화와 영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허문 당시로써는 굉장히 획기적인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을 보고 있으면 그러한 [씬 시티]가 떠오른 것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씬 시티]처럼 주인공의 독백으로 영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흑백화면을 연상시키는 약간은 어두운 듯한 영화의 화면과 황량한 마을의 배경 또한 [씬 시티]와 닮아 있었습니다. 특히 무표정한 얼굴로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지닌 강성일의 존재는 [씬 시티]의 무시무시한 킬러 케빈(일라이저 우드)를 연상시켰습니다. 결정적으로 영화의 후반 강성일의 안경알이 하얗게 보이는 장면은 [씬 시티]에 대한 오마쥬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에서 [씬 시티]를 발견할만큼 이 영화는 만화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듯한 영상과 캐릭터로 제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재미를 안겨줬습니다. 특히 '홍길동'이 맞서 싸워야하는 광은회의 본거지로 통하는 비밀 통로의 위용과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막무가내식 총격씬은 너무 비현실적이기에 오히려 새로웠습니다. (이후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홍길동'의 복수, 나무가 아닌 숲으로 향하다.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기본적으로 '홍길동'의 복수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김병덕에게 죽임을 당하는모습을 지켜본 후 그 충격으로 부분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립니다. 그후 선한 사람들을 돕는 비밀스러운 집단 활빈당에 들어가 사건해결률 99%를 자랑하는 악당보다 더 악명높은 탐정이 되지만 여전히 어머니를 죽인 원수 김병덕을 찾아 헤맵니다.
영화의 시작은 드디어 김병덕의 은신처를 알아낸 '홍길동'이 김병덕을 찾아 강원도의 산골마을로 향하면서부터입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김병덕을 놓치고, 대신 김병덕의 두 손녀인 동이, 말순만 떠맡게 됩니다. 동이와 말순은 '홍길동'이 할아버지인 김병덕을 죽이러 왔다는 사실도 모른채 할아버지를 찾아달라며 껌딱지처럼 졸졸 쫓아다닙니다. 처음 '홍길동'은 그러한 동이와 말순이 귀찮고 짜증이 났지만 점차 정이 들고, 그러한 동이와 말순이 때문에 결국 20년동안 기다려온 김병덕에 대한 복수를 주저하게됩니다.
그러한 '홍길동'의 앞에 의문의 사나이 강성일이 나타난 것이죠. '홍길동'에 앞서 김병덕을 납치한 강성일은 '홍길동'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홍길동'의 과거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이 죽음이라는 끔찍한 과거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기억을 지웠던 '홍길동'. 하지만 강성일과 맞서 싸우려면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아야만합니다.
결국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과거의 실체를 똑바로 봄으로써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된 '홍길동'의 성장담이기도합니다. 그동안 '홍길동'은 어머니를 죽인 범인 김병덕에게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간 광신적 종교집단 광은회라는 큰 숲은 보지 못하고 김병덕이라는 나무 하나만 본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홍길동'은 동이, 말순과 우정을 쌓고, 과거에 대한 실체에 한걸음씩 다가가며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된 것이죠. 어머니를 죽인 것은 김병덕이 맞지만, 김병덕이 어머니를 죽이도록 강요한 것은 광은회이니 '홍길동'의 진짜 원수는 김병덕이 아닌 광은회인 셈입니다. 이렇게 나무가 아닌 숲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홍길동'은 본격적으로 광은회의 음모를 막으며 진정한 복수를 시작합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광은회라는 숲 전체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시리즈화를 염두에 둔 포석이지는, 아니면 광은회에 실체에 대해서는 관객 스스로의 상상에 맞기려는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홍길동'은 광은회라는 한반도 전체를 감싼 거대한 암흑의 숲에 한걸음 다가섰을 뿐입니다. 숲에 들어가 정상까지 정복하려면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어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2편 제작이 필수로 보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에 대해서도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왜 이 영화가 '홍길동'을 차용했으면서 조선시대가 아닌 80년대를 배경으로 했는가? 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편이 더 어울렸을 것입니다. 만약 사극에 대한 제작비 부담 때문이라면 깔끔하게 현대를 배경으로해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도 저도 아닌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80년대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입니다. 1980년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1988년까지 장기 집권을 했었습니다. 특히 그가 1981년 제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신군부의 집권를 규탄하던 시민을 학살한 5.18 민주화 운동 때문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5.18 민주화 운동이 북한 공산당에 의한 음모라고 선전했고, 당시 언론을 장악한 군사독재 정권 때문에 사실을 알지 못한 국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전두환 정권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그러한 전두환 정권의 탄생 비화는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에서 광은회의 음모와 비슷합니다. 광은회는 공포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펼치고, 강원도의 작은 마을을 대상으로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학살함으로써 대한민국을 공포에 몰아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속 강원도의 작은 마을은 광주를 연상시켰고, 광은회라는 광신도 집단은 전두환 정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하나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결국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홍길동'이라는 고전의 영웅을 80년대로 소환하여,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사건 중 하나인 1980년 광주의 슬픔을 속시원하게 해결하게끔 만든 영화입니다. [늑대소년]을 통해 한국형 판타지 멜로 영화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 조성희 감독은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을 통해 우리나라의 아픈 근현대사를 판타지로 어루만져준 셈입니다.
홍길동'의 복수극이라는 눈에 보이는 작은 나무를 통해 우리나라의 아픈 근현대사를 어우르는 큰 숲을 완성한 조성희 감독의 연출력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이렇게 만화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듯한 영상과 캐릭터, 그리고 1980년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판타지로 어루만지는 세심함이 덧붙여지며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저를 만족시켜준 영화입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특히 '홍길동'의 든든한 후원자인 황회장 역의 고아라 분량이 적어 굳이 황회장이라는 캐릭터가 필요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2편이 만들어진다면 황회장 캐릭터가 좀 더 매력적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해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이 흥행에서 좀 더 힘을 내야겠죠?
우리의 좁은 시야는 숲보다는 나무를 보기가 더 쉽고 편리하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시야로 나무가 아닌 숲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그리고 외면했던 진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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