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마크 오스본
더빙 : 제프 브리지스, 맥켄지 포이, 라일리 오스본, 레이첼 맥아담스
개봉 : 2015년 12월 23일
관람 : 2015년 12월 26일
등급 : 전체 관람가
감기 때문에 망친 크리스마스 연휴
크리스마스 연휴가 다가오면서 저는 참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중학생이 되는 웅이가 내년 크리스마스는 친구들과 함께 보내겠다는 폭탄선언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초등학생 웅이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만큼은 온 가족이 함께 특별히 보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는 웅이가 좋아하는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으며 밤새 우리 가족만의 파티를 하고 싶었고, 크리스마스 낮에는 명동에 나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웅이와 함께 흠뻑 취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웅이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중학생이 되면 연필보다 볼펜을 자주 쓰게될 웅이를 위해 한정판 CROSS 스타워즈 볼펜, 다이어리 세트를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크리스마스의 계획은 구피가 감기 몸살에 걸림으로써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12월 22일부터 감기와 장염 증세를 보인 구피를 위해 죽집에서 한시간동안 줄을 서서(그날이 하필 동지날) 쇠고기 버섯죽과 전복죽을 사다 주기도 하고, 12월 24일에는 저희 회사의 특별 보너스로 구피의 기분을 UP시켜 줬지만 구피의 감기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구피의 감기가 웅이에게 옮길 것을 염려한 나머지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는 파티 대신 웅이와 생이별을 해야 했고, 크리스마스에도 명동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하는 대신 따뜻한 집에서 뒹굴거려야 했습니다. 하필 크리스마스 연휴에 감기가 걸려서... 힝~
구피도 자신 때문에 크리스마스 연휴를 망친 것이 미안했는지 12월 26일 토요일에는 같이 영화보러 가자고 나섰습니다. 구피가 보고 싶은 영화는 [어린왕자]. 결국 웅이의 초등학생 시절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멋지게 보내고 싶었던 제 계획과는 달리 저희 가족의 크리스마스 연휴는 이렇게 영화 보기로 간단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절망적인 것은 크리스마스 연휴 마지막날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웅이가 결국 구피의 감기를 물려 받은 것입니다. 좀처럼 감기가 낫지 않는 구피에 이어 웅이까지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하고 있으니 이젠 신정연휴가 문제입니다. 올해 12월 31일에는 종각에 가서 직접 제야의 종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1월 1일 아침에 동네 앞산에서 웅이와 함께 해돋이를 보며 2016년을 의미있게 시작하려 했는데, 이 계획마저도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생텍쥐페리의 걸작 <어린왕자>가 무슨 내용인줄 아니?
구피가 [어린왕자]를 보고 싶어하는 바람에 저희 가족의 크리스마스 영화는 [어린왕자]로 결정되었지만 사실 저는 [어린왕자]보다는 [몬스터 호텔 2]와 [스누피 : 더 피너츠 무비]가 더 보고 싶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몬스터 호텔 2]와 [스누피 : 더 피너츠 무비]가 [어린왕자]보다 휠씬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마땅한 근거가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몬스터 호텔 2]와 [스누피 : 더 피너츠 무비]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인데 반에, [어린왕자]는 프랑스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입니다. 프랑스 애니메이션을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져 있는 저희 가족에겐 조금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어린왕자]의 원작이 생텍쥐페리의 걸작 <어린왕자>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라도 <어린왕자>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왕자>가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왜냐하면 <어린왕자>는 명확한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단편적인 이미지와 아름다운 명언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린왕자>는 어떻게 영화로 재탄생되었을까요? 혹시 원작 그대로 추상적인 이야기와 철학적 대사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솔직히 제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아직은 어린 웅이와 함께 보는 영화이니만큼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토리 라인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교훈이 영화를 보는 저희 가족에겐 더욱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제가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린왕자]는 원작에는 없는 소녀(맥켄지 포이)와 엄마(레이첼 맥아담스)를 등장시킴으로써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완성시켜 놓았습니다.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친구도 없이 엄마가 짜놓은 인생 계획표대로만 살아가던 소녀가 옆집의 괴짜 할아버지(제프 브리지스)를 만나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동심을 되찾게 된다는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을 통해 [어린왕자]는 어린이 애니메이션의 재미를 갖춰 나간 것입니다.
여기에 할아버지가 소녀에게 들려주는 젊음 시절 만났던 '어린왕자'(라일리 오스본)에 대한 이야기는 원작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각인시켜줍니다. 소녀를 통해 영화적 재미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원작의 재미를 안겨줌으로써 [어린왕자]는 두마리 토끼를 전부 잡은 셈입니다.
3D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만남
엄마가 짜놓은 인생 계획표대로 살던 소녀가 괴짜 할아버지와의 만남으로 동심을 되찾는 이야기와 조종사와 '어린왕자'의 만남은 서로 연결된 듯 보이면서도 서로 다른 각각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를 위해 [어린왕자]는 애니메이션의 형식에서도 조금은 파격적인 선택을 합니다.
[어린왕자]는 소녀와 괴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요즘 애니메이션의 대세인 3D 애니메이션으로, 조종사와 '어린왕자'의 이야기는 종이와 나무의 질감이 느껴지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함으로써 각각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개성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린왕자]의 효과는 굉장히 탁월했습니다. 만약 이 영화가 소녀와 괴짜 할아버지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3D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저는 이제 중학생이 되는 웅이에겐 조금은 유치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 영화가 조종사와 '어린왕자'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아직 초등학생인 웅이에겐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였다며 걱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왕자]는 유치함과 어려움의 중간을 잘 유지해 나가며 어린이가 봐도 재미있고, 어른이 봐도 좋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완성된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연출을 맡은 이가 마크 오스본이기에 가능했던 모험인지도 모릅니다. 마크 오스본은 우리에겐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쿵푸팬더]로 잘 알려진 감독입니다. 하지만 그는 스톱모션 단편애니메이션 [모어]를 통해 제71회 아카데미에 단편애니메이션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경력이 있습니다.
[어린왕자]에는 마크 오스본 감독의 스톱모션 단편애니메이션 [모어]와 드림웍스의 블록버스터 3D 애니메이션 [쿵푸팬더]의 연출 경력이 고스란히 녹아든 것입니다. 그 덕분에 [어린왕자]는 웅이와 같은 어린 관객들에겐 재미와 교훈을, 그리고 저와 같은 어른 관객들에겐 원작의 감성과 감동을 안겨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왕자]가 정말 놀라운 것은 영화 후반부에 드러납니다. 괴짜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지자 소녀는 할아버지를 위해 할아버지의 낡은 비행기를 타고 '어린왕자'를 찾아 나섭니다. 이러한 영화 후반부 소녀의 모험은 소녀의 동심찾기라는 3D 애니메이션의 익숙한 재미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어린왕자>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놀라움이 연출됩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재미
3D 애니메이션으로 연출된 소녀와 엄마, 그리고 옆집 괴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현실적이었습니다. 그에 반에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연출된 조종사와 '어린왕자'의 이야기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린왕자]는 후반부의 놀라운 전개를 통해 두가지 이야기의 경계를 허뭅니다. 소녀가 스스로 '어린왕자'의 이야기 속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소녀의 친구인 여우 봉제인형이 살아서 움직이고, 할아버지의 낡은 비행기가 하늘을 납니다. 그리고 '어린왕자'가 지구에 오기 전에 만났던 작은 행성의 괴짜(자만에 빠진 남자, 왕, 비지니스맨) 어른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고, 기억을 잃은채 청년이 어린왕자(폴 러드)를 구하는 모험을 하게 됩니다.
현실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벌어지는 이 놀라운 모험담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과는 차별화되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어린왕자]만의 장점이 됩니다. 물질만능주의로 물든 현대 사회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풍자 정신을 [어린왕자]는 고스란히 물려 받은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저는 저희 집 책장에 몇년동안 방치되어 있던 <어린왕자>를 찾아서 읽었습니다. 한동안 독서와 담을 쌓고 지냈지만, <어린왕자>는 단번에 읽어지더군요. 책을 읽는 동안 [어린왕자]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문득 문득 떠올라 더욱 재미있게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 역시 어린왕자가 만난 괴짜 어른들과 다른 점이 있을까? 라는... 영화에서 '어린왕자'는 지구에 오기 전, 자만에 빠진 남자와 왕, 그리고 비지니스맨을 만나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책에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이상한 어른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한 어른들의 모습 하나 하나가 지금 내 모습과 조금씩 겹쳐진다는 사실입니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를 처음 발표한 것은 1943년입니다. 무려 7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나이 마흔이 넘어 다시 읽은 제게 묘한 공감과 감성을 안겨주네요. 역시 걸작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어린왕자] 역시 원작의 명성에 전혀 누를 끼치지 않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보며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나는 언제 내 마음 속의 동심을 잊었을까?
그리고 웅이는 언제 마음 속 동심을 잊게 될까?
동심을 잃는다는 것,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참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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