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6년 영화이야기

[동주] - 암흑의 시대를 관통하는 아름다운 시(詩)의 힘

쭈니-1 2016. 3. 8. 10:30



감독 : 이준익

주연 : 강하늘, 박정민

개봉 : 2016년 2월 17일

관람 : 2016년 3월 1일

등급 : 12세 관람가



시인 윤동주와 함께한 삼일절


지난 화요일은 삼일절이었습니다. 직딩에게 있어서 불치의 병인 월요병을 단숨에 치유해주는 공휴일의 달콤함. 하지만 그날은 방 안에서 뒹굴거리며 그러한 달콤함을 즐기기엔 너무 뜻깊은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97년전인 1919년 3월 1일, 우리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며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에 알린 중요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구피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늦잠을 안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그날 웅이와 함께 삼일절 행사가 있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삼일절의 의미를 가슴깊이 되새기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꽃샘 추위 때문에 아쉽게 포기해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의 손에 끌려가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위안부 피해자의 실화를 다룬 영화 [귀향]도 보고 싶었지만 15세 관람가라서 구피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저희 가족의 삼일절은 [동주]를 보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웅이가 흑백영화인 [동주]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런지 걱정도 되었지만 그래도 삼일절인 만큼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에 찬란하게 빛나고 시리도록 아름다워 오히려 서글펐던 시를 썼던 시인 윤동주의 삶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 선택은 완벽하게 탁월했습니다. 저는 [동주]를 보며 제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애써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그 감동을 그대로 가슴에 안고 극장 근처 대형서점을 찾았습니다. 저희 가족이 대형서점에서 애타게 찾은 것은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습니다. [동주]를 보고나니 윤동주의 시가 너무나도 읽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저희 가족은 윤동주 시 낭송회를 가졌습니다. [동주]를 보기 전까지만해도 윤동주의 시는 <서시>와 <별 헤는 밤>밖에 몰랐는데, [동주]를 보면서 <자화상>이라는 시가 제 가슴을 너무나도 아프게 했습니다.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미워하고, 가여워하고, 그리워해야 했던 윤동주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화상>을 낭송했습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구피는 [동주]에서 <쉽게 씌어진 시>가 가장 가슴 아팠다고 합니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단지 시를 쓰고 싶었던 윤동주의 심정이 너무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피를 위해 웅이는 <쉽게 씌어진 시>를 또박 또박 낭송했습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게 저희 가족의 윤동주 시 낭송회는 며칠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송몽규를 만나다.


사실 저는 [동주]가 윤동주(강하늘)만을 위한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주]의 초반은 제 생각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윤동주보다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해도 이름조차 생소했던 송몽규(박정민)를 더 매력적으로 그려냅니다. 내성적이고 얌전한 문학소년 윤동주와는 달리 송몽규는 젊은 치기와 활발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한집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동갑내기 사춘지간이지만 모든 면에서 윤동주에게는 형처럼 느껴지는 존재입니다. (실제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났다고합니다.) 송몽규는 1935년 1월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당선작으로 선정되는 등 문학적으로 뛰어났고, 그해 4월에는 난징으로 건나가 김구가 광복군의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한 한인특별반에 2기생으로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등 거침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와는 달리 내성적인 윤동주는 항상 송몽규와 비교당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에게 송몽규는 평생의 라이벌이며, 넘을 수 없는 산이고,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가 되기를 바라며 시인의 길을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윤동주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보듬어준 것 역시 송몽규였습니다.

[동주]는 윤동주의 삶에 집중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송몽규의 캐릭터를 생략합니다. 윤동주가 고향에서 얌전히 공부를 하는 동안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합니다. 하지만 [동주]에서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일본 경찰에 잡혀 심하게 고문을 받은 후 윤동주와의 면회에서 멋쩍은 웃음을 짓는 모습 뿐입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한 송몽규와는 달리 교토제국대학에 떨어지고 어쩔 수없이 도쿄의 릿쿄대학에 입학한 윤동주. 일본에서 묵묵히 학업에 열중하는 윤동주와는 달리 송몽규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모종의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 송몽규의 활약상은 [동주]에서 상세하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윤동주가 나도 함께 하겠다고 말하자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든다."라며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듯 윤동주를 설득하는 송몽규. 만약 이 영화의 주인공이 윤동주가 아닌 송몽규였다면 오히려 젊은 독립투사의 영웅적이지만 비극적인 활약을 담은 좀 더 흥행성을 두루 갖춘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요? 영화를 보며 송몽규의 삶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만큼 [동주]에서 송몽규는 매력적이었습니다.   



암울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던 순수 청년


물론 송몽규가 매력적이었다고 해서 윤동주의 삶이 감동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단지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시.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는 아름다운 시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이름도, 언어도, 순수한 꿈마저 빼앗긴 그 시절에는 한글로 시를 쓰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윤동주는 좌절합니다. 그리고 결국 송몽규와 함께 1943년 7월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고, 1945년 2월, 스물여덟살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독립하기 불과 6개월 전입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구피는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만약 윤동주가 더 오랫동안 살았다면 아름다운 시를 얼마나 많이 남겼을까?'

[동주]는 윤동주가 좌절하고 죽어가는 가운데에서도 그의 아름다운 시가 조용히 낭송됩니다. 특히 윤동주가 차디찬 감옥에서 결국 옥사하는 장면에 조용히 낭독된 <서시>는 도저히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던 명장면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암울한 세상에서 참혹한 삶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시로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노래했던 윤동주. 그의 순수함이 저는 너무나도 감동스러웠습니다.   


[동주]가 가지고 있는 감동의 힘은 바로 이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만약 이 영화의 주인공이 윤동주가 아닌 송몽규였다면 영화 자체는 훨씬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젊은 행동파 독립운동가라는 송몽규의 매력적인 캐릭터덕분에 영화가 훨씬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쳐 흐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주]는 그러한 영화적 재미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동주]가 원한 것은 암울한 시대에 살면서 그저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던 순수 청년 윤동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순수함을 짓밟으려는 일제의 암울함을 담아냅니다. 하지만 윤동주는 그러한 가운데에도 결코 순수한 아름다움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작인 <쉽게 씌어진 시>에서 드러나듯 그가 아무리 괴로워하고 좌절해도 그의 마음 속 순수함은 더욱 아름다운 시로 표현될 뿐입니다.

[동주]는 그런 영화입니다. 비록 윤동주는 송몽규처럼 나라를 잃은 아픔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극복하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총을 들고 일제와 싸우지 않았다고해서 그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일제의 추악함과 맞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순수와 아름다움의 힘이고, [동주]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감동입니다.



한때 문학소년이었던 나, 또다시 시집을 집어들다.


사춘기 시절, 저는 학교에서 소문난 문학소년이었습니다. 제 또래 아이들을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방황과 반항으로 보내고 있었지만, 저는 한권의 책과 한편의 시로 사춘기를 오히려 즐겼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시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 제게 주어진 최고의 여흥이었습니다. 광화문의 대형 서점에서 맘에 드는 시를 발견하면 그 시를 마음 속으로 읊으며 종로와 청량리를 거쳐 이문동의 집까지 3시간 남짓 걷고는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성인이 되고나니 시의 아름다움은 한때의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춘기 시절 제가 외웠던 수 많은 시들은 이제 제 기억속 깊숙한 곳에서 잊혀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주]를 보고나니 사춘기 감수성이 되살아 난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에 살았어도 윤동주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결코 빛을 잃지 않았듯이, 저 역시도 가끔 아름다운 시로 힘든 세상살이에 잠깐의 휴식을 되찾아야 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간절히 원했던 윤동주 시인의 눈물겨운 고백처럼... 오늘도 나는 [동주]의 한장면 한장면을 되새기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책장을 넘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블로그를 찾은 여러분께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소개합니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詩)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구나.

어리고 순수했던 시절에는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나는 왜 성인이 되면서 잊고 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