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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 절대로 이뤄질리가 없는 사회초년생을 위한 판타지

쭈니-1 2015. 12. 11. 11:08

 

 

감독 : 정기훈

주연 : 박보영, 정재영, 진경, 배성우, 류현경

개봉 : 2015년 11월 25일

관람 : 2015년 12월 8일

등급 : 15세 관람가

 

 

위내시경 받던 날

 

지난 화요일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미루었던 위내시경을 받고 왔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으니 국가에서 2년에 한번씩 위암 건진을 받으라고 손수 문자까지 보내주네요. 위내시경을 받는데 10여분 밖에 안걸리고, 수면내시경을 받는다고해도 30여분이면 충분하지만 저는 그날 회사에 하루 연차휴가를 냈습니다. 위내시경을 받은 후, 집에서 오랜만에 푹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8시 30분에 집근처 종합병원에 갔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수면내시경을 받고 잠에서 깨어나보니 오전 9시30분. 의사 선생님은 제 위가 그 흔한 위궤양도 없이 아주 깨끗하다고 합니다. 2년 전에도 같은 결과였죠. 수면내시경을 받았기에 정신이 몽롱했고, 제 식도로 내시경이 들어갔다가 나왔기에 목안이 칼칼했지만 그래도 아직 제 위가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고나니 기분이 좋더군요.

그래서 저는 위내시경을 받은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병원 근처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았습니다. 그냥 제가 안본 영화중 시간대가 맞는 아무 영화 한편 가볍게 보고 집에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 조건에 아주 딱 맞는 영화가 바로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였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이렇게 우연히 저와 인연이 닿았네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는 대학 졸업후 어렵게 연예부 수습기자가 된 도라희(박보영)의 좌충우돌 직장 적응기를 코믹하게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평을 내리지면 '박보영, 귀엽다!'와 '그냥 생각없이 웃고 즐길만 하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 극장 안에는 기말고사가 끝난 후, 선생님의 지도 아래 단체 관람을 온 고등학생 수십명이 있었지만, 모두들 영화에 집중하며 즐겁게 관람했습니다.

직장생활 경험이 전혀 없는 고등학생들도 즐겁게 깔깔 웃으며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영화의 코믹코드가 일반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박보영의 귀여운 연기와 툭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악질상사 하재관 부장으로 출연한 정재영의 약간은 오버섞인 연기에 의한 웃음은 직장생활 경험이 없는 그 누구라도 즐겁게 웃으며 영화를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그러한 일반적인 웃음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분명 영화를 볼땐 아무 생각없이 '박보영 귀여워!'를 연발하며 유쾌하게 하하호호 웃을 수 있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좀 더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 저와 같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쯤되면 사회초년생의 판타지.

 

지금 저는 중소기업의 어엿한 관리부 부장이지만 저 역시도 햇병아리 시절이 있습니다. 1992년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재를 출판하는 작은 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저는 고졸과 대졸의 극명한 회사내 입지를 목격한 후, 입사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표를 내던지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나서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젠 나도 대졸이다."를 외치며 당당하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려고 했던 1998년, 때마침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조차 생소한 IMF 한파가 몰아 닥쳤습니다. 그렇게 1년간 청년 실업자가 되어 부모님께 민폐를 끼쳤고, 어렵사리 어느 작은 회사에 입사를 했지만, 인턴에 불과했던 제 입지는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다른 직원들이 받는 급여의 절반도 되지 않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았지만, 그것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에서 도라희는 연예부 수습기자로 하재관 부장의 온갖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혼자 취재를 나가기도 하고, 직접 기사를 쓰기도 하는 등 기자로써의 업무는 해나갑니다. 하지만 제가 겪은 사회초년생 시절에는 그런 일다운 일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저 선배들 뒤치다꺼리와 잔심부름이 제가 하루종일 했던 전부였습니다. '내가 고작 이따위 일을 하려고 취직을 했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를 보며 오히려 하재관이 도라희를 굉장히 인간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사회초년생 시절 직장 선배들한테 그냥 잡부 취급을 받았지만, 그래도 도라희는 하재관에게 기자로써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일했던 직종과 신문사 기자의 특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취재를 수습기자 혼자 내보내는 장면은 저로써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장면이었습니다.

도라희가 뜻하지 않게 특종을 터트리고 하재관에게 인정을 받는 장면도 '이건 영화니까 가능한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수습기자 도라희. 취재현장에서 우연히 학교선배이자 다른 신문사의 베테랑 기자 채은(류현경)을 만나 도움을 받게 되고, 채은의 도움으로 몰래 잠입한 톱스타 우지한(윤균상)의 병실에서는 우지한의 도움으로 특종을 낚아채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솔직히 너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이쯤되면 '전쟁터 같은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위한 수습사원 도라희의 극한 분투기!!!'라는 영화의 광고 카피가 무색합니다. 이 영화는 도라희의 극한 분투기가 아닌, 어쩌면 모든 수습사원이 꿈꿨을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변의 도움으로 선배 기자인 선우(배성우)를 밀어내고 특종 기자가 된 도라희는 아주 무난하게 정식기자가 됩니다.

 

 

기레기를 위한 변명?

 

뭐 다 좋습니다. 영화의 카피 그대로 도라희의 극한 분투기가 현실감있게 그려졌다면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장르는 코미디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가볍게 웃고 즐기자고 만든 코미디 영화에서 사회초년생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박보영이 귀엽고, 영화가 유쾌했으면 만사OK인 것이죠.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한가지 찝찝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재관이라는 캐릭터입니다. 여러분은 기자가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기자라면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진실을 캐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 대박 흥행을 기록중인 [내부자들]은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야할 언론이 오히려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며 관객에게 경고했습니다. 유력일간지의 논설주간인 이강희(백윤식)는 글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고 자신이 원하는 부패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비단 [내부자들] 뿐만 아닙니다. 최근에는 인터넷 언론이 판을 치면서 기사같지 않은 쓰레기 글들이 버젓이 기사의 탈을 쓰고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을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기레기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는 바로 그러한 기레기들의 이야기입니다.

 

하재관이라는 캐릭터가 그러합니다. 그는 영화의 초반부터 우지한의 뒤를 캐내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몇년전 우지한의 강간 사건이라는 특종을 잡았지만 우지한의 소속사인 장대표(진경)의 압력으로 특종이 묻혀 버린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입니다. 결국 우지한의 뒤를 캐내려하는 것은 하재관의 개인적 감정 때문인 셈인데, 과연 그것이 올바른 기자 정신일까요?

여러모로 하재관은 도저히 이뻐해줄 수가 없는 캐릭터입니다. 도라희에게는 툭하면 버럭 화를 내는 막말 직장상사이고, 자신의 개인 감정을 내세워 어떻게든 우지한의 구린 뒤를 캐내려는 기레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는 기레기인 하재관을 정성스럽게 포장합니다. 그가 인터넷 언론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연예부의 식구들을 챙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라 변명을 하면서 말입니다.

당연히 기자도 한낱 월급타서 가족을 부양하는 직장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압니다. 진실을 위해 부당한 권력과 맞서 싸우는 진정한 기자는 어쩌면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하재관을 위한 변명을 하면서 멋지게 포장할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주인공은 도라희이고, 도라희가 기레기가 아닌 진정한 기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라면 하재관까지 멋지게 포장할 필요가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판타지의 멋진 마무리... 도라희 일병구하기

 

수습기자가 갑자기 특종기자가 되고, 막말 부장에 전형적인 기레기 하재관은 알고보면 부하직원들을 알딸하게 챙기는 멋진 직장상사로 탈바꿈되는 동안 도라희는 우지한의 억울함을 벗겨주기 위해 장대표와 맞서 싸우는 멋진 기자로 성장해나갑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까지도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는 절대 이뤄질리가 없는 판타지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장대표에 맞서 싸우는 도라희의 무기는 고작 추측기사 뿐입니다. 아무리 추측기사가 사실이라고 철썩같이 믿는다고해도 추측기사는 말 그대로 증거하나 없는 추측일 뿐입니다. 도라희는 그러한 추측 하나만으로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믿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여론입니다. 자극적인 기사에 귀가 솔깃한 대중을 이용하는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추측기사를 지금까지 많이 보아왔습니다. '아니면 말고'식의 전형적인 기레기 수법이죠. 기레기가 아닌 진정한 기자로 성장하는 도라희의 유일한 무기가 바로 그러한 기레기 기사인 셈입니다.

사실 속은 시원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장대표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기에 도라희를 응원할 수 있지만, 만약 이 영화가 현실이라면 도라희는 굉장히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도라희가 진실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추측이 사실이 아니라면 또 한명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추측에 의한 도라희의 위험한 모험에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는 끝까지 판타지로 응답합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하고 추측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쯤되면 도라희는 하늘이 돕고 있는 신이 내린 수습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벼운 코미디 영화라고 할지라도 도라희의 행운이 과해도 너무 과했습니다.

물론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가 코미디영화라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회초년생이 겪는 전쟁같은 적응기가 조금 과장되었다고 해도 어느정도는 공감을 하며 웃고 즐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공감 대신 그저 기승전'박보영 귀엽다'로 마무리되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를 본 후, 집으로 향하면서 문득 잊고 있었던 영화 한편이 갑자기 보고 싶어졌습니다. 바로 [오피스]입니다. 어느 회사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연쇄살인을 인턴사원인 이미례(고아성)의 눈으로 그려낸 공포 스릴러 [오피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도라희와 [오피스]의 이미례를 비교하면서 영화를 보면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저는 점심식사를 하는 것도 잊은채 서둘러 집으로 향했습니다.

 

나의 사회초년생 시절이 도라희처럼만 이뤄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도라희와 같은 상황은 절대 이뤄질리가 없는 판타지임을

아직 사회에 첫발을 내딛지 않은 분들도 인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