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악의 연대기] - 악(惡)의 탄생에 우리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쭈니-1 2015. 5. 19. 10:29

 

 

감독 : 백운학

주연 : 손현주, 마동석, 최다니엘, 박서준, 정원중

개봉 : 2015년 5월 14일

관람 : 2015년 5월 15일

등급 : 15세 관람가

 

 

* 제 글은 [악의 연대기] 뿐만 아니라 [끝까지 간다], [공모자들]의 스포 덩어리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죄 짓고도 잘 사는 세상

 

법치주의 국가에서 유토피아는 죄 짓고는 못 사는 세상일 것입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치루는 세상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평등한 법치주의 국가가 추구하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하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잘 사는 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라 부르짖었던 지강헌의 절규가 공감이 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의 강렬한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악의 연대기]를 봤습니다. [악의 연대기]는 손현주의 연기력과 깔끔하게 잘 짜여진 각본,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마지막 반전이 어우러진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는 스릴러 영화에 대한 장르영화적 재미뿐만은 아닙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최창식(손현주)을 바라보는 그의 어린 아들의 슬픈 눈빛은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최창식은 범죄자입니다. 비록 자신을 납치한 괴한과의 몸싸움으로 인하여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고, 어쩌면 그것은 정당방위로 무죄가 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승진을 위해 사건을 은폐합니다. 그것 자체로도 최창식은 결코 저질러서는 안될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인 것입니다. [악의 연대기]는 성공에 눈이 멀어 살인사건 은폐라는 범죄를 저지른 최창식이 당하는 처절한 죄의 댓가를 다룬 영화입니다.

 

하지만 최창식은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악의 연대기]는 철저하게 최창식 위주로 영화를 진행해나갑니다. 주인공에게 관대할 수 밖에 없는 관객은 그렇기에 최창식이 저지른 죄에 비해서 그 댓가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그의 살인은 정당방위이고, 시체를 경찰서 앞 공사장 크레인에 매달아 놓은 것은 최창식이 한 짓은 아닙니다. 

[악의 연대기]는 바로 그러한 관객의 심리를 이용합니다. 영화 초반 부하 직원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최창식의 인간적인 부분을 강조한 것도, 이웃집 아저씨같은 푸근한 이미지를 지닌 손현주를 캐스팅한 것도 바로 관객을 최창식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백운학 감독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입니다. 어차피 마약에 취해 경찰을 납치해서 죽이려 하는 범죄자 따위의 편을 들 관객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최창식을 응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관객 스스로 최창식의 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죄의 댓가를 정당하게 치루지 않고 은폐하려했던 범죄자를 응원하게 되는 꼴이 됩니다.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건이 진실이 조금씩 벗겨지며, 최창식이 과거에 저지른 죄가 낱낱이 드러납니다. 그러면서 백운학 감독은 관객에게 다시 묻습니다. '죄 짓고는 못사는 세상을 아직도 원하십니까?'

 

 

과연 최창식은 죄가 없나?

 

[악의 연대기]의 가장 뛰어난 점은 최창식이라는 캐릭터를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 냈다는 점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그는 분명 범죄자입니다. 자신의 승진을 위해 사건을 은폐했고, 수사가 진행되면서도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증거를 감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관객 입장에서 그를 미워하며, 그가 죄의 댓가를 받는 마지막 장면에서 통쾌해할 수가 없습니다.

최창식의 캐릭터가 절묘한 이유는 그가 바로 너무나도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그는 불법 도박장 살인사건을 담당한 수사팀의 막내 형사였습니다. 여론의 질타에 당시 수사팀은 사건을 조작하기로 하고, 불법 도박장에서 일하던 정신지체장애인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체포합니다. 어쩌면 불법 도박장 살인사건 조작에 대해서도 최창식은 항변을 할지도 모릅니다. 당시 나는 막내 형사였고, 위에서 시키는대로 했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그런데 그러한 변명은 우리가 늘상 해오던 것입니다. 우린 주위의 크고 작은 범죄를 모르는채하고 넘깁니다. 그것은 관례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괜히 나섰다가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내가 나선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합니다. 그 일로 인하여 누군가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나와 내 가족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창식이 영화 초반에 저지른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죽은 놈은 나쁜 놈이었고, 최창식은 정당방위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쉽게 최창식의 편이 될 수 있었으며, 그가 시체를 크레인에 달아 놓은 미치광이를 잡기 위해 나설 때에는 응원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최창식의 성공지상주의에 관객 스스로 공감했기에 가능했던 응원일 뿐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시체를 크레인에 매달은 범인이라며 경찰서를 찾은 김진규(최다니엘)는 최창식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참 어리석다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죄를 저지른다고... 최창식이 그러합니다. 애초에 자신이 저지른 정당방위 살인사건을 솔직하게 경찰에 신고했다면 승진이 무산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김진규에게 놀아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자신이 죽인 시체가 크레인에 매달리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징계받는 것으로 죄의 댓가가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김진규의 비아냥처럼 어리석습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그러한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해야합니다. 그러면서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모든 잘못이 없었던 것으로 될것이라는 희망을 가집니다. 자신의 범죄를 눈치챈 막내 형사 차동재(박서준)에게 '이 모든 일을 내가 바로 잡겠다.'라고 선언하는 최창식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범죄자인 최창식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그가 바로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간다]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영화

 

[악의 연대기]를 보고나니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끝까지 간다]입니다. 실제 [악의 연대기]의 홍보에서 '[끝까지 간다] 제작진의 영화'라는 문구가 빠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악의 연대기]는 [끝까지 간다]와 영화적 설정이 비슷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적 설정은 비슷하지만 영화의 분위기, 캐릭터, 마지막 결말 등 모든 것이 [악의 연대기]와 [끝까지 간다]는 서로 정반대 지점에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끝까지 간다]는  비리 경찰 고건수(이선균)가 어머니의 장례식날 실수로 사람을 치는 사고를 내면서 시작됩니다. 고건수는 시체를 어머니의 관 속에 숨기고 한시름 놓지만, 뺑소니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위기를 맞이합니다. 게다가 그날의 사건을 모두 알고 있는 정체불명의 목격자이자, 비리 경찰 박창민(조진웅)이 나타나며 고건수는 더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최창식과 고건수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 다 직업이 경찰이고, 사람을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으며, 사건을 은폐했다는 점이 같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고건수는 최창식과 비교해서 좀 더 악질입니다. 그가 저지른 교통사고는 음주운전에 의한 사고로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에 [끝까지 간다]는 코미디로 포장되었고, 고건수보다 더 나쁜 경찰인 박창민을 내세워 고건수에게 면죄부를 주었지만 영화가 끝나고나면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하지만 최창식은 고건수와 비교한다면 비리 경찰보다는 모범 경찰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그의 범죄는 정당방위였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고건수처럼 웃지 못한채 죄의 댓가를 처절하게 받아야만합니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경찰이라는 같은 소재로 완벽하게 다른 영화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저는 [끝까지 간다]보다는 [악의 연대기]에 더 좋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분명 오락 영화적 재미는 [끝까지 간다]가 더 좋았습니다. [끝까지 간다]는 코믹함으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담없이 웃고 즐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악의 연대기]는 응원했던 최창식의 추락을 관객 입장에서는 부질없이 지켜봐야합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백운학 감독에게 항변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분명 정당한 죄의 댓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치국가에서 정당한 죄의 댓가를 치루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유토피아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영화를 보고나니 [악의 연대기]라는 이 영화의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보였습니다. 이 모든 범죄를 기획한 차동재는 최창식이 과거에 범죄로 인하여 탄생한 악마입니다. 만약 그때 최창식이 서장(정원중)의 사건 조작을 막으려 했다면 최창식은 지금처럼 경찰로써의 탄탄대로의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범죄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차동재라는 악마는 최창식이 불법 도박장 살인사건 조작을 묵인했던 그 순간 태어난 것입니다.

 

 

절묘한 캐스팅이 이 영화의 반전의 힘이다.

 

[악의 연대기]는 최창식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영화입니다. 그러면서 스릴러 영화의 장르적 재미마저 갖추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스릴러 영화의 장르적 재미는 마지막 반전에 의한 것인데, 다른 분들은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이 영화의 반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절묘한 캐스팅에 있습니다.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손현주의 캐스팅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관객이 최창식의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손현주의 힘이 컸고, 그로인하여 이 영화의 메시지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저는 김진규를 연기한 최다니엘의 캐스팅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김진규는 차동재라는 진범을 감추기 위한 미끼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는데, 이는 [공모자들]에서 최다니엘이 연기한 캐릭터가 한 몫을 했습니다.

[공모자들]에서 최다니엘은 중국행 여객선에서 실종된 아내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불쌍한 남편을 연기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나면 최다니엘의 선한 얼굴은 악마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공모자들]은 최다니엘의 선한 얼굴을 통해 마지막 반전을 이루어낸 것습니다. 그리고 [악의 연대기]는 [공모자들]로 완성된 최다니엘의 반전 이미지를 역으로 이용합니다.

 

최다니엘이 이렇게 범인이라는 미끼를 뒤집어 쓰고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동안 차동재는 마지막 반전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조금만 더 정신을 차렸다면 진범이 차동재임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운학 감독은 김진규로는 모자랐는지 오형사(마동석)까지 동원해서 차동재에 대한 제 의심을 차단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동재를 연기한 박서준의 연기도 호평을 받아 마땅합니다. 훌륭한 연기는 두드러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두드러지지 않게 조용히 제 몫을 해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박서준은 바로 그러한 두드러지지 않은 연기를 해낸 것입니다. 그가 영화 전반에 걸쳐 조용히 제 몫을 해냈기에 영화의 마지막에 '사실은 차동재가 범인이다.'라는 반전에서 '에이, 이건 억지야.'라는 반응이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악의 연대기]에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의 후반부 너무 설명조로 차동재의 악마 탄생기를 보여준 것은 지나치게 친절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반전을 툭 하고 던져놓고 남은 여백은 관객에게 맡겨도 좋았을텐데... 백운학 감독은 감각적인 뮤직 비디오처럼 마지막 반전을 하나 하나 설명합니다. 그러한 너무 친절한 반전 설명을 제외한다면 [악의 연대기]는 근래 봤던 스릴러 영화 중에서 제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였습니다.

 

연 우리는 내 앞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범죄를 묵인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우리가 귀찮음에, 두려움에, 크고 작은 범죄를 묵인하는 그 순간

우리 또한 악의 탄생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