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스티븐 스필버그
주연 : 톰 행크스, 마크 라이런스, 오스틴 스토웰
개봉 : 2015년 11월 5일
관람 : 2015년 11월 8일
등급 : 12세 관람가
부하 여직원이 결혼하던 날.
지난 토요일, 저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부하 여직원이 결혼을 했습니다. 2007년, 제가 지금의 회사에 입사한 이래 8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했던 직원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눈물많던 막내 직원이었는데, 어느새 여직원 중 최고참이 되어 아줌마 사원 대열에 당당하게 합류를 하는군요. 결혼식장에서 짙은 신부화장을 한 여직원의 모습이 참 많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8년이라는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결혼식장에는 회사 직원들 외에도 퇴사한 직원들도 여럿 보였습니다. 그 중 몇년전, 관리부에서 2개월 동안 제 밑에서 근무했던 여직원도 참석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엔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녀의 이름을 듣고나서야 어렴풋이 기억을 해냈었습니다. 제 기억 속의 그녀는 숫자 개념이 약했던 직원이었습니다. 관리부 특성상 숫자 개념이 약하면 실수가 많을 수 밖에 없었고, 실수가 많았던 그녀는 제게 참 많이도 혼났습니다. 결국 그녀는 버티지 못하고 2개월만에 사표를 냈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그녀는 제 시선을 애써 피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당시만하더라도 업무를 위해 그녀에게 쓴소리를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나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제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니... 따지고보면 저도 직장 상사들 때문에 참 많은 상처를 받았었는데, 저 역시도 부하 직원에게 상처를 준 나쁜 상사였던 것입니다.
그날 저는 술을 과하게 마셨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맥주를 양껏 마셨고, 결혼식장을 나와서는 동료 직원과 함께 2차로 소주를 들이부었습니다. 한동안 소주는 끊었었는데, 그날만큼은 소주가 사정없이 땡겼습니다. 소주 한잔 기울이며 결혼한 여직원과 함께 일했던 8년이라는 세월이 저를 미소짓게 했고, 제 눈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던 그녀의 기죽은 모습이 너무나도 미안해서 죄책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토요일은 결혼식에 참가했다가 만취가 되어 집에 돌아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저는 어김없이 숙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속은 미식거렸습니다. 하지만 가족들과 [스파이 브릿지]를 보러가기로 예전부터 약속을 해놓은터라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숙취가 해소될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날은 난생 처음으로 영화 예매를 취소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던 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대감에 가득찬 웅이를 그깟 숙취 때문에 배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스파이 브릿지] 관람은 제겐 상당히 힘든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특히 전날 술에 만취되어 집에 돌아온 저를 위해 해장국은 커녕 크림 파스타를 늦은 아침 식사로 내놓은 구피의 소심한 복수때문에 더욱더 제 속은 뒤집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제가 자청한 고행의 길인 것을... ^^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
[스파이 브릿지]는 냉전시대가 극에 치달았던 1957년 벌어진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전으로 이끈 이후 최강국의 자리를 두고 패권다툼을 벌어고 있었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하여 지구촌은 핵전쟁 공포에 벌벌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내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마크 라이런스)이 CIA에 체포된 것입니다.
미국 국민들은 루돌프 아벨이 우리를 죽이러 왔다며 분노에 떨었고, 루돌프는 정식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여론 제판에서 사형를 선고받은 것과 마찬가지의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국제적 이목이 있기에 루돌프의 재판이 공정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줘야 했고, 이 막중한 임무를 보험 전문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이 맡게 됩니다. 영화의 초반 루돌프의 변호를 맡으라면 제안에 제임스는 "나는 루돌프 다음으로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인물이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에서는 지겠군요."라며 고민에 빠집니다.
1957년이면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의 일입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과거의 사건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소재가 제겐 오래된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련의 붕괴로 오래전에 막을 내려버린 이념 전쟁이 2015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내용을 아주 조금만 바뀌보겠습니다. 북한에 의한 전쟁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 서울에서 북한의 간첩이 체포됩니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간첩 체포 사건에 국제적 이목이 집중되자 간첩이 공정한 재판을 받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여 공개 재판을 벌입니다. 자! 만약 이러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반강제적으로 간첩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에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람들은 변호사를 욕하며 그에게 돌을 던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간첩은 대한민국을 전쟁의 위협에 빠뜨리는 북한과 동의어가 되어 있을 것이며, 일반인들에게는 그러한 간첩의 변호를 맡는다는 것은 북한의 편에 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반강제적으로 간첩의 변호를 맡게된 변호사는 재판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대충 변호를 맡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여론 재판에 의해 간첩의 유죄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변호사는 그저 그럴듯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임스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는 루돌프가 미국의 적이기는 하지만, 그가 미국의 헌법에 의해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제임스에게 "왜 그의 편에 서느냐?"라며 항의하고, 급기야 그의 가족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판사조차 루돌프 사건은 국가 안보의 문제라며 법을 무시했지만, 제임스는 각기 다른 민족이 모여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미국의 헌법을 따르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지킵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 때문에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냉전시대... 미국의 국민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소련의 핵전쟁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련 역시 미국의 핵전쟁 위협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나라가 동시에 핵무기를 없앤다면 핵전쟁의 두려움은 해소될테지만, 서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간단한 해결책은 쓸모가 없어집니다. 이렇게 두 나라는 스스로 핵전쟁의 공포를 확산시켜나갑니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제임스의 아들이 학교에서 핵전쟁의 위협을 배운 이후 집에 돌아와 공포에 떠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실체가 없는 공포는 미국 국민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침투했고, 그러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성 따위는 잊어버린채 공포라는 감정에 휩쓸린 집단 광기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빨갱이, 북한, 좌파라는 단어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히스트릭한 반응을 보이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처럼 말이죠.
제가 그다지 좋은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60여년전 과거의 실화를 다룬 [스파이 브릿지]를 집중하며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이 영화의 설정이 지금 현재 제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는 점과 실체없는 공포에 맞서 자신의 신념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제임스의 모습이 너무나도 공감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적이라 부르며 무서워하고, 증오하는 북한은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해도 우리와 같은 나라를 이루었던 같은 민족입니다.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긴 했지만, 결국 언젠가는 통일을 해야하는 형제인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제2의 한국전쟁 공포때문에 통일에 대한 희망보다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스파이 브릿지]에서 제임스를 비난하는 대중의 모습이 어쩌면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파이 브릿지]는 이렇듯 핵전쟁의 공포와 국가 안보라는 허울아래 헌법을 무시하려 하는 사람들에 맞서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지킨 제임스의 용기있는 모습을 담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앞으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CIA가 제임스에게 소련에 붙잡힌 CIA 첩보기 조종사와 루돌프의 맞교환 비밀 협상을 비공식적으로 맡기면서부터입니다.
냉전시대의 공포에 아랑곳하지 않는 변호사 제임스의 신념을 소재로한 법정 드라마였던 [스파이 브릿지]는 스파이 맞교환 비밀 협상을 제임스가 맡으며 첩보영화로 방향을 급선회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일관성을 지켜냅니다. 그것은 스파이 맞교환 비밀 협상이라는 위험한 임무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임스의 신념과 원칙은 그대로 유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먼저다.
왜 제임스는 위험천만한 스파이 맞교환 비밀 협상을 맡은 것일까요? 사실 그에겐 그럴 의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루돌프의 변호를 맡았을 때에도 제임스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변론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는 미국의 헌법 정신을 충실하게 지켰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소련의 핵전쟁 위협에 떨며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던 상황에서 그는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인 인권을 최우선으로 한 것입니다.
스파이 맞교환 비밀 협상도 마찬가지입니다. CIA가 제임스에게 비밀 협상을 맡긴 것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만일 협상이 틀어지더라도 미국 정부는 제임스가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라며 모른채 할 수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임스에게 스파이 맞교환 비밀 협상은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루돌프를 조국으로 되돌려 보내고, 소련에 붙잡힌 젊은 첩보기 조종사를 가족의 품으로 데려오는 것. 제임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 뿐입니다.
그렇기에 CIA에서는 외면한 동독에서 붙잡힌 미국의 유학생도 제임스는 구하려합니다. CIA 입장에서는 국가기밀 발설 위험이 있는 첩보기 조종사의 구출만 중요했지만, 제임스 입장에서는 첩보기 조종사와 미국 유학생 모두 똑같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가 국가 안보보다 사람을 가장 중요시했기에 가능했던 모험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보니 사람들은 가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집단도 결국은 한사람, 한사람이 모였다는 것을 우리는 가끔 잊습니다. 특히 극심한 공포에 사로 잡혔을 때, 우리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따위는 생략해도 된다는 무서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 대상이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혀 감안하지 못하고 말이죠.
[스파이 브릿지]는 사실 조금은 지루한 영화입니다. 영화는 중반부터 첩보영화의 형식을 띄지만 실화를 바탕으로해서인지 영화의 긴장감은 다른 첩보영화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저는 제임스가 스파이 맞교환 비밀 협상에서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길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러한 제 예상과는 달리 제임스의 비밀 협상은 큰 긴장감없이 순조롭게 잘 진행됩니다. 영화를 같이 본 구피가 "생각보다 지루했어."라고 총평할만했습니다.
하지만 [스파이 브릿지]는 영화적 긴장감으로 평가할 영화는 아닙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한때 흥행의 마술사로 불리웠지만, 흑인 여성의 인생 역정을 다룬 [칼라 피플], 태평양 전쟁을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바라본 [태양의 제국],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손아귀에서 수 많은 유태인들을 구해낸 오스카 쉰들러의 실화를 다룬 [쉰들러 리스트] 그리고 [아미스타드], [라이언 일병 구하기], [뮌헨]등 작품성 위주의 영화도 꾸준히 만들었습니다. [스파이 브릿지]는 그들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의미있는 영화입니다.
우리는 과연 제임스 도노반처럼 실체없는 공포에 맞서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을까?
인간다움을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공포라는 녀석은 그러한 당연한 것조차 잊게 만드는 괴력을 가지고 있다.
60년전 냉전의 유산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는
나 역시도 공포 때문에 인간다움을 잊게 될까봐 두렵다.
'영화이야기 > 2015년 영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부자들] - 지금 지옥길을 걷고 있다면 계속 전진하라! (0) | 2015.11.27 |
---|---|
[007 스펙터] - 내겐 너무 매력적인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0) | 2015.11.23 |
[검은 사제들] - 현실과 판타지의 오묘한 경계를 넘나들다. (0) | 2015.11.09 |
[더 폰] - 비밀은 없다. 하지만 스릴은 있다. (0) | 2015.10.28 |
[인턴] - 세대간의 갈등... 이 영화만 같아라!!! (0) | 2015.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