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길예르모 델 토로
주연 : 미아 와시코브스카, 톰 히들스턴, 제시카 차스테인, 찰리 허냄
개봉 : 2015년 11월 25일
관람 : 2015년 12월 2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드디어 영화 슬럼프에서 벗어나다.
지난 가을은 제게 가혹했습니다. 특별히 힘든 일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만사가 귀찮고, 무기력증에 빠져서 그저 멍하니 하루를 흘러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찬바람이 부는 12월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기력증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시작은 11월의 마지막날 밤, 구피와 [헝거게임 : 더 파이널]을 극장에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일 밤에는 저 혼자 [크림슨 피크]를 보고 왔습니다.
사실 일찌감치 예매를 하기는 했지만 [크림슨 피크]를 보러 가기 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구피는 피곤하다며 극장 가기를 거부했고,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탓에 날씨는 여간 추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보기로 결심한 [크림슨 피크]의 장르는 다름아닌 공포영화였으니, 제가 고민을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피가 함께 보러 가준다면 고민이 조금 덜어질텐데, 혼자 겨울비가 내리는 겨울밤에 공포영화를 보러 가야하다니...
하지만 결정적으로 12월 2일이 아니면 [크림슨 피크]를 극장에서 볼 기회가 영영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 가을 무기력증 때문에 [크림슨 피크]가 개봉하던 주에는 극장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가을 무기력증을 겨우 벗어나니 [크림슨 피크]를 상영하는 극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네요. 그나마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 밤 10시 5분 상영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었다면 저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 영화를 나중에 다운로드로 봐야할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암튼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극장을 찾았습니다. '오랫동안 개봉되기를 기다렸던 영화를 드디어 본다.'라는 기대감과 '영화가 필요이상으로 무서우면 어쩌지?' 라는 두려움이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크림슨 피크]를 극장에서 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이 영화를 놓쳤다면 두고 두고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만큼 저는 [크림슨 피크]를 만족하며 봤습니다.
[크림슨 피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이후 유령을 볼 수 있게된 미국의 소설 지망생 이디스 쿠싱(미아 와시코브스키)이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영국 귀족 토마스 샤프(톰 히들스턴)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디스는 어린시절 어머니의 귀신으로부터 "크림슨 피크를 조심해라."라는 알 수 없는 경고를 들었는데, 토마스와 결혼하고 도착한 그의 알러데일 저택의 별명이 '크림슨 피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미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에서 매혹적이면서도 섬뜩한 판타지 공포 영화를 연출했던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크림슨 피크]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오래된 저택, 그리고 뭔가 무시무시한 비밀을 간직한 토마스와 루실(제시카 차스테인) 남매, 이디스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하려는 유령들까지... [크림슨 피크]를 보고 있으면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운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비와 사랑에 빠진 나방 (이후 영화의 내용이 언급됩니다.)
[크림슨 피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매력을 이야기하자면 이디스, 토마스, 루실로 이루어진 캐릭터들을 먼저 이해해야합니다. 어머니를 잃고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무남독녀 외동딸인 이디스. 그녀는 얼핏 보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온실속의 화초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강인합니다. 이디스의 강인함은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드러납니다.
흑사병으로 어머니를 잃은 어린 소녀 이디스. 그녀는 그날 밤, 어머니의 유령과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에 이디스는 유령에 대한 두려움에 떨지만, 성인이된 그녀는 유령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등 오히려 유령의 존재를 받아들이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일상을 보냅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알게 모르게 금기시 되었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소설가를 꿈꾸며 금기에 용감하게 맞섭니다. 이디스가 '크림슨 피크'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비밀을 파헤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그녀의 강인함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크림슨 피크'의 충격적이면서도 슬픈 비밀은 토마스와 루실의 캐릭터에서 비롯됩니다. 두 사람은 폭력적인 아버지와 냉철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다락방에 갇혀 서로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토마스와 루실. 그러한 상황에서 남매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루실은 토마스와의 사랑을 지키기위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물려 받은 유산이라고는 서서히 무너져가는 오래된 저택과 저택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붉은 진흙 뿐입니다. 하지만 그 진흙을 캐내어 팔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얻기 위해서 토마스는 돈 많은 집안의 외동딸과의 결혼을 선택합니다. 돈을 위한 토마스의 결혼. 그러나 루실에게 토마스의 아내는 토마스와 자신의 사랑을 가로 막는 죽어 없어져야할 방해물에 불과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크림슨 피크]의 이야기는 바로 이디스와 토마스, 루실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몇번의 결혼을 했지만 또다시 돈이 필요해진 토마스와 루실. 흉칙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나방과도 같은 존재인 그들은 나방의 먹잇감인 아름답지만 연약한 나비를 또다시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이디스가 선택되어집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디스는 연약하기만한 나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유령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회의 금기에 맞서 싸울만큼 강인했던 것입니다.
처음 토마스와 루살의 먹잇감은 사실 이디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디스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 토마스는 이디스를 선택했고, 평소와는 다른 토마스의 선택에 루실은 "나는 그녀가 마음에 안들어."라며 불안해합니다. 살인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유지했던 토마스와 루실의 비극은 이랗게 토마스가 이디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서서히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아름답지만 섬뜩한 절정의 진홍색
어린 시절의 학대로 금지된 사랑에 빠진 토마스와 루실. 이 두 사람은 사랑을 지키기위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이용해왔습니다. 하지만 토마스가 이디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토마스와 루실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변해버린 토마스로 인하여 이디스를 향한 루실의 질투는 점점 극에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기의 이야기는 알러데일 저택, 일명 '크림슨 피크'에서 벌어집니다.
이 영화에서 '크림슨 피크'는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크림슨 피크'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는데 영어 사전을 찾아보니 크림슨(Crimson)은 진홍색, 시뻘건이라는 뜻이고, 피크(Peak)는 절정, 산꼭대기의 뜻을 가지고 있더군요. 직역을 하자면 절정의 진홍색 쯤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알러데일 저택이 '크림슨 피크'라 불리우게 되었는지는 영화 후반, 알러데일 저택에 새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드러납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 하얀 눈. 하지만 붉은 진흙이 묻혀진 '크림슨 피크'에서는 하얀 눈이 핏빛으로 붉게 물듭니다. 이러한 광경은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만큼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섬뜩합니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 루실의 광기가 폭발하면서부터는 '크림슨 피크'의 절정의 진홍색은 점점 공포의 무대가 됩니다.
공포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나약한 심장을 가진 저는 [크림슨 피크]를 보며 공포와 긴장을 영화보는 내내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영화에 등장하는 유령은 그다지 무섭지 않았습니다. [크림슨 피크]에 나오는 유령의 존재는 원한과 복수심으로 일그러진 동양적 유령이 아닌, 살아있는 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하는 그림자와도 같은 슬픈 존재일 뿐입니다.
정작 무서운 것은 오래전 저택 '크림슨 피크'의 위용과 광기에 휩싸인 루실이었습니다. 영화의 중반까지 마치 살아 숨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크림슨 피크'가 공포와 긴장감을 조성하고, 영화의 후반에는 토마스와 사랑에 빠진 이디스에 대한 질투심으로 이성을 잃은 루실이 섬뜩한 공포를 안겨줍니다. 그리고 절정의 진홍색으로 물든 '크림슨 피크'에서 광기로 미쳐 날뛰는 루실과의 마지막 대결은 [크림슨 피크]의 공포와 긴장이 한순간 폭발하는 절정을 이룹니다.
하지만 [크림슨 피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가 느낀 것은 이 모든 공포가 끝났다는 안도감이 아닌, 토마스와 루실에 대한 동정심과 슬픔이었습니다. 부모님의 학대로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토마스와 루실 남매.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애틋한 눈빛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습니다. 이렇게 [크림슨 피크]는 공포와 슬픔, 그리고 아름다움이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독특한 경험을 제게 안겨주었습니다.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 그리고 마음에 깃든 유령
[크림슨 피크]는 참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처음 이 영화의 설정은 유령을 보는 여성이라는 [식스센스] 식 평범한 설정에서 시작했고, [스피드], [트위스터]의 장 드봉 감독의 공포영화 [더 헌팅]과 같은 비밀을 간직한 오래된 저택의 공포라는 식상한 소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아내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잔혹한 남편의 이야기는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잔혹동화 <푸른 수염>을 연상하게 합니다. <푸른 수염>은 여러번 결혼했으나 아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부유한 귀족 '푸른 수염'과 그의 새로운 아내가 된 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푸른 수염'은 멀리 여행을 떠나며 아내에게 성의 열쇠를 맡깁니다. 금지된 방은 절대 열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하지만 성을 방문한 여자의 언니는 금지된 방을 열어보라고 동생을 유혹하고, 결국 호기심에 금지된 방의 문을 연 여자는 남편의 전 아내들의 시체가 벽에 걸려있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푸른 수염'은 아내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지만, 때마침 성에 도착한 여자의 형제들 덕분에 '푸른 수염'을 죽인다는 내용입니다.
[크림슨 피크]에서 토마스가 '푸른 수염'이라면 루실은 여자의 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크림슨 피크'를 찾아와 이디스를 구해낸 엘런 맥마이클(찰리 허냄)은 여자의 형제들인 셈입니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디스를 죽이려하는 것은 토마스가 아닌, 루실이지만 [크림슨 피크]는 분명 <푸른 수염>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가 끝난 시간은 새벽 12시 10분. 영화에 대한 짙은 여운을 느낄 시간도 없이 막차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잠자리에 들기위해 침대에 눕고나니 영화에 대한 여운이 다시금 저를 괴롭혔습니다. 결국 잠 못이루고 함참을 뒤척이다가 구피한테 '빨리 자라.'며 한소리 들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유령을 믿나요? 어린시절부터 심약했던 저는 악몽도 자주 꾸는 편이고, 밤에 혼자 집에 있을땐 으시시한 기분을 자주 느끼는 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디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가끔은 유령이 마음에 깃든다고... 어쩌면 그것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악몽을 자주 꾸던 저는 기가 허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결국 기가 허해서 헛것을 본다는 것은 마음에 깃든 유령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학대를 받아야 했던 루실은 결국 마음에 유령을 들여 놓습니다. 그 유령은 토마스와의 사랑이라는 금기된 욕망과 돈에 대한 욕심으로 루실을 지배했고, 이렇게 마음속 유령에 매몰될수록 루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루실이 무서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쌍했습니다. 토마스를 바라보던 루실의 마지막 눈빛... 아마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끔 욕망과 욕심에 눈이 멀어 마음 속에 유령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있다.
돈, 권력, 명예와도 같은 것들에 매몰되어 스스로 괴물이 되는 사람들.
나는 비록 가난하고, 평범하더라도 그들처럼 괴물이 되지는 말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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