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폴 페이그
주연 : 멜리사 맥카시, 주드 로, 제이슨 스타뎀, 로즈 번
개봉 : 2015년 5월 21일
관람 : 2015년 5월 27일
등급 : 15세 관람가
멜리사 맥카시의 국내 데뷔작(?)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멜리사 맥카시는 이미 할리우드의 흥행 보증수표로 손꼽히는 여배우입니다. 멜리사 맥카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2011년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에서부터입니다. 비록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애니를 연기한 크리스틴 위그의 차지였지만, 멜리사 맥카시는 말썽꾼 신부 들러리 중의 한명으로 출연하여 웃음푹탄을 관객에게 안겨줬습니다.
북미에서만 무려 1억6천9백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올린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 덕분에 멜리사 맥카시는 단번에 주연 배우로 발돋음합니다. 제이슨 베이트먼과 함께 공동 주연을 맡은 [내 인생을 훔친 사랑스러운 도둑녀]는 북미 흥행성적이 1억3천4백만 달러였고, 산드라 블록과 공동 주연을 맡은 [히트]는 북미 흥행성적이 1억5천9백만 달러였습니다.
이들 영화 모두 제작비 규모가 작은 영화이기에 북미 흥행성적만으로도 충분히 대박 영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보여준 멜리사 맥카시의 위력은 그녀의 위상을 높여줬습니다. 그덕분에 멜리사 맥카시는 2014년 [타미]의 공동감독겸 주연배우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고, 25년만에 부활하는 [고스트 버스터즈]의 여성판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배우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멜리사 맥카시의 인기는 북미에서 나날이 치솟았지만, 우리나라에서 멜리사 맥카시는 '듣보잡' 배우에 불과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11년 8월 25일에 국내개봉한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누적관객 6만명이라는 초라한 흥행성적을 올렸고, [내 인생을 훔친 사랑스러운 도둑녀], [히트]는 국내 개봉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스파이]는 멜리사 맥카시가 우리나라 관객에게 주연 배우로써 첫선을 보이는 데뷔작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스파이]의 북미 개봉일자는 6월 5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서 [스파이]는 북미보다 우리나라에서 무려 2주나 먼저 개봉을 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관객들도 북미의 관객들처럼 멜리사 맥카시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을까요? 그 정답은 개봉 첫주 [스파이]의 국내 박스오피스 성적을 보면 나옵니다.
[스파이]의 개봉 첫주 성적은 주말관객 56만명을 동원하며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에 이은 박스오피스 2위입니다. 전주 박스오피스 1위 영화인 [악의 연대기]와 흥행 기대작 [간신]이 [스파이]의 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스파이]는 멜리사 맥카시 외에도 제이슨 스타뎀, 주드 로, 로즈 번 등 우리나라 관객에게 익숙한 배우들이 조연을 맡았지만, 그들 모두 흥행력이 대단한 배우라고 할 수는 없기에 [스파이]는 오로지 영화적 재미만으로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2위의 쾌거를 이룬 것입니다.
이 영화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
사실 저는 [스파이]가 이렇게 관객의 좋은 평을 얻으며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북미에서 대박 흥행을 기록한 멜리사 맥카시 주연의 영화들이 국내에서는 개봉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코믹 연기는 다분히 미국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스파이]를 보니 기존의 스파이 액션 영화를 교묘하게 비틀어버린 영리한 전략 덕분에 저도 꽤 즐겁게 영화를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스파이]가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스파이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배우가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딱 알맞은 정답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동안 정답을 제시한 영화는 많았습니다. '미스터 빈'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의 대표적인 코미디 배우 로완 앳킨슨이 주연을 맡은 [쟈니 잉글리쉬], 미국의 코미디 배우 스티브 카렐이 비밀 정보기관의 사무직 요원이었다가 현장에 투입되어 멋진 활약을 펼친다는 내용의 [겟 스마트]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들 영화와 비교해서 [스파이]가 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멜리사 맥카시의 위력입니다. 어쩌면 '스파이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배우' 1순위는 로완 앳킨슨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바보 연기는 [쟈니 잉글리쉬]를 너무 가볍게 만들었고, 그로인하여 [쟈니 잉글리쉬]는 스파이 액션영화라기 보다는 단순한 코미디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겟 스마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티브 카렐은 솔직히 너무 평범한 외모를 가졌습니다. 최근 영화 [폭스캐처]에서 놀라운 연기변신을 해냈다고는 하지만 [겟 스마트]에서는 스티브 카렐 대신 앤 해서웨이와 드웨인 존슨이 더 눈에 띕니다. 그러나 [스파이]의 멜리사 맥카시는 그들과 다릅니다. 로완 앳킨슨처럼 마냥 가볍지 않으며, 스티브 카렐과 비교해서도 개성이 뚜렷하여 존재감이 막강합니다.
펑퍼짐한 아줌마 외모에 뻔뻔스러움과 거친 입담을 탑재한 멜리사 맥카시의 매력은 [스파이]에서 단연 돋보입니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CIA 내근직으로 근무하는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시). 그녀는 여러모로 완벽한 최고요원 브래들리 파인(주드 로)이 임무수행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서포터하는 것이 주요 임무입니다. 그러나 파인 요원이 임무수행 중 레이나 보야노프(로즈 번)에게 살해당하자 쿠퍼의 숨겨진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CIA 요원의 신상이 노출된 상황에서 짝사랑했던 파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쿠퍼가 직접 현장 요원으로 나선 것입니다.
[스파이]의 영화적 재미는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됩니다. 소심했던 쿠퍼가 현장에 투입되어 목숨이 한순간에 오고가는 극박한 상황을 맞이하며 점점 대담해지는 것입니다. 처음엔 쿠퍼를 현장 요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릭 포드(제이슨 스타뎀)도 결국엔 쿠퍼를 인정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이 멜리사 맥카시가 가지고 있는 배우로써의 매력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제이슨 스타뎀과 주드 로의 서포터가 빛났다.
하지만 [스파이]가 진정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멜리사 맥카시의 매력 덕분만은 아니었습니다. 폴 페이그 감독은 스파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멜리사 맥카시에게 스파이의 옷을 입혔지만, 반대로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인 주드 로와 제이슨 스타뎀에게 멜리사 맥카시가 빛날 수 있도록 보조하게끔 하는 영리한 전략을 선택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스파이 영화들이 개봉되면서 스파이에 대한 이미지는 딱 두가지로 요약됩니다. 007 제임스 본드와 같은 잘 생긴 바람둥이형 스파이와 거친 매력의 마초형 스파이가 그것입니다. 주드 로가 연기한 브래들리 파인은 바로 잘 생긴 바람둥이형 스파이의 전형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고, 제이슨 스타뎀이 연기한 릭 포드는 마초형 스파이의 전형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둘의 조화는 수잔과 부딪히며 시너지 효과를 가져옵니다. 옴므파탈인 파인 요원이 잘 생긴 얼굴과 매력을 이용해서 능력있는 쿠퍼를 자신의 서포터로 만듭니다. CIA 부국장이 "파인 요원이 자네를 이용했군."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파인 요원의 스파이로써의 전략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스파이의 대표격인 제임스 본드도 항상 본드걸을 이용해서 위기에서 벗어나곤 했습니다. 그러한 파인 요원의 옴므파탈의 매력이 있었기에 쿠퍼는 자신의 본능을 감추었다가 파인 요원의 죽음과 동시에 한꺼번에 표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포드 요원은 흥미롭게도 그동안 제이슨 스타뎀이 연기한 캐릭터들을 고스란히 닮아 있습니다. 제이슨 스타뎀은 [트랜스포터]를 비롯하여 주로 거친 액션 영화에 출연을 했습니다. 릭이 수잔에게 자신이 했던 일들을 과장해서 설명하는 부분은 그가 이전 출연작에서 했었을 법한 행동들입니다. 결국 포드 요원은 제이슨 스타뎀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코미디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포드 요원의 역할은 더 있습니다. 마초적인 그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야노프를 막을 수 있는 영웅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한 그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행동들은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스꽝스러움이 쿠퍼와 찰떡궁합을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쿠퍼가 포드 요원과 마찬가지로 점점 과격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면서 포드 요원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쿠퍼의 그러한 거친 매력은 보야노프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 외에도 수잔의 멀대같은 친구로 출연한 엘리슨 제니를 비롯하여 악녀 보야노프를 연기한 로즈 번의 표독스러운 연기도 영화의 재미에 톡톡히 한 몫을 해냅니다. 이렇듯 [스파이]가 다른 '스파이 액션 + 코미디' 영화보다 특별했던 것은 멜리사 맥카시의 남다른 존재감과 다른 조연 배우들과의 묘한 조화 덕분입니다.
평범함 속의 비범함
[스파이]는 폴 페이그 감독의 영화입니다. 폴 페이그 감독은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을 통해 멜리사 맥카시의 매력을 발견했고, [히트]를 통해 그녀의 매력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이렇게 멜리사 맥카시의 매력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아는 폴 페이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기에 [스파이]는 더욱 재미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16년 개봉 예정인 멜리사 맥카시의 신작 [고스트버스터즈]의 감독도 폴 페이그입니다.)
[스파이]를 보면 멜리사 맥카시의 매력을 영화적 재미로 활용하는 폴 페이그 감독의 전략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수 있습니다. 대개 '스파이'라고 한다면 매력적이고, 스마트한 액션이 먼저 떠오르는데, 멜리사 맥카시는 동네 평범한 아주머니와 같은 첫 인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초 액션의 대표주자 제이슨 스타뎀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거친 매력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함 속의 비범함. 그것이 바로 멜리사 맥카시가 특별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스파이]가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흥행성적을 기록하면서 이제 더이상 멜리사 맥카시는 '듣보잡' 배우의 오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멜리사 맥카시 주연의 영화가 국내 개봉되지 못하고 곧바로 다운로드 시장을 직행되는 굴욕은 없을 것입니다.
며칠전 케이블 TV에서 [히트]를 방영해주었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스파이]에서 봤던 멜리사 맥카시의 매력이 [히트]에서도 여전히 발휘되더군요.[히트] 뿐만이 아닙니다. 아직 저는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물론 [내 인생을 훔친 사랑스러운 도둑녀]와 [타미]도 보지 못한 상황입니다. [스파이]를 보며 멜리사 맥카시의 매력을 처음 알고나니 앞으로 봐야할 영화들이 갑자기 마구 넘쳐나버렸습니다.
이건 굉장히 행복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매력을 지닌 배우와 그러한 배우의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한동안 저는 멜리사 맥카시가 출연한 영화들을 찾아 보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렇듯 [스파이]는 영활르 보며 부담없이 실컷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코미디 영화임과 동시에 멜리사 맥카시라는 배우의 새로운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잡혀가는 보야노프에게 "사실, 날 좋아하지?"라며 천연덕스럽게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게 그 장면은 마치 그동안 그녀의 매력을 몰라주던 우리나라 관객에게 던지는 멜리사 맥카시의 자신만만한 한마디처럼 들렸습니다. 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젠 저도 멜리사 맥카시가 좋아졌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에 이어 [스파이]까지...
스파이 액션 영화가 자꾸 새롭게 진화되는 것 같아 기쁘다.
역사상 이런 스파이는 없었지만... 그 덕분에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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