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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스펙터] - 내겐 너무 매력적인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쭈니-1 2015. 11. 23. 11:20

 

 

감독 : 샘 멘데스

주연 : 다니엘 크레이그, 레아 세이두, 크리스토퍼 왈츠, 랄프 파인즈

개봉 : 2015년 11월 11일

관람 : 2015년 11월 19일

등급 : 15세 관람가

 

 

프리미어 12 준결승을 보지 못한 아쉬움.

 

2015 프로야구는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됨으로써 영화와 더불어 제게 큰 기쁨을 주는 프로야구 시즌도 아쉽지만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국가 대항전인 2015 WBSC 프리미어 12가 아직 남아 있어서 야구를 좋아하는 제게 여전히 크나큰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는 제가 응원하는 두산 베어스 소속 선수들이 8명이나 참가함으로써 한국 시리즈 우승의 여운이 남은 제겐 큰 선물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표팀은 대표팀 선발에서부터 여러 악재들이 겹치며 결국 최고의 팀을 꾸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 대표팀과의 개막전에서 5대0으로 참패를 당했고, 마이너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미국 대표팀과의 에선전에서는 수많은 득점 찬스를 무산시키며 연장 승부치기에서 3대2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마야구 최강 쿠바와의 8강전에서 7대2로 승리를 거뒀지만 4강전 상대는 개막전에서 우리 대표팀에게 굴욕을 안겨준 일본의 괴물투수 오타니 쇼헤이입니다.

저는 일본과의 준결승을 보기 위해 회사에서 칼퇴근을 하고 TV앞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은 여전히 오타니 쇼헤이의 공을 제대로 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4회 수비에서 에러가 나오며 대한민국 대표팀은 3대0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경기를 5회까지만 보고, '에이, 오늘도 졌네.'라며 TV를 껐습니다. 그리고 구피와 [007 스펙터]를 보러 갔습니다.

 

[007 스펙터]가 끝난 시간은 새벽 12시 30분. 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기대없이 프리미어 12 준결승 경기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연히 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경기 결과는 오히려 4대3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이 9회 역전승을 거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표팀이 이겼다는 제 말에 구피도 '엥,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은 상황.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TV를 꼈습니다. 프리미어 12 준결승 하이라이트라도 보고 싶었지만 새벽 2시까지 기다려도 결국 하이라이트는 방영되지 않더군요. 어쩔수없이 인터넷 기사를 읽으며 역대급 경기를 못 본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습니다. 구피는 "그냥 집에서 야구나 볼껄, 괜히 영화보러 갔다."라며 투덜거립니다. 솔직히 저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앞으로 국가대항전 야구경기에서 한일전이 벌어질때마다 두고두고 회자될 경기를 보지 못했으니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요.

물론 그렇다고해서 [007 스펙터]를 본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007 스펙터]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셨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단지 [007 스펙터]는 나중에라도 시간을 내면 볼 수 있지만, 프리미어 12 일본 대표팀과의 준결승 라이브 중계는 그 순간이 지나면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죠. 자! 이제 역대급 한일 경기를 보지 못한 아쉬움은 묻어두고 [007 스펙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 [007 스펙터]까지...

 

1962년 [007 살인면허]가 만들어지며 첩보영화의 대명사가된 제임스 본드는 탄생했습니다. 그동안 [007 스펙터]를 포함해서 무려 24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가 만들어졌고,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들도 1대 제임스 본드인 숀 코네리를 시작으로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을 거쳐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중에서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처음 연기한 2006년 [007 카지노 로얄]은 굉장히 의미있는 영화입니다. 왜냐하면 [007 카지노 로얄]은 단순한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아닌, 지금까지의 007 제임스 본드 영화를 뒤로하고 새롭게 리부트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007 카지노 로얄]에서는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처음으로 살인면허와 007이라는 암호명을 부여받는 과정은 물론, 제임스 본드와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의 슬픈 사랑을 통해 그가 왜 냉소적인 바람둥이 스파이가 되었는지 보여줌으로써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를 새롭게 완성해냈습니다.

[007 카지노 로얄]에 이어진 2008년 [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제임스 본드는 베스퍼 린드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야생마가 됩니다. 상관인 M(주디 덴치)은 물론 조국인 영국조차도 말입니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는 자신과 똑같이 복수심에 불타는 카밀(올가 큐릴렌코)의 복수를 도와주며 결국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정의를 위해 희생할줄 아는 진정한 영웅으로써 성장합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6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면서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를 통해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이전과는 달리 완전히 새롭게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12년 샘 멘더스 감독의 [007 스카이폴]이 만들어집니다. [007 스카이폴]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영화입니다. 007 제임스 본드 탄생 50주년 기념작이었고, 흥행 성적도 북미 3억달러, 월드와이드 11억 달러를 넘어서며 시리즈 사상 최고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하지만 [007 스카이폴]기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아메리칸 뷰티]를 통해 아카데미 영화제를 휩쓸었던 샘 멘데스 감독은 그동안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던 제임스 본드의 과거를 영화에 끌어들였고, 제임스 본드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M의 죽음과 더불어 새로운 M으로 말로리(랄프 파인즈)를 탄생시키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게다가 기존 007 제임스 본드 영화의 맛깔스러운 조연이었던 Q(벤 위쇼)와 머니페이(나이미 해리스)를 영화 말미에 등장시킴으로써 [007 스카이폴]을 시리즈 영화로써의 완벽한 궤도에 올려 놓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제임스 본드 만들기는 [007 스펙터]에서도 여전히 진행됩니다. [007 스카이폴]에 이어 샘 멘데스 감독이 다시한번 메가폰을 잡은 [007 스펙터]는 멕시코의 전통 축제인 '죽은 자들의 날'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상관인 M(랄프 파인즈)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채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 축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제임스 본드. 그는 어쩌다가 [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처럼 제어불가 야생마로 되돌아간 것일까요?

 

 

전편과의 치밀한 연결

 

[007 스펙터]를 보기 전, 너무나 많은 분들에 의해 [007 스펙터]가 [007 스카이폴]보다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007 스펙터]를 보는데 있어서 어느정도 기대감을 덜어 놓은 상태로 영화를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007 스펙터]는 제게 만족감을 줬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 만족감의 근원은 전편과의 치밀한 연결입니다.

이전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시리즈 영화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캐릭터만 같은 개별적인 영화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가 6대 제임스 본드로 취임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부터 시작해서 [007 퀀텀 오브 솔러스]를 거쳐 [007 스카이폴]에 이르기까지 세편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 영화는 캐릭터 외에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편과의 치밀한 연결은 [007 스펙터]에서 최고조에 이릅니다.

오프닝에서 보여준 멕시코 '죽은 자들의 날' 축제에서의 액션은 [007 스카이폴]에서 실바(하비에르 바르뎀)에게 죽음을 당한 M의 유언에 의한 임무 수행이었고, 멕시코에서의 임무 수행 중 듣게 된 '화이트 킹'이라는 인물은 [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 등장했던 미스터 화이트(제스퍼 크리스텐슨)임이 밝혀집니다. 미스터 화이트가 속해 있는 비밀조직 '스펙터'의 리더 오버하우저(크리스토퍼 왈츠)는 [007 스카이폴]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된 제임스 본드의 과거와 연결이 된 인물인데, 그는 [007 카지노 로얄]의 베스퍼 린드를 죽인 배후 인물이 자신임을 제임스 본드에게 실토합니다.

 

저는 스토리 전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시리즈 영화를 볼때 최소한 시리즈의 바로 이전 영화를 복습한 후 영화를 보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토리 전개가 끊겨서 영화의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007 제임스 본드 영화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007 제임스 본드 영화는 캐릭터만 같을 뿐, 스토리 전개가 서로 연결된 시리즈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007 스펙터]를 보면서는 이전 영화들을 미리 복습하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했습니다. 미스터 화이트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007 카지노 로얄]을 본지 벌써 9년이 되어가는 까닭에 베스퍼 린드의 죽음이라는 제임스 본드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오버하우저의 독설이 그저 무덤덤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제가 만약 [007 카지노 로얄], [007 퀀텀 오브 솔러스], [007 스카이폴]을 복습하고 [007 스펙터]를 봤다면 '화이트킹'이 미스터 화이트라는 머니페이의 정보에 '아! 맞다.'를 외치며 무릎을 쳤을 것이고, 베스퍼 린드를 죽인 배후가 자신임을 밝히는 오버하우저에게 분노를 느끼며 영화에 더욱 몰입했을 것입니다.

영화의 후반부 철거 직전의 MI6 건물에서 [007 카지노 로얄]에서부터 [007 스카이폴]에 이르기까지 제임스 본드에 의해, 혹은 제임스 본드 때문에 죽은 인물들의 사진이 방마다 걸려 있는 장면은 미처 이전 영화를 복습하지 않았어도 마음이 찡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매들린 스완(레아 세이두)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제임스 본드의 간절함이 제게도 느껴졌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계속될 수 있을까?

 

사실 제가 007 제임스 본드 영화에 진정한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007 카지노 로얄]에서부터였습니다. 이전의 007 제임스 본드 영화는 제겐 그저 재미있는 액션 블록버스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007 카지노 로얄]에서부터는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영화 자체를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제임스 본드로 기억되는 숀 코네리도 1962년 [007 살인면허]로 제임스 본드가 된 뒤 1969년 [007 여왕폐하 대작전]에서 조지 라젠비에게 잠시 제임스 본드 자리를 양보한 후, 1971년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서 제임스 본드 자리를 되찾은 후 로저 무어에게 물려 줬습니다. 레젼드라 할 수 있는 숀 코네리도 1962년부터 1971년까지 고작 9년 동안 제임스 본드였던 셈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다니엘 크레이그 역시 제임스 본드가 된지 올해로 딱 9년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007 스펙터]의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오버하우저와의 대결을 끝낸 제임스 본드는 M이 아닌 매들린 쪽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물론 임무를 마친 제임스 본드가 본드걸에게 가는 것은 어쩌면 바람둥이 이미지가 강한 제임스 본드라면 당연한 선택이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Q의 사무실에 가서 총을 던지고 매들린의 손을 잡음으로써 스파이 세계 은퇴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대로 007 제임스 본드가 끝을 맺는다면 이보다 더 완벽한 퇴장은 없을 것입니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 초보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켰고, 9년만에 자신의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새로운 연인 매들린과 함께 멋진 은퇴를 하는 제임스 본드. 매들린을 지키겠다는 미스터 하이트와의 약속까지 지켜냈으니 이만하면 더할나위없이 완벽한 퇴장인 셈입니다.

하지만 제겐 여전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게 처음으로 007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알려준 다니엘 크레이그이고, 한물간 영화로 취급받던 007 제임스 본드 영화를 흥행이 보장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로 재탄생시킨 그였기에 쉽게 떠나보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근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차기 제임스 본드 후보자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진행중입니다. 흑인배우 이드리스 엘바에서부터 톰 하디, 톰 히들스턴, 그리고 '슈퍼맨'을 연기했던 헨리 카빌까지 다양한 후보자들로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헨히 카빌이 26%의 지지를 얻으며 다니엘 크레이그(23%)에 앞서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더이상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도 제 추억 속으로 사라질테지만, 그래도 그는 바람둥이 제임스 본드라는 고정관념에서 탈출하여 베스퍼 린드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으로 인한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야생마가 되었다가 점차 개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하고 프로페셔널한 스파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너무나도 멋지게 표현한 배우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시대는 또 이렇게 저물어간다.

하지만 그 누가 7대 제임스 본드로 선택되어진다고 해도

다니엘 크레이그의 진중한 제임스 본드는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