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네드 벤슨
주연 : 제임스 맥어보이, 제시카 차스테인
개봉 : 2015년 4월 9일
관람 : 2015년 6월 12일
등급 : 15세 관람가
13년전에 읽었던 <냉정과 열정사이>가 떠올랐다.
지난 4월,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가 개봉했을 때 가장 먼저 제 이목을 끈 것은 핫한 배우인 제임스 맥어보이와 제시카 차스테인이 주연을 맡았다는 점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제임스 맥어보이와 제시카 차스테인의 케미는 기대가 되었지만, 그보다도 이 영화가 본편 외에도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입장을 다룬 각각의 영화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점이 저는 흥미로웠습니다.
그러한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제가 2002년에 읽었던 <냉정과 열정사이>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서로 너무 사랑했지만 오해로 인하여 헤어지게된 쥰세이와 아오이가 10년후 아오이의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기로한 약속을 잊지 않았고, 결국 다시 재회한다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냉정과 열정사이>가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 역시 남주인공인 쥰세이의 10년간의 이야기를 담은 <냉정과 열정사이 : BLU>와 여주인공인 아오이의 10년간의 이야기를 담은 <냉정과 열정사이 : ROSSO>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쥰세이의 이야기는 남성 작가인 츠지 히토나리가, 아오이의 이야기는 여성작가인 에쿠니 가오리가 각각 집필함으로써 사랑과 이별에 대한 남녀의 차이를 섬세하게 잡아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냉정과 열정사이>처럼 사랑과 이별에 대한 남녀의 차이를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을까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3일을 투자했다.
애초에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를 기대했던 것이 남주인공인 코너(제임스 맥어보이)와 여주인공인 엘리노어(제시카 차스테인)에 대한 각각의 이야기가 보고 싶었던 것인만큼 저는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물론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와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까지 한꺼번에 볼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러닝타임이 2시간인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지난 금요일 밤에, 러닝타임이 1시간 45분인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는 지난 일요일 밤에, 러닝타임이 1시간 35분인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는 월요일 밤에 봤습니다. 한편의 영화를 위해 무려 3일을 투자한 셈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3일을 투자한 것에 비해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제게 만족감을 안겨주지는 못했습니다. 제임스 맥어보이와 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는 좋았지만 이야기 자체가 너무 평범했던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를 본 후 따로 시간을 내서 본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와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도 아쉬웠습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그저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에 약간의 장면을 더한 후, 두편의 영화로 나눠서 편집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한편의 영화를 세번 본 기분이었습니다.
엘리노어는 왜 코너를 떠날 수 밖에 없었나?
어쩌면 제가 남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을 때에도 아이오의 입장을 다룬 <냉정과 열정사이 : ROSSO>보다는 쥰세이의 입장을 다룬 <냉정과 열정사이 : BLU>가 훨씬 재미있었고,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를 볼 때에도 엘리노어보다는 코너의 행동이 더 이해가 되었습니다.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첫장면에서부터 서로 사랑에 빠진 코너와 엘리노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이 촛점없는 눈으로 거리를 걷던 엘리노어가 갑자기 투신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입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시간을 건너 뛸때 '몇년후'와 같은 자막을 삽입해서 관객의 이해를 돕지만, 네드 벤슨 감독은 관객을 위한 그런 배려 따위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은 듯 했습니다.
그렇기에 갑자기 왜 엘리노어가 투신자살을 시도했는지, 그리고 그녀는 왜 코너를 매몰차게 거부하는지 영화 중후반까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엘리노어와 코너를 맞딱뜨려야 했던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무엇인지 나오지만, 스릴러 영화가 아닌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가 왜 그 이유를 꽁꽁 숨기려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하여 엘리노어와 코너의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채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를 감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를 본 후 저는 이 영화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와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요일 저녁에 큰 기대를 안고 본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는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는 투신하는 엘리노어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문제는 이 영화가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에서 새롭게 추가된 장면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엘리노어와 그녀의 가족간의 대화가 조금 더 늘었고, 엘리노어와 프리드먼 교수(비올라 데이비스)의 우정도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와 비교해서 더 중요하게 다뤄졌지만, 그 뿐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는 영화 후반부 엘리노어와 코너가 빗속 차안에서의 장면의 변화입니다. 코너는 이미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 여종업원과 외도를 했고, 엘리노어에게 그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그런데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에서는 코너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 아닌 엘리노어가 먼저 눈치채고 추궁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옛 집에서의 재회에서 사랑을 나눈 후에도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에서는 엘리노어가 "사랑해"라는 이야기를 하고 코너가 "알아"라고 대답하는 반면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에서는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대답합니다.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개인적으로 그 부분 뿐이었습니다.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사실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에서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와는 다른 엘리노어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저는 그 기대와는 달리 그저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의 엇비슷한 반복일 뿐이라는 사실에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를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기대치를 많이 낮췄습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는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보다는 재미있었습니다. 우선은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장면들이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보다는 많이 삽입됨으로써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느낌이 최소한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르는채 엘리노어를 떠나보내야 했던 코너의 당혹감을 더욱 섬세하게 볼 수 있어서 캐릭터 이해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를 보고나니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의 문제점이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앞서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에서 설명했던 비오는 차안에서의 외도 고백 장면이 단적인 예입니다. 가장 중요한 장면인 만큼 코너와 엘리노어의 기억은 서로 엇갈립니다. 코너는 자신이 먼저 고백했다고 기억하고, 엘리노어는 자신이 먼저 추궁했다고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입장을 모두 다룬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에서는? 코너의 손을 들어줍니다. 다시말해 이는 네드 벤슨 감독의 입장이 코너에게 치우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남자'와 '그여자'를 따로 만들었나?
세 편의 영화를 모두 보고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와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가 따로 존재해야할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명 네드 벤슨 감독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대처하는 코너와 엘리노어의 이야기를 좀 더 섬세하게 그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코너는 상처를 깊숙이 숨겨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을 살아가려고 했고, 엘리노어는 변화를 통해 상처에게서 멀리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러한 코너와 엘리노어의 차이를 각각의 영화로 보여주려 했던 것은 분명 흥미로운 시도입니다.
하지만 네드 벤슨 감독이 남성이기 때문인지 세편의 영화를 모두 보고나니 너무 코너에게로 치우쳐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빗속 차안에서의 외도 고백 장면처럼...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와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에서 코너가 먼저 고백하는 장면이 나옴으로써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에 등장했던 엘리노어의 기억은 거짓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같은 이야기를 남녀 작가가 각각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도 그랬으면 어땠을까요? 이 영화를 세편으로 쪼개지 말고 차라리, 네드 벤슨 감독은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만을 연출하고, 새로운 여성감독에게 [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를 연출시켰으면 어땠을까요? 한편과도 같은 세편의 영화를 3일에 거쳐 보고난후 저는 그 시간이 약간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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