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민규동
주연 : 주지훈, 김강우, 천호진, 임지연, 이유영, 차지연, 송영창
개봉 : 2015년 5월 21일
관람 : 2015년 5월 21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 연산군
조선시대에는 두번의 성공한 반정이 있습니다. 첫번째 반정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 반정이고, 다른 하나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반정입니다. 이렇게 반정이 일어나고 성공까지 거두었다는 것은 그만큼 왕이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최근 인조 반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천만관객 영화인 [광해, 왕이된 남자]를 비롯하여 TV 역사 드라마 <징비록>, <화정>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광해군과는 달리 연산군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이라는 오명이 씌여 있습니다. 연산군 시대를 소재로한 영화중에서 역시 천만관객 영화인 [왕의 남자]를 보면 연산군(정진영)에 대한 광기의 이미지는 광해군처럼 재평가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 연산군의 광기를 소재로한 또 한편의 영화가 개봉하였습니다. 바로 민규동 감독의 [간신]입니다.
[간신]은 연산군(김강우)의 광기와 그러한 광기를 부추겨 권력을 잡은 '간신' 임사홍(천호진), 임숭재(주지훈)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연산군은 임숭재를 채홍사로 임명하여 조선 각지의 미녀를 강제로 징집하게하고, 그렇게 강제로 징집된 여성들을 운평이라 칭하며 여색에 빠집니다. 그로 인하여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그러한 과정에서 중종 반정의 불씨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연산군을 비롯한 임사홍, 임숭재 모두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 [간신]의 주요 내용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사극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저로써는 [간신]은 개봉되기만을 기다렸던 기대작이었습니다. 사극영화의 묘미는 혼탁한 시절을 영화화하면 할수록 더욱 극적인 재미가 더해진다는 점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 왕자의 난을 소재로한 [순수의 시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 속에 살아야 했던 정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역린],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의 야망을 보여준 [관상]이 대표적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간신]은 사극영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아주 최적의 시절을 소재로 선택한 셈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산군은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이고, 연산군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악무도했습니다. 게다가 연산군의 여색에 대한 집착은 최근 사극 영화의 새로운 트렌드인 에로티즘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간신] 이전에 이미 [쌍화점], [방자전], [후궁 : 제왕의 첩] 등이 파격적인 노출씬으로 흥행에 성공한 전력도 있으니까요.
[간신]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면서 제 머릿속은 [간신]에 대한 기대요소를 딱 두가지로 압축되었습니다. 하나는 혼탁한 당시 사회에 대한 극적 재미이고, 또다른 하나는 이미 [인간중독]에서 파격적인 노출씬을 선보였던 임지연이 이끌어나갈 에로틱 사극의 정수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간신]은 딱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사극영화였습니다.
임숭재의 캐릭터를 삭제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나?
[간신]은 오프닝씬에서부터 연산군의 폭정을 판소리 가락에 맞춰 파노라마 형식으로 짧게 관객에게 선보입니다. 사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연산군은 따로 긴설명이 필요없을만큼 일반 관객들에게도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이 폭군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새롭게 재해석할 영화가 아니라면 굳이 연산군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의 러닝타임을 투자할 필요가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임숭재는 다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연산군' 혹은 '폭군'이 아닌, '간신'인 이유는 애초에 이 영화가 연산군이 아니라, 연산군의 폭정을 부추겨 권력을 잡은 '간신' 임숭재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객에게 임숭재는 연산군만큼 유명한 인물이 아닙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임숭재와 임사홍이 실존 인물인지 궁금했을 정도로 제게 있어서도 임숭재와 임사홍은 낯선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간신]은 임숭재와 임사홍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마저 연산군과 똑같이 처리합니다. 그럼으로써 연산군이 그저 폭군일 뿐이듯이, 임숭재와 임사홍 역시 그저 '간신'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임사홍은 큰 문제가 안됩니다.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간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임사홍은 연산군의 총애를 얻기 위해 둘째아들인 임희재를 희생양으로 삼을만큼 권력에 대한 야욕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임숭재입니다. 역사에서 임숭재는 아버지 임사홍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은 '간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간신]에서는 주인공인 임숭재를 좀 더 복잡한 캐릭터로 만들으려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임숭재마저 연산군, 임사홍과 마찬가지로 캐릭터 설명이 생략된채 영화가 진행되다보니 영화의 중후반부에 가서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발생하고 마는 것입니다.
자! 다시한번 임숭재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꼼꼼히 따져보죠.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대에 의주로 유배를 갔던 임사홍이 연산군대에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설수 있었던 것은 아들인 임숭재 덕분입니다. 임숭재는 어릴적부터 연산군과 함께하며 그의 총애를 받았고, 연산군과 함께 음란행위를 같이 하는 등 비행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역사에서 그는 성질이 음흉하고 간사하기가 그 아버지보다 더하였으며, 충신을 추방하고 남의 첩을 빼앗아 왕에게 바침으로써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 영화 초반 임숭재의 모습은 역사의 기록 그대로 '간신'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캐릭터 설명 또한 따로 필요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의문의 여인 단희(임지연)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임숭재의 캐릭터는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임숭재의 캐릭터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보니 갑작스러운 임숭재의 변화를 그저 단희에 대한 사랑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다.
가끔 영화에서 사랑은 모든 복잡한 문제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으로 이용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순수의 시대]입니다. [순수의 시대]는 어머니를 닮은 기녀 가희(강한나)에 대한 김민재(신하균)의 사랑으로 영화 속의 복잡한 캐릭터와 상황을 너무 손쉽게 처리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오히려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수의 시대]가 흥행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그러한 탓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간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민규동 감독은 임숭재라는 실존인물에게 단희라는 의문의 여성을 던져놓고, 그녀에 대한 임숭재의 사랑으로 영화를 이끌어 나갑니다. 임숭재는 단희를 운평으로 직접 징집했고, 그녀가 연산군의 눈에 띄게하기 위해 수련을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희에게 궁을 떠날 것으로 권하고, 여색에 집착하는 연산군의 성격을 알면서도 단희를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하기도 합니다.
임사홍이 왕의 여자인 단희에 대한 임숭재의 사랑 때문에 모처럼 잡은 권력을 놓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보니 단희를 제거하기 위해 연산군의 연회에서 단희를 죽이려는 말도 안되는 무리수를 띄게 되고, 이는 갑자사화라는 조선시대 최악의 피바람으로 연결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단희에 대한 임숭재의 사랑 때문이라니... 억측이 너무 심했습니다.
민규동 감독은 선택을 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임숭재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싶었다면 영화의 초반부터 그의 캐릭터를 차근차근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임숭재의 캐릭터를 생략하는 선택을 했다면 임숭재는 그저 '간신'으로 남겨 뒀어야 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전혀 공감하기 어려운 단희에 대한 임숭재의 사랑을 중종 반정과 엮어 놓으려고 하니 영화가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이상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또다시 문제는 사랑입니다. 어쩌면 민규동 감독은 폭군 연산군과 '간신' 임사홍, 임숭재의 이야기만으로는 영화가 너무 단조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단희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등장시켰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죽어나간 조선 신료들이 한둘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을 가슴에 품은 단희라는 캐릭터가 실제 있을 법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단희를 임숭재와 엮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였습니다. 단희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중종 반정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상력이 가미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을텐데... 굳이 캐릭터조차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실존인물 임숭재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사랑에 대한 민규동 감독의 과도한 집착이 [간신]을 이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영화의 백미는 단희와 설중매의 대결
이렇게 [간신]을 보러 가기 전, 제가 기대했던 것중 하나인 연산군 시절 혼탁한 사회에 대한 극적 재미는 임숭재가 단희에게 금지된 사랑에 빠지며 제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다른 기대요소인 에로틱 사극의 정수는 임지연과 설중매를 연기한 이유영의 놀라운 연기 대결을 통해 충분히 제 기대감을 채워주고도 남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영화의 에로틱한 부분을 임지연 혼자 이끌어 나갔다면 그다지 새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임지연은 이미 [인간중독]을 통해 비슷한 파격노출씬을 연기했었고, 임지연이 연기한 단희라는 캐릭터 또한 임숭재와의 금지된 사랑 때문에 그 신선함이 퇴색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권력욕에 불타는 기녀 설중매가 끼어들며 [간신]의 에로틱 사극은 새로운 재미를 갖추게 됩니다.
임숭재와 임사홍이 연산군 시절의 최고 권력가였다고 하지만 연산군대의 최고 '간신'은 유자광(송영창)이었습니다. 유자광은 이이첨, 이완용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간신'으로도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그 명성(?)은 이미 임사홍, 임숭재를 넘어섰습니다. 그러한 유자광이 조선시대 최고 요녀 장녹수(차지연)와 손을 잡고 임숭재, 임사홍의 견제를 위해 설중매를 내세운 것입니다.
결국 단희와 설중매의 대결은 최고 권력을 노리는 임사홍, 임숭재와 유자광, 장녹수의 대리 대결이 됩니다. 단희와 설중매의 대결이 흥미로울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이 두 캐릭터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야 하는 이유도 서로 다릅니다. 단희가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면 설중매는 권력욕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둘의 대결은 불꽃이 튀길 수 밖에 없습니다. 연산군의 광기대로라면 패배하는 쪽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죠.
비록 유자광, 장녹수의 지지를 한몸에 받은 설중매와는 달리, 임사홍, 임숭재의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한 단희로 인하여 이 팽팽했던 대결이 후반부에 약간은 빛을 잃어 버리지만, 민규동 감독은 연산군 앞에서 벌어지는 단희와 설중매의 최후의 대결을 통해 다시금 팽팽한 긴장감을 선보입니다. 분명 단희와 설중매의 마지막 대결은 지금껏 본적이 없는 한국영화 최고 수준의 에로티즘이었지만, 저는 그보다는 두 여인네의 신음 소리 사이에 숨겨져 있는 긴장감이 더욱 인상깊었습니다.
마지막 승자가 정해지는 그 순간, 그 팽팽한 긴장감이 탁 풀리며 임지연과 이유영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분명 여배우로 쉽지 않은 연기였을텐데 그들은 프로답게 완벽하게 해낸 것입니다. 민규동 감독이 그녀들의 프로의식으로 완성된 팽팽한 긴장감을 그깟 사랑을 손쉽게 포장하려하지만 않았다면 [간신]은 더욱 인상깊은 영화가 되었을텐데... 영화가 끝나고나서 처음 든 생각은 민규동 감독의 안일한 선택이 배우들의 연기력을 뒤따라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습니다.
연산군의 광기를 연기한 김강우.
조선시대 최악의 '간신'을 연기한 주지훈, 천호진, 송영창.
여자로써 결코 쉽지 않은 연기를 해낸 임지연, 이유영, 차지연.
분명 배우들은 박수받아 마땅하지만,
민규동 감독의 연출력이 그들의 연기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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