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대호] -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에 대한 향수와 신화를 섞은 판타지.

쭈니-1 2015. 12. 24. 17:12

 

 

감독 : 박훈정

주연 : 최민식, 정만식, 김상호, 성유빈

개봉 : 2015년 12월 16일

관람 : 2015년 12월 19일

등급 : 12세 관람가

 

 

웅이와의 약속은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지켜져야한다.

 

지난 12월 18일, 제가 회사 송년회에 1차만 참가하고 멀쩡한 정신으로 서둘러 집에 들어간 것은 웅이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를 보기 전에 [스타워즈 시리즈]를 다시한번 보기로 웅이와 철석같이 약속을 했는데, 12월 19일 전까지 [스타워즈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만 보지 못했습니다. 다음날인 토요일에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를 보려면 12월 18일 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타워즈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을 봐야만 했습니다.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를 보고 나서 저는 경기도 진접에 가야 했습니다. 12월 19일 토요일 저녁에 저희 3남매가 누나네 동네에서 만나 오랜만에 송년회를 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를 보고난 후 저와 침대에서 뒹굴고 싶어했던 웅이는 제가 나가봐야 한다고 하니 많이 아쉬워하더군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일요일 점심때 [대호]를 함께 보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문제는 저희 남매가 술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점입니다. 한번 시작된 술자리는 끝날줄은 몰랐고, 1차 횟집, 2차 사케집, 3차 노래방을 거쳐 결국 4차로 누나네 집에서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회사 송년회에서는 술을 많이 안마시고 잘 버텼던 저는 그만 얼큰하게 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술에 취해 헤롱거리는 와중에도 웅이와 다음날 [대호]를 보러 가기로 했다는 약속만큼은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술을 마시다말고 집에 가야한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당연히 제가 누나네 집에서 자고 올것이라 생각했던 구피는 새벽에 비틀거리며 들어오자 깜짝 놀라더군요. 하지만 저는 웅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날 저는 구피의 눈총을 받으며 집에서 편안하게 푹 잤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새벽에 제가 저질러 놓은 것들을 치우며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했답니다. 툴툴거리면서도 정성껏 끓여준 구피의 사골북어국으로 해장을 하면서...

어쩌면 [대호]를 보러 가자는 웅이와의 약속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날 못본다면 다음 주말에 봐도 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아주 작은 약속이라도 웅이와의 약속은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웅이에게 술만 마시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쟁이 아빠는 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암튼 그날 저는 쓰린 속을 움켜잡고 웅이와 함께 [대호]를 봤답니다.

그런데 [대호]를 보고나니 무리하면서까지 웅이와의 약속을 지킨 것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호]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고, 영화를 보고나서도 웅이는 "아빠와 이 영화를 보길 참 잘했어요. 내 친구들한테도 아빠랑 꼭 같이 보러 가라고 추천해야지."라며 제 손을 꼬옥 잡아줬답니다. 비록 술이 제대로 깨지 않아 속은 쓰렸지만, [대호]를 보며 만족해하는 웅이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했습니다.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영화

 

솔직하게 [대호]를 평하자면 [대호]는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게 나뉘는 영화입니다. 우선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최민식을 비롯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CG로 탄생한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지리산 산군의 완벽한 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몸무게 400kg, 길이 3m 80cm의 위용을 자랑하는 지리산 산군의 CG는 우리나라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놀랍도록 정교합니다.

거기에 [신세계]로 흥행감독 반열에 오른 박훈정 감독 특유의 비장미 가득한 이야기 전개가 영화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조선 호랑이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일본군과 조선 포수대의 만행으로 인하여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지리산 산군.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 석이(성유빈)를 잃고, 삶의 의지가 사라진 천만덕(최민식)의 마지막 대결은 묵직한 비장미를 넘어 눈물이 핑 돌정도로 여운이 깊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대호]의 유일한 단점은 지리산 산군에 대한 너무 심한 과장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산군은 거의 SF 영화에나 등장하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죽일 수 없는 괴물(에일리언, 혹은 프레데터)로 보일 정도입니다. 게다가 천만덕과 정신적인 공감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호랑이인지, 산신령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단점이 뚜렷하다보니 [대호]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도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대호]의 뚜렷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제 나름대로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이전에 [대호]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장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점 위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호]의 첫번째 장점은 최민식을 비롯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최민식의 연기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필요해보입니다. 이미 최민식의 연기력은 정평이 나있고, [대호]에서 최민식은 그가 항상 그러했듯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연기를 펼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애정 표현이 서툰 무뚝뚝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조선 포수대의 전설과도 같은 카리스마, 그리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절규까지... 최민식의 연기는 다른 미사여구가 필요없이 그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대호]의 두번째 장점은 지리산 산군의 CG입니다. 사실 저는 [대호]를 보러 가기 전에 이 부분이 가장 염려스러웠습니다. 만약 지리산 산군의 CG가 투박했다면 제아무리 최민식이 명연기를 펼친다고해도 반쪽짜리 영화가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우려는 영화를 보면서 놀라움으로 바뀌었습니다. CG로 탄생한 지리산 산군의 위풍당당한 위용은 최민식의 명연기와 더불어 [대호]의 영화적 재미를 이끌어갔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리고 그것을 괴물로 만드는가?

 

[대호]의 세번째 장점은 비장미가 넘치는 이야기 전개입니다. 이미 박훈정 감독은 2013년에 개봉했던 [신세계]를 통해 비장미넘치는 이야기꾼임을 만천하에 알린 적이 있습니다. [신세계]는 국내 최대 범죄조직인 골드문에 8년째 잠입 중인 경찰 이자성(이정재)의 이야기입니다. 정의를 위해 범죄조직에 잠입했던 이자성. 하지만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아는 자들을 하나씩 제거했고, 그렇게 괴물이 된채 정의가 아닌 생존을 선택했습니다.

[신세계]가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이자성의 이야기라면 [대호]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지리산 호랑이 산군의 이야기입니다. 이자성이 살기 위해 괴물이 되었다면 산군은 복수심 때문에 괴물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군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욕심에 눈이 먼 일본군 고관과 조선 포수대의 리더 구경(정만식)입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구경이라는 캐릭터입니다. 그는 산군에게 동생을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군을 잡기 위해 온갖 추잡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산군의 죽은 새끼들을 미끼로 쓰기도 하고, 천만덕을 끌어들이기위해 석이가 조선 포수대에 지원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산군에 의한 대량 살육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구경이야말로 복수심으로 인하여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괴물과 맞서기 위해서는 더 끔찍한 괴물이 되어야만합니다. 산군은 바로 그 길을 선택합니다. 그렇기에 산군에 의한 살육전은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잔인해집니다. 영화 후반 산군이 일본군을 대량 살육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12세 관람가가 맞아?' 싶을 정도로 끔찍합니다. 하지만 복수는 복수를 낳고, 그 끝은 허무할 뿐입니다. 구경에게도... 그리고 산군에게도...

어쩌면 산군이 천만덕을 찾아간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이미 괴물이 된 자신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천만덕 뿐임을 알기에 산군은 천만덕의 집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 장면에서 산군과 천만덕이 서로 마주보는 장면은 [대호]의 최고 명장면입니다. 인간의 피가 얼굴을 뒤덮고 있지만, 산군의 모습은 무섭기보다 오히려 슬퍼 보였습니다. 그리고 석이의 죽음으로 넋을 잃고 있던 천만덕 또한 산군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박훈정 감독의 뛰어난 이야기꾼적인 기질은 천만덕과 산군의 인연을 회상씬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발휘됩니다. 천만덕과 산군의 과거 인연을 통해 그 둘의 관계를 단순히 포수와 호랑이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꾸며 놓은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대호]는 가족을 잃은 천만덕과 산군을 동일화시키고 서로 공감하게 만듬으로써, 그들의 대결이 아닌,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는 동행으로 영화를 마무리짓습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자! 이제 이 영화의 단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할 순간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호]의 단점은 간단명료합니다. 산군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과도한 과장입니다. 사실 산군을 지리산 호랑이가 아닌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으로 설정했다면 이야기가 오히려 매끄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산군은 짐승이라기 보다는 사람에 가깝게 행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매끄러워지는 대신 영화 자체는 별다른 특색이 사라지겠죠. 

[대호]의 숙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라는 이야기의 특색을 살려내면서 호랑이와 사람의 대결에 극적인 재미를 주는 것. 박훈정 감독은 그러한 것에 집착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산군의 캐릭터가 과장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 호랑이가 총으로 무장한 수십명의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산군이 맥없이 쓰러지면 영화 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아마도 영화의 극적인 재미와 산군에 대한 과도한 과장 사이에서 박훈정 감독은 가장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군에 대한 과장을 관객 입장에서 다르게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우리나라 국민에게 있어서 호랑이는 친숙하면서도 신성시되는 존재입니다. 단군신화에서 곰과 함께 등장하기도 하고, 우리나라 지도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친숙한 호랑이이지만 조선 호랑이는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입니다. [대호]의 산군에 대한 제 시선은 바로 그러한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 향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렸을적 할머니께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실때 항상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로 시작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옛날에는 호랑이가 사람처럼 담배를 피웠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호랑이는 신성시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대호]에서도 그러한 장면이 나오는데, 일본군이 조선 호랑이를 사냥하고 사체를 두고 기념사진을 찍자 마을 사람들은 인간을 위협하는 호랑이를 잡았다고 환호하기 보다는 오히려 산군님의 가족이 죽었다며 걱정을 합니다.

[대호]의 산군에 대한 시선은 바로 그러합니다. 일본군은 사람에게 해로운 동물을 박멸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을 나섰지만, 사실 일본군의 호랑이 사냥은 조선의 얼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더 깊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이 신성시하는 호랑이를 사냥함으로써 일본군의 위용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산군은 일본군에 맞서는 최후의 보루가 됩니다. 지리산에 숨어있던 독립군을 몰살했던 막강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 부대가 산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장면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결국 [대호]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에 대한 다큐멘터리성 이야기가 아닌,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에 대한 향수와 신화를 섞은 판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호]가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 단점조차 장점으로 볼 수 있었기에...

 

[대호]는 가족을 지키지 못한 가장의 이야기이다.

국민의 아버지인 조선왕은 나라를 지키지 못했고,

조선 최고의 포수인 천만덕은 아내와 아들을 지키지 못했으며,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산군은 자신의 무리를 지키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복수심에 의한 분노로 시작해서 상실감에 의한 슬픔으로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