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6년 영화이야기

[나를 잊지 말아요] - 기억하긴 싫어도 잊혀질 순 없는 남자

쭈니-1 2016. 1. 14. 14:45

 

 

감독 : 이윤정

주연 : 정우성, 김하늘

개봉 : 2016년 1월 7일

관람 : 2016년 1월 10일

등급 : 15세 관람가

 

 

로맨스 영화가 보고 싶었다.

 

구피와 저는 영화 취향에 있어서 몇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구피는 애니메이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로맨틱 코미디, 멜로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을 즐기지만, 구피는 로맨틱 코미디, 멜로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은 돈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저는 혼자 극장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나마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웅이 덕분에 아이들이 득실거리는 극장에서 혼자 봐야하는 곤욕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웅이도 언젠가는 컸다고 저와 함께 애니메이션를 보려고 하지 않을테지만, 아직까지는 웅이 덕분에 저의 애니메이션 관람은 부족함이 없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 멜로 영화의 경우는 커플들 사이에서 저 혼자 관람을 해야합니다. 구피와 함께 데이트하는 마음으로 로맨틱 코미디, 멜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다음주 화요일은 제 생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피에게 졸랐습니다. 내게 생일선물을 준다 생각하고 [나를 잊지 말아요]만큼은 극장에서 함께 관람을 하자고... 구피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승낙을 하더군요. 하긴 제 생일까지 걸었으니 거절할 수 없었겠죠. 이렇게해서 어렵게 2016년 구피와 쭈니의 첫 멜로 영화 관람이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잊지 말아요]는 제가 생각했던 그런 달달한 멜로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교통사고로 10년간의 기억이 지워진 남자 석원(정우성)과 그에게 다가서는 의문의 여성 진영(김하늘)의 사랑이 [첫 키스만 50번째]처럼 훈훈하게, 혹은 [이터널 선샤인]처럼 짙은 여운으로 그려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첫 키스만 50번째]는 교통사고로 인하여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루시(드류 베리모어)와 매일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해야하는 헨리(아담 샌들러)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입니다. 최근 재개봉해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으로 인한 상처를 잊기위해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지운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기억이 지워진 후에도 운명처럼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은 영화입니다. 두 영화 모두 사랑과 기억에 대한 수작입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 역시 기억 잃은 남자 석원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에 석원과 진영의 사연이 밝혀지는 후반부엔 두 사람의 사랑으로 가슴이 훈훈해질 것이라 저는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영화 후반부에는 석원과 진영의 사랑은 사라지고, 가슴 아픈 그리고 끔찍한 기억과 상처만이 덩그러니 남아버립니다. 구피와 달달한 멜로 영화를 보며 연애 시절의 감정을 되살리고 싶었는데, 제 계획이 완전히 실패해버렸습니다. (이후 영화의 내용이 결말까지 모두 언급됩니다.) 

 

 

왜 하필 10년간의 기억일까?

 

[나를 잊지 말아요]는 인적이 드문 밤 파출소에서 본인의 실종신고를 하는 석원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영화의 화면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왜 석원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실종신고해야만 했을까요? 사실 석원은 교통사고로 지난 10년의 기억을 모두 잃습니다. 하지만 친구이자 변호사 사무실 동업자인 권호(배성우) 덕분에 서서히 일상에 적응해 나갑니다.

그런 그에게 진영이라는 여자가 다가섭니다.  병원에서 처음 본 날,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진영. 석원은 그런 진영에게 점점 빠져듭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이후 석원과 진영의 사랑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권호와 진영의 동생이자 신부인 동건(온주완)은 두 사람의 사랑을 반대합니다. 그러면서 석원의 지워진 기억 속에는 두 사람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음을 관객에게 끊임없이 암시합니다. 과연 석원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고, 진영은 석원에게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요?

그 비밀의 열쇠는 석원이 희미하게 기억하는 10년전 마지막 기억 속 여자 보영(임주은)이 쥐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현호(이준혁)는 석원에게 "보영씨는 잘 지내지?"라고 묻고, 치매에 걸린 석원의 엄마(허진)는 보영을 석원의 애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보영이 석원의 지워진 10년의 기억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왜 하필 10년간의 기억이 사라진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10년 전 석원이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있었다면 10년이라는 시간동안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아빠가 되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보영이 직접 해줍니다.

기억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처럼 특정한 한 사람의 기억만 골라서 지울 수 없다면 그 사람을 만날을 때부터의 기억을 송두리째 지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석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10년전 마지막 기억이 보영과의 만남이었다면, 중요한 것은 정작 보영이 아닌 그 이후에 석원이 만난 누군가입니다. 석원은 그녀와의 만남 자체를 지우기 위해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송두리째 지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어떤 상처가 있었기에 석원은 10년이라는 시간을 지우면서까지 그녀를 잊어야만 했던 것일까요? 일반적인 사랑의 유통기한은 3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10년이라는 시간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결국 석원이 기억을 지워야 했던 이유는 사랑에 의한 상처 때문이 아닌,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석원과 진영의 아들 때문입니다.(석원의 엄마는 "그 아이 이름이 무슨 영이라고 했는데..."라고 이야기합니다. 석원은 그것을 보영이라 이해했지만, 사실은 진영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

 

세상에서 가장 참을 수 없을만큼 큰 아픔이 뭔지 아시나요? 그것은 바로 자식을 잃은 아픔입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의 죽음은 결코 치유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겨줍니다. 석원이 10년의 기억을 지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이 죽었다는 스스로 감당하기엔 너무 큰 아픔에 대한 자기방어인 셈입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기억에서 지우기 위해 석원은 진영과의 만남부터 송두리째 지워버린 것입니다. 저 역시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에 석원의 그러한 선택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의 의지를 잃고 여러번 자살을 시도했던 석원. 그는 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기억을 지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영 역시 석원을 위해 그의 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하지만 진영은 석원의 곁에 돌아옵니다. 그녀는 석원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석원이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두 사람의 새출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석원이 결코 기억해서는 안될 기억들을 알고 있는 권호와 동건. 그래서 진영은 아무도 그들을 모르는 네덜란드로 도망치려 했습니다. 석원이 스스로 지워낸 죽은 아들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런 의미에서 [나를 잊지 말아요]의 유일한 악역은 어쩌면 권호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진영과의 결혼 후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겠다는 석원을 말립니다. 그리고 진영이 석원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으면 자신이 하겠다고 협박아닌 협박을 합니다. 권호는 왜 네덜란드로 도망치려는 석원과 진영을 막아선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변호사 사무실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영화 초반 석원이 퇴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석원의 집에 무작정 처들어온 권호는 이런 푸념을 합니다. 재판 등 다른 것은 내가 커버할 수 있는데 영업은 네가 없으면 안되겠다고... 남편의 실종사건에 의한 재판을 석원에게 의뢰한 김여사(장영남)도 권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원이 아니면 안된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결국 권호가 석원의 네달란드 이민을 막아선 것은 겉으로는 석원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남의 아픔에 냉정합니다. 말로는 "다 이해해."라며 위로하지만 사실 그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석원과의 사랑을 다시 시작하려는 진영의 사랑은 애틋합니다. 석원이 아들을 잃은 아픔을 기억 삭제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치유하려 했듯이 진영은 석원과의 새출발로 아픔을 이겨내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변 사람들은 석원과 진영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방해하기만합니다.

 

 

기억하긴 싫어도 잊혀질 순 없는 남자

 

비록 [나를 잊지 말아요]는 제가 기대했던 멜로 영화는 아니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대응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여운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기억을 지워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석원. 석원과의 새출발을 통해 아들을 잃기 전, 과거로 리셋하고 싶은 진영의 사랑은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깊은 여운으로 제게 남았습니다.

특히 저는 석원의 선택이 인상깊었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 석원은 파출소에서 자기 자신을 실종신고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씁니다.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지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아마도 석원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억을 지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는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던 것이죠.

기억하기는 싫어도 잊혀질 순 없는 남자. 어쩌면 그것은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일지도 모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억을 지워버린 것도 이기적인 선택이고,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며 애타게 누군가를 찾는 것 역시 이기적인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석원의 이기적인 선택에 진영은 희생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녀 역시 석원과 마찬가지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떠안고 있지만, 그 상처를 석원과 나눌 수도, 그렇다고 석원의 곁을 떠나 상처를 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영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이윤정 감독이 2010년 연출했던 동명의 단편영화를 장편화한 영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엔 조금 불필요해보이는 군더더기가 몇군데 보입니다. 특히 남편의 실종으로 살인 의혹을 받고 있는 김여사의 재판 장면은 굳이 이 영화에 꼭 필요했는지 아직도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사고 전, 석원의 냉철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같은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남편 살인 의혹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살아있음을 끝까지 숨긴 김여사와 사고전 석원의 의도도 확실치 않습니다. 어쩌면 석원과 김여사가 내연 관계였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나를 잊지 말아요]는 그 부분에 대해서 정확한 설명없이 그냥 두리뭉실 끝을 맺어 버립니다. 그렇기에 25분짜리 단편영화가 1시간 45분짜리 장편영화가 되면서 어쩔수 없이 붙은 군더더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제가 기대했던 멜로 영화도 아니었고, 개인적으로 불필요해보이는 장면도 더러 있었습니다. 게다가 영화가 끝나고 구피는 "재미없었어."라며 뾰로퉁한 표정을 지었으니 2016년 제 첫 멜로 영화 관람은 실패한 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나를 잊지 말아요]는 꽤 짙은 여운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석원의 이기적인 선택과 진영의 안타까운 희생은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계속 제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사람은 참 이기적이다.

기억을 지운 석원도 그렇고,

네덜란드에서 새출발하려는 진영을 막아서는 권호도 그렇다.

이렇게 이기적인 선택 뒤에는 항상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결국 희생을 강요당한 진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