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극적인 하룻밤] - 몸따라 마음이 가버린 비정규직의 극적인 사랑

쭈니-1 2015. 12. 16. 17:07

 

 

감독 : 하기호

주연 : 윤계상, 한예리, 박병은, 박효주, 조복례

개봉 : 2015년 12월 3일

관람 : 2015년 12월 15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연말은 솔로지옥

 

며칠전 친구들과 송년회 모임을 했습니다. 중학교때부터 만났던 친구들인데 이제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40대 중년 아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제 친구들 모두가 결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친구중 두 명은 아직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 신세입니다. 그 중 한 친구가 제게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더군요. 크리스마스 이브날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다며...

당연히 저는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는 가족들과 보내야지, 내가 왜 너하고 술을 마시냐?"며 면박을 줬습니다. 하지만 매몰차게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고나니 조금은 미안해졌습니다. 얼마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할 일이 없었으면 제게 같이 술을 마시자고 했을까요? 솔로들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12월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제법 겨울이라는 것이 실감이 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던 지난 화요일. 저는 혼자 [극적인 하룻밤]을 보러 갔습니다. 구피는 로맨틱 코미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보고 싶은 로맨틱 코미디가 개봉하면 버티고 버티다가 이렇게 혼자 극장을 찾곤 합니다. [극적인 하룻밤]은 개봉한지 2주가 지났고, 흥행성적도 그다지 좋지 않기에 극장에는 저를 포함한 세 명의 관객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모두 혼자 온 관객이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혼자 온 관객 세 명이 각자 멀리 떨어져 영화를 보게 된 것인지...

 

12월은 솔로들에게 참 힘든 한달입니다. 저도 기나긴 솔로 생활을 해봐서 압니다. 날씨는 추워지고, 송년회 등 모임도 많습니다. 모임때 애인과 함께 나와서 닭살행각을 하고 있는 꼴을 지켜보고 있으면 속에서 울화통이 터집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는 노총각인 제 친구처럼 진짜 할 일이 없습니다. 하루종일 뒹굴며 TV로 [나홀로 집에]와 같은 크리스마스 특선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처음엔 솔로 친구들끼리 서로의 외로운 크리스마스 이브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면 결국 과거의 여자 이야기만 하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외로워질 뿐입니다. 그러면서 내년에는 우리도 애인을 만들어 신나는 크리스마스를 보내자고 약속하죠. 하지만 1년이 지나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친구들은 솔로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는 자연스럽게 빠지고, 또 솔로 친구들끼리 술, 추억과 함께하는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됩니다.

[극적인 하룻밤]을 보고나니 제게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같이 술마시자고 했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구피를 만나기 전까지만해도 매년 저와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 밤을 보냈던 친구인데 이제 저는 구피와 웅이에게 묶인 몸이 되어서 그 친구를 외면할 수 밖에 없네요.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한테 제 솔로 친구들에게 애인 한 명씩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야 겠습니다. 

 

 

한예리의 로맨틱 코미디가 궁금했다.

 

[극적인 하룻밤]은 각자의 전 애인 결혼식장에서 만난 정훈(윤계상)과 시후(한예리)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이 너무 전형적이라서 영화를 보지 않아도 내용이 대충 그려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개봉한지 2주째 되어가는 흥행실패작인 이 영화를 굳이 극장까지 찾아가서 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한예리의 로맨틱 코미디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한예리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적인 예쁘장하고, 귀여운 주인공과는 거리가 있는 개성적인 외모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한예리가 자신의 존재감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영화는 하지원, 배두나 주연의 [코리아]입니다. 이 영화에서 한예리는 북한의 탁구선수 유순복을 연기했는데, 앳되고 순수한 외모 덕분에 역할이 굉장히 잘 어울렸다는 평가를 얻어냈습니다.

[코리아]가 순수한 한예리의 매력을 잡아냈다면 김윤석, 오연수 주연의 [남쪽으로 튀어]는 한예리의 반항적인 매력을 잡아냅니다. 못마땅한 건 안하고, 할만은 하면서 사는 최해갑(김윤석)을 닮은 똑부러진 첫째 딸 최민주를 연기하며 순수한 외모 뒤에 숨겨진 고집스러운 강인함을 보여줬습니다. 이후 한예리가 연기한 영화의 캐릭터는 순수함과 강인함을 오고갔습니다. [스파이], [동창생], [해무]에서 결코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정성이 느껴지는 캐릭터를 꾸준히 연기한 것입니다.

 

사실 한예리는 상업영화에 얼굴을 알리기 전에 독립영화에서 이미 인정을 받은 연기파 배우입니다. 최근 그녀는 한국영화계의 라이징 스타로 발돋음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독립영화에 출연중입니다. 그런 그녀가 이제 로맨틱 코미디로 활동 영역을 넓힌 것입니다. 한예리의 개성 강한 연기를 눈여겨 보던 저로써는 [극적인 하룻밤]에 출연한 한예리의 선택이 의외였습니다.

윤계상의 경우는 이미 [6년째 연애중]과 [레드카펫]으로 [극적인 하룻밤]에서의 모습이 충분히 예상 가능했지만, 한예리 만큼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어떤 매력을 선보일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극적인 하룻밤]이 다운로드 시장에 출시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쌀쌀한 겨울 바람을 뚫으며 극장을 찾은 이유입니다. 

실제 [극적인 하룻밤]의 초반 한예리는 로맨틱 코미디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애인이었던 준석(박병은)이 결혼을 하자 준석과 결혼한 주연(박효주)의 전 애인인 정훈을 유혹해서 그의 집에 가고, 그의 집에서 정훈과 섹스를 한 후 자살을 시도하는 시후. "왜 하필 우리집이냐?"라고 항변하는 정훈에게 시후는 "그래야 준석이 내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지!"라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시후의 그러한 엽기적인 행동은 분명 여느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과는 달랐습니다.

 

 

시후의 매력 폭발, 그리고 비정규직의 사랑

 

하지만 한예리의 매력이 영화 속에 녹아드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훈과 시후가 몸친을 하기로 하면서 시후는 여느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처럼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돌변합니다. 분명 그 흔한 쌍커플도 없는 어찌보면 밋밋한 얼굴이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시후의 모습은 사랑스러웠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이처럼 [극적인 하룻밤]은 한예리가 의외의 매력을 발산하며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써 손색이 없음을 보여주는 동안, 기간제 교사인 정훈을 통해 비정규직 남성의 사랑이라는 조금은 무거운 사회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사실 정훈이 주연을 잡을 수 없었던 것도, 그리고 시후와의 사랑에 적극적으로 다가설 수 없었던 것도 그의 직업이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TV 뉴스를 보니 결혼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결혼을 늦게하다보니 출산도 늦어져 한아이 가정이 많다며 사회적 문제라고 걱정을 하더군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IMF 체제 이후 비정규직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20, 30대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고, 그러한 불안정한 처지는 결혼을 미루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정훈이 그랬던 것처럼...

 

기간제 교사로 언제 짤릴지 모르는 정훈의 입장에서어쩌면 사랑은 사치일지도 모릅니다. 10대의 풋풋한 사랑과는 달리 결혼 적령기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당연히 씀씀이도 많아지고, 가장으로써의 책임감도 높아집니다. 그것이 부담스럽다면 당연히 연애도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정훈의 상황은 정훈의 친구인 덕래(조복래)와 학교 이사장의 외동딸 김선생(정수영)의 관계를 통해 코믹하게 묘사되었지만, 결코 웃고 넘어갈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제 노총각 친구도 20대 중반에 CJ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후 어느정도 사회적으로 자리잡은 후에 연애를 하겠다며 차일피일 미뤄다가 결국 크리스마스 이브에 할 일이 없어서 제게 같은 술마시자고 부탁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극적인 하룻밤]은 로맨틱 코미디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임무인 사랑의 달콤한 환상에 멈추지 않고 비정규직 시대의 사랑이라는 사회적 문제도 슬쩍 건드립니다. 그리고 관객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자신의 처지가 불안해도 도망치지 말라고... 사랑이라는 것이 항상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사랑이 찾아왔다면 도망치지 말고 당장 달려가 붙잡으라고... 제가 구피와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때, 저는 백수였습니다. 제가 만약 정훈처럼 도망쳤다면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 밤은 노총각 친구들과 함께 술과 추억을 안주로 외로운 파티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겠죠.

 

 

너무 극적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진다면 [극적인 하룻밤]에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이 영화는 한예리가 매력적이었고, 비정규직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도 묵직했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정훈과 시후의 첫 만남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준석과의 이별로 정훈의 집에서 자살을 하겠다는 시후의 엉뚱한 계획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극적인 하룻밤]은 영화의 제목 그대로 정훈과 시후의 만남을 너무 비현실적인 극적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비현실적인 극적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특히 영화 후반 정훈과 시후가 재회하는 장면은 극적이다 못해 뜬금없습니다. 기간제 교사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냉정하게 시후를 밀어냈던 정훈.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갑자기 시후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매달립니다. 그러한 정훈의 급작스러운 심정 변화가 준석의 죽음 때문이라고 하기엔 역시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극적인 하룻밤]에서 정훈과 시후의 사랑은 마치 급하게 써내려갔다가 대강 마무리한 연애 소설을 보는 듯합니다. 시후의 자살시도라는 극적인 만남으로 시작했지만, 섹스라는 자극적인 관계로 이어나갔고, 결국 비정규직의 사랑이라는 잠깐의 갈등을 거쳐 억지 해피엔딩으로 급하게 마무리된 것입니다.

 

우리가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이유는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며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주인공의 사랑을 응원하며 대리만족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극적인 하룻밤]은 제게 사랑의 환상을 안겨주기엔 조금 부족했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자살을 시도한 여성과 육체적 관계를 유지할 자신이 제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극적인 하룻밤]이 제게 안겨준 최고의 재미는 한예리의 재발견입니다. 지금까지 개성강한 여배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나니 '한예리에게 이런 매력이 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김고은, 박소담에 이어 차기작이 기대되는 여배우가 한명 더 늘어났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제 소득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며 찬바람이 휑하니 부는 거리를 바라봤습니다. 어느덧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사이에는 흥겨운 캐롤이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거리의 사람들도 추위로 잔뜩 몸을 움추렸지만, 사랑하는 사람끼리 꼭 붙어서 행복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 커플들도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항상 이렇게 로맨틱한 영화를 보고나면 저는 감성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솔로 지옥에서 저를 구원해준 구피가 보고 싶어집니다. 아마 [극적인 하룻밤]의 정훈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혼자보다 둘이 낫다는 사실을...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가 뭐가 중요해?

치킨도 먹고 계란후라이도 먹으면 되지."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다.

몸따라 마음이 가던, 마음따라 몸이 가던,

중요하는 그 사람을 향한 내 감정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