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검은 사제들] - 현실과 판타지의 오묘한 경계를 넘나들다.

쭈니-1 2015. 11. 9. 11:43

 

 

감독 : 장재현

주연 : 김윤석, 강동원, 박소담

개봉 : 2015년 11월 5일

관람 : 2015년 11월 5일

등급 : 15세 관람가

 

 

웅이가 수학여행 간 사이...

 

지난 수요일, 웅이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2박3일 일정으로 금요일에 돌아올 예정입니다. 화요일 저녁에 웅이의 여행가방을 챙겨주느라 난리법석을 떠는 구피의 모습을 보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던 것이 엊그제같은데, 제 아들이 제가 갔던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다니...

암튼 웅이가 수학여행을 갔으니 구피와 저는 저녁 시간대에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평소라면 퇴근하고 웅이와 시간을 보내야해서 제 자유시간은 밤 9시 이후였지만, 웅이가 수학여행을 갔으니 퇴근이후부터 잠들기까지가 제 자유시간이 된 것입니다. 예전같으면 주저하지 않고 '이때다!'싶어서 극장으로 향했을테지만, 수요일은 구피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목요일엔 장인어른의 생신이라 처갓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제 자유시간을 썼답니다.

이렇게 극장에 가지 못하고 이번주도 보내나 싶었던 그 순간, 웬일로 구피가 "[검은 사제들]보러 가자."라며 먼저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구피는 '강동원이 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를 댔지만 저는 압니다. 평일 밤에는 피곤하다며 극장에 가는 것을 꺼려하던 구피가 갑자기 목요일 밤에 [검은 사제들]을 보러가자고 한 이유는 영화에 목말라있는 저를 위해서라는 사실을...

 

암튼 '얼씨구나 좋다!'를 외치며 오랜만에 구피와 평일 심야 극장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사실 [검은 사제들]은 이번주 개봉작 중에서 제겐 최고 기대작이었지만, 엑소시즘이라는 영화의 소재 탓에 혼자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조금 고민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영화도 혼자 곧잘 봤었는데, 나이가 드니 느는 것은 뱃살과 겁밖에 없네요.

그리고 막상 [검은 사제들]을 보니 구피와 함께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검은 사제들]이 훨씬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엑소시즘을 소재로한 [12번째 보조사제]라는 단편영화를 선보이며 한국단편경쟁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던 장재현 감독은 [12번째 보조사제]를 장편으로 확장시킨 [검은 사제들]을 통해 제대로된 한국판 [엑소시스트]를 완성해낸 것입니다. 

1973년 만들어진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는 아직도 회자될만큼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영화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물론 [검은 사제들]이 [엑소시스트]와 비견될만한 걸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엑소시즘이라는 우리나라 관객에겐 생소한 소재를 압도적인 분위기로 잘 풀어내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종교 자체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있지 않던가?

 

솔직히 저는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교회에 다니기도 했고, 요즘은 불교를 믿는 장모님을 따라 부처님 오신날에는 절에 가서 산채 비빔밥을 얻어먹고 오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예수와 부처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분명 존재했던 인물이지만, 그들 종교에서 주장하는 절대신의 존재, 혹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그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과학의 반댓말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모든 교리들은 사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가 않습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종교의 영역은 영적인 것인데, 영적인 것을 과학으로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정이 그러다보니 종교적인 영화는 판타지 영화의 범주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영화화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노아]와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기를 영화화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은 분명 성서에 기록된 사건을 영화화했지만, 그 내용은 다분히 판타지적입니다. 

 

[검은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가톨릭에 비공식 엑소시즘 집단인 장미십자회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장미십자회는 인간 사회에서 모습을 감춘채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악마라고 할 수 있는 12형상을 쫓는 집단입니다. [검은 사제들]은 오프닝에서 이탈리아 장미십자회의 사제와 보조사제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보조사제가 "그들이 정말 존재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왜 그들은 모습을 감춥니까?"라는 질문에 사제는 "그들의 존재가 들키면 사람들이 모두 신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사제의 대답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공감되었습니다. 만약 악마가 진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저처럼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결국 신을 믿게 될 것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악마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당연히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신도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은 신에 대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검은 사제들]은 바로 그러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잘 이용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영화를 보며 영신(박소담)의 몸에 들어간 12형상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 김신부(김윤석)와 최부제(강동원)의 활약에 "에이, 저건 말도 안돼.'라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검은 사제들]의 영화적 재미를 잃게 됩니다. 하지만 종교의 영적이고, 판타지적인 부분을 받아들여 몰입을 한다면 [검은 사제들]의 영화적 재미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만들어진 캐릭터

 

영신의 몸에 악마가 깃들었다는 김신부의 설명에 주교를 비롯한 가톨릭의 신부들은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주교는 가톨릭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라며 공식적으로는 김신부의 구마행위(엑소시즘)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한 주교의 선언은 신은 믿지만, 악마는 믿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악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죠.

이렇게 [검은 사제들]은 인간을 위협하는 악마와 싸워야 하는 사제, 즉 구마사의 활약을 그리고 있지만, 그러한 구마사들은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가톨릭 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한 캐릭터 성격 덕분에 아웃사이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김윤석의 캐스팅은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세상 일에 무심한 듯 보이지만, 영신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던질줄 아는 김신부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악마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문제는 강동원입니다. 강동원과 김윤석은 이미 [전우치]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습니다. [전우치]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김윤석과 강동원의 환상적 호흡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강동원의 장난꾸러기 표정과 김윤석의 과묵한 아웃사이더 이미지가 서로 맞대결을 펼치며 [전우치]는 한국적 판타지의 새 장을 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검은 사제들]은 [전우치]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김윤석은 여전히 과묵한 아웃사이더를 연기해도 [검은 사제들]과 잘 어울렸지만, 강동원이 [전우치]처럼 장난꾸러기 표정을 지어 보인다면 [검은 사제들]의 장르적 정체성이 흐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초반만해도 그러한 제 우려가 현실이 되는 듯 했습니다. 강동원이 연기한 최부제는 신학교 내에서도 못말리는 말썽꾼임을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재현 감독은 신인 감독답지 않게 최부제의 캐릭터를 제대로 만들어냄으로써 빠르게 [검은 사제들]의 장르적 정체성을 되찾아갑니다. 분명 여성 관객을 홀릴 것이 분명한 강동원의 장난꾸러기같은 표정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영화 중반부터 최부제의 어린시절 트라우마를 내세워 최부제의 표정에 장난꾸러기의 흔적을 지워냅니다.그 대신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애써 밝은척 노력하는 최부제의 캐릭터를 완성도 높게 완성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김신부와 최부제의 캐릭터가 제대로 만들어졌기에 영화 후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영신을 위한 구마 의식의 긴장감이 더욱 높아질 수 있었습니다. 악마는 최부제의 트라우마를 교묘하게 건드리며 그를 무너뜨립니다. 영화 초반 장난꾸러기같은 표정으로 가려졌던 최부제의 공포심이 영화 후반에 폭발함으로써 [검은 사제들]의 후반부는 저를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제 3의 주인공, 박소담의 연기에 박수를...

 

분명 [검은 사제들]은 김윤석과 강동원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분명 김신부와 최부제가 주인공이지만,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악마의 존재는 영화에서 쉽게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를 자신의 몸 안에 가둔채 힘겨운 싸움을 하는 영신이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신은 순수한 소녀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악마가 들어가면서 섬뜩함과 순수함이 함께 공존되어 있습니다. [엑소시스트]에서 악령에 사로잡혀 점점 훙측하게 변해가는 조그맣고 귀여웠던 소녀 레건(린다 블레어)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듯이 [검은 사제들]에서도 김신부와 최부제가 돋보이려면 영신의 활약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역할을 박소담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여배우가 완벽하게 해냅니다. 그녀가 악마의 형상을 하고 김신부와 최부제를 공격할때 저는 섬뜩해서 나도 모르게 구피의 팔을 꼬옥 붙잡았을 정도입니다. 그러한 박소담의 연기를 보다보니 [은교]를 통해 충격적인 데뷔를 치룬 김고은이 떠올랐습니다. 김고은이 연기력을 앞세워 한국영화의 대세 여배우로 떠오르고 있는 것처럼 박소담도 조만간 한국영화의 대세가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명동 거리, 그 거리의 어두운 뒷골목 건물에서 벌어지는 영신의 구마 의식. 그러한 설정만으로도 [검은 사제들]은 종교의 현실적이면서도 판타지적인 경계를 잘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가운데 12형상과의 한바탕 대결이 끝나는 시점에서도 영화의 긴장감을 잃지 않습니다. 영신의 몸에 깃든 12형상을 물리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신을 죽인 살인범으로 몰리는 김신부와 최부제의 처지가 [검은 사제들]을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영화가 끝나고 저와 구피는 [검은 사제들]이 굉장히 짧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은 사제들]의 러닝타임은 1시간 48분으로 그렇게 짧다고 할 수가 없었지만, 영화 자체가 단 한순간도 군더더기없이 긴장감있게 진행되어 1시간 48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인식할 수 없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제겐 [검은 사제들]이 재미있었습니다.  

[검은 사제들]은 의미있는 영화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영화들은 엇비슷한 스릴러 영화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편일률적 상황에서 우리 영화가 단 한번도 시도한 적이 없는 엑소시즘을 소재로 끌어들여, 종교, 공포, 판타지를 잘 버무렸다는 것만으로도 [검은 사제들]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현실적인 공감에서 펼쳐지는 판타지적 공포.

[검은 사제들]은 그러한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압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