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토마스 맥카시
주연 : 마이클 키튼, 마크 러팔로, 레이첼 맥아담스, 리브 슈라이버
개봉 : 2016년 2월 24일
관람 : 2016년 2월 26일
등급 : 15세 관람가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수상결과를 보고 깜짝 놀랬다.
삼일절 휴일을 하루 앞둔 2월 29일 밤, 저희 가족은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기 위해 옹기종기 TV앞에 모여 앉았습니다. 사실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29일 낮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지만, 회사에서 일을 해야하는 관계로 생방송 중계는 보지 못하고 수상 결과만 잠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퇴근 후 재방송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저희 가족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을 다 같이 모여 앉아 본 이유는 외국어영화상 시상자로 참석한 이병헌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국내에서는 스캔들로 명성에 타격을 입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배우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가한다고 하니 관심이 가더군요. 솔직히 이병헌이 시상자로 나오는 모습만 보고 채널을 돌리려 했는데 외국어영화상 시상이 아카데미 시상식 후반부에 이뤄져 결국 끝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이병헌을 보고나니 그 다음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때의 표정을 직접 보고 싶어졌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1994년 [길버트 그레이프]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에비에이터], [블러드 다이아몬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로 매번 후보에만 올랐을 뿐, 수상에는 실패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결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발표 순간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처음엔 이병헌을 보기 위해, 이병헌을 본 다음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보기 위해 저희 가족은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했습니다. 초반에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가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이변의 주인공이 되었고, 시각효과상에 다른 쟁쟁한 블록버스터를 물리치고 저예산 SF영화 [엑스 마키나]가 수상한 것으로 올해 아카데미의 이변이라 할만합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역시 [스포트라이트]가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의외의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강력한 수상 후보인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경우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이미 [버드맨]으로 제87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기에 어쩌면 이번에는 수상이 안될것이라 예상을 하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작품상을 가져갈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스포트라이트]를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 전인 지난 금요일에 봤습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단지 시간대가 딱 맞아 떨어진 영화가 [스포트라이트] 뿐이어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봤을 뿐입니다. [스포트라이트]는 2002년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을 폭로한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의 실화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본 후 분명 잘 만든 영화라는 느낌은 받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충격적인 소재와는 달리 영화가 너무 잔잔해서 큰 임팩트는 부족했던 영화입니다.
모두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모르는척 해야 했던 이유
보스턴 글로브의 편집장으로 새롭게 부임한 마티 배런(리브 슈라이버)은 지역 교구 신부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심층 취재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 팀의 팀장 월터 로빈슨(마이클 키튼)은 그러한 편집장의 지시에 시큰둥합니다. 이미 피해자와 합의를 본 사건이고, 유난히 가톨릭 신도가 많은 보스턴에서 괜히 가톨릭 교회의 곪은 곳을 취재했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원 감축 등의 소문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월터 로빈슨과 그의 팀은 일단 편집장의 지시를 따르기로 합니다. 그런데 '스포트라이트'팀이 사건을 취재하면 할수록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행 사건은 오랜 세월동안 광범위하게 이뤄졌고, 가톨릭 교회도 그러한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던 것입니다. 보스턴에서만 90명에 달하는 사제들이 아동 성추행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스포트라이트' 팀은 경악하고 맙니다.
[스포트라이트]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세밀하게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아동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피해자의 담당 변호사를 만나고, 가해자인 사제를 찾아가고, 가해자들의 변호사를 만나 진실을 캐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니 한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이 엄청난 사실이 어떻게 수십년간 은폐될수 있었던 것일까요?
영화 속의 한 피해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성직자에게 당하는 것은 신체적 학대를 넘어 영적인 학대라며, 피해자들은 믿음까지 빼앗기게 된다고...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이 수십년간 은폐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제들은 부모의 관심이 절실하게 필요한 불우한 가정의 어린 남자아이들을 성추행 대상으로 점찍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죠.
부모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불우한 가정의 어린 남자아이들은 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제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남자아이가 사제를 의지하면 할수록 성추행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당한 피해자들은 이제 성인이 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그날의 기억에 아파하고 속앓이를 있었습니다.
피해자들은 너무 어렸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피해자들의 부모는 문제의 사제에게 적절한 조취를 취하겠다는 가톨릭 교회측의 말을 믿고 합의를 해줍니다. 기자들은 가톨릭 교회를 건드리는 것이 껄끄러워 입을 닫았고, 지역 사회 또한 가톨릭 교회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이 문제를 쉬쉬하기에 급급합니다. 이렇게 수십년 동안 수십건의 아동 성추행 사건은 조용히 파묻혀 버린 것입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당할 수도 있었다.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하던 '스포트라이트'의 기자 마이크 레젠데스(마크 러팔로)는 분노에 치를 떨며 외칩니다. "당신의 아이가 당할 수도 있었고, 내 아이가 당할 수도 있었고, 누구든 당할 수 있었어요." 그렇습니다. 모두들 이 문제를 쉬쉬하며 덮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내 문제가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스턴의 어느 지역 인사는 월터 로빈슨에게 타지역 사람인 마티 배런의 말을 듣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서 보스턴 토박이인 우린 보스턴을 사랑하니 이 문제를 조용히 덮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의 아들이 그런 일을 당했어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너무나도 뻔뻔스럽게 그러한 이야기를 하자 월터 로빈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그들의 동조자였습니다. 오래전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 제보를 무시했던 월터 로빈슨. 그는 이제라도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합니다.
만약 가톨릭 교회가 처음부터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 노력했다면 어땠을까요? 처음 아동 성추행 사건을 저지른 사제를 중벌에 처하고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면 이렇게 문제가 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첫 단추를 잘못 맞추었고, 아동 성추행 사제들은 별다른 죄의식없이 똑같은 잘못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이젠 성인이 된 피해자들의 고통을 직접 확인한 '스포트라이트' 팀의 유일한 여기자 샤샤 파이퍼(레이첼 맥아담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할머니에게 자신이 취재한 이 사건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몰라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한순간의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문제를 덮은 가톨릭 교회의 결정이 이렇게 엄청난 재앙이 되어 되돌아온 것입니다.
영화의 후반부, 모든 외압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건의 진실을 터트리는 '스포트라이트' 팀.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한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 사람들은 에상대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가톨릭 신자들에 의한 부정적인 반향이 아닌, 숨기고 감추었던 상처를 드러낸 새로운 피해자들의 제보전화가 빗발친 것입니다. 진실을 밝힌 그들의 기사는 피해자들에게 위안이 되고, 상처를 보듬어준 것이죠.
[스포트라이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저널리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왜 가톨릭 교회를 건드려 지역 사회를 분열시키려 하냐며, "그런 것을 밝히는 것은 언론입니까?" 라는 어느 지역 인사의 공격에 마이크 레젠데스는 "그러면 이걸 밝히지 않으면 그게 언론입니까?"라고 반격합니다. 진실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 그것이 아무리 곪은 상처를 건드리는 것일지라도 그렇게해서 상처가 낫는다면 그것이 바로 언론이 해야할 일입니다.
실화를 사실 그대로 그려낸 것, 그것은 이 영화의 힘이다.
[스포트라이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아주 담담하게 영화를 그려냅니다. 보스턴에서만 90여명의 사제들이 수십년동안 아동 성추행을 해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자극적인 소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그러한 자극적인 소재에 매몰되지 않고 '스포트라이트' 팀의 활약에 초점을 맞춰 조용히 영화를 진행시켜나갑니다.
저는 영화를 보며 가톨릭 교회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스포트라이트' 팀을 압박하고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압박은 법원의 서류를 비공개로 해서 '스포트라이트' 팀이 열람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 외에는 특별히 없었습니다. 오히려 '스포트라이트' 팀의 팀장인 월터 로빈슨을 조용히 회유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추잡한 짓을 저지르고,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했기에 이보다 더 추잡하게 '스포트라이트' 팀을 방해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 예상이 틀린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 교회의 비리를 조사하는 '스포트라이트' 팀이 어떤 식으로든 위험에 빠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미국에 잠입한 소련 스파이를 변호한 제임스 도노반의 실화를 담은 [스파이 브릿지]에서 극우주의자들이 제임스 도노반의 집에 총알세례를 퍼부었던 것처럼 '스포트라이트' 팀도 가톨릭의 광신도에 의해 위험에 빠지는 장면이 한 장면정도는 나올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예상도 틀렸습니다.
만약 토마스 맥카시 감독이 [스포트라이트]를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게 만들으려 했다면 앞서 제가 예상했던 장면들은 어쩌면 필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영화적 재미보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했고, 그 결과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진실을 파헤치는 '스포트라이트' 팀의 활약을 아주 조용히 담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스포트라이트]가 제88회 아카데미 각본상과 작품상을 거머쥘 수 있었던 원동력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 영화가 '스포트라이트' 팀의 활약을 과정되게 표현하고 호들갑스럽게 그려냈다면 재미있는 스릴러 영화가 되었을지언정 잘만든 실화 영화는 될 수 없었을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조용한 스토리 진행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 압도당했고, 그렇기에 이 영화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응원했던 제겐 너무 조용했던 [스포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이 의외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한때 스펙타클한 대작에 작품상을 안겨주던 아카데미가 요근래에는 작지만 의미있는 영화를 선호했기에 [스포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수상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제게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임팩트가 너무 강했나봅니다. 암튼 [스포트라이트]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스포트라이트]에 대해서 바티칸 기관지가
"끔찍한 현실을 마주한 신앙인들의 충격과 깊은 고통을 대변하는데 성공했다."
라며 호평했다고 한다.
이렇게 가톨릭이 자신의 치부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고칠 의지를 보인다면,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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