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한준희
주연 : 김혜수, 김고은, 박보검
개봉 : 2015년 4월 29일
관람 : 2015년 5월 4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5일 연휴중 유일한 나만의 시간
5월 1일 근로자의 날에서부터 5월 5일 어린이날까지 무려 5일간의 연휴를 맞이했습니다. 저와 구피는 한달전부터 이 황금같은 5일간의 연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을 짰습니다. 솔직히 저는 연휴기간동안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구피가 아직은 자신의 몸상태가 완벽하지 못하다며 안되겠다고해서 여행은 아쉽게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대신 구피는 5일간의 연휴계획을 알차게 준비했습니다. 문제는 너무 알차게 준비한 탓에 저와 구피가 단 하루도 쉴 시간이 없다는 것이죠. 연휴기간동안 최소한 [차이나타운]과 [스틸 앨리스]만큼은 보고 싶었던 저는 구피의 알찬 계획이 내심 아쉬웠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연휴계획이었기에 이의를 달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입니다. 애초 주말에 관람을 계획했던 용산 전쟁기념관의 <어벤져스 스테이션> 전시가 5월 1일에서 5월 15일로 개관일자를 연기했고, 5월 4일에 처가 식구들과 함께 갈 예정이었던 고양 세계꽃박람회도 구피가 피곤할 것을 걱정하신 장모님의 배려로 일정이 취소되었습니다. 구피는 계획취소로 얻은 시간을 집에서 뒹굴거리며 보내기로 했고,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연휴계획 취소로 얻은 뜻밖의 여유시간을 이용해서 제가 본 영화는 연휴 이전부터 보려고 마음먹었던 [차이나타운]과 [스틸 앨리스]입니다. 이 두 영화는 일찌감치 보려고 마음먹었던 영화이기도 했지만,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극장가를 점령한 현 시점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두 영화가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이며, 어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차이나타운]의 어머니와 [스틸 앨리스]의 어머니는 서로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차이나타운]의 엄마(김혜수)는 쓸모있는 고아들을 모아서 자신의 식구들로 만든 후, 그들을 이용해서 '차이나타운'을 지배하는 냉정하고 차가운 암흑가 보스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와는 달리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줄리안 무어)는 희귀성 알츠하이머로 인하여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자신의 병이 자식들에게 유전되었을까봐 걱정하는 따뜻한 엄마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나타운]을 본 후, 쉬지않고 연달아 [스틸 앨리스]까지 보고나니 새삼 우먼파워가 굉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2월에 대수술을 받은 탓에 몸이 성치않은 구피가 웅이를 위해 빡빡한 연휴계획을 세우고, 그 일정을 군소리없이 소화할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의 힘이 아니었을까요?
여성들의 느와르
[차이나타운]은 지하철 보관함 10번에 버려져 이름이 일영(김고은)인 아이가 '차이나타운'에서 엄마라 불리는 보스의 식구가 되면서 겪게 되는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암울하고, 소재 또한 사채, 장기적출 등 무시무시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대개 이런 류의 느와르 영화는 남성이 주인공입니다. 가까운 예로 2013년에 개봉해서 빅히트를 했던 [신세계]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나타운]은 철저하게 남성 관객을 위한, 남성 배우들에 의한 장르인 느와르 영화에 여성 주인공으로 채워 넣습니다. 바로 그러한 다른 느와르 영화와의 차별점이 [차이나타운]의 장점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가지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우리나라의 느와르 영화는 [차이나타운]이 처음일까요? 정답은 '아니오'입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2014년 9월에 개봉했던 [설계]가 있으니까요.
[설계]는 세상에서 가장 독한 사채업자로 알려진 세희(신은경)와 그녀의 심복인 민영(오인혜)의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입니다. 소재, 배경, 분위기 등이 [차이나타운]과 많이 비슷합니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은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흥행 돌풍 가운데에서도 묵묵히 누적관객을 늘려가고 있지만, [설계]는 누적관객 4만명이라는 처참한 흥행기록만을 떠안았을 뿐입니다. 과연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느와르는 프랑스어로 어둠을 뜻합니다. 느와르라는 단어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느와르 영화들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분위기가 특징입니다. 그렇기에 어두운 분위기를 압도할 수 있는 배우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르이기도 합니다. [신세계]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정민, 최민식, 이정재라는 연기력과 카리스마를 고루 갖춘 배우들의 공이 큽니다.
그렇다면 답은 나옵니다. 신은경과 오인혜를 내세운 [설계]와 김혜수와 김고은을 내세운 [차이나타운]의 차이는 바로 배우들의 연기력과 카리스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김혜수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여배우중에서 연기력과 카리스마를 갖춘 거의 유일한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타짜]에서 조승우, 백윤식, 유해진, 김윤석 등 쟁쟁한 남자 배우들 틈에서도 미친 존재감을 드러냈었고, [도둑들]과 [관상]에서도 그녀의 카리스마는 다른 남자 배우들과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차이나타운]을 보는 내내 이 영화는 김혜수가 없다면 기획조차 될 수 없었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장끼없는 민낯으로 조용히 상대방을 압도하는 그녀의 카리스마는 [차이나타운]에서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김혜수 혼자 영화를 지탱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김혜수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김고은이라는 젊은 여배우입니다.
김고은의 재발견
과연 김혜수의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에 맞설 수 있는 여배우가 가능할까요?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타짜]에서도 그랬고, [도둑들]과 [관상]에서도 그랬습니다. 김혜수의 맞상대는 남성이었습니다. [도둑들]의 전지현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김혜수의 맞상대이기 보다는 김혜수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영화의 양념역할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은 기본적으로 '차이나타운'의 지배자 엄마와 사랑이 목마른 일영의 대결을 다룬 영화입니다. 일영을 남성 캐릭터로 설정하지 않는다면 여배우중 누군가는 김혜수의 카리스마에 맞서 [차이나타운]을 이끌어 나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일을 다행스럽게도 김고은이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김고은은 정지우 감독의 [은교]에서 위대한 시인 이적요(박해일)의 세계를 동경하는 열일곱 소녀 '은교'를 연기하며 배우로 데뷔를 했습니다. 이 충격적인 데뷔작에서 김고은은 관능과 순수를 오고가며 신인배우답지 않은 대범함을 보여줬고, 대종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영화제의 신인 여우상을 휩쓸며 한국 영화계의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김고은이 주목받는 것은 순수, 관능, 카리스마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교]에서 순수와 관능을 보여줬다면, 두번째 주연작인 [몬스터]에서는 순수와 카리스마를 보여줬습니다. 연쇄살인마 태수(이민기)에 맞서 싸우는 '미친년' 복순은 바보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태수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카리스마도 보여줬습니다.
그러한 그녀의 이중적인 이미지는 [차이나타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일영은 악성채무자의 아들 석현(박보검)의 친절함에 매료되어 그를 사랑하는 순수한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차이나타운'의 지배자인 엄마를 짓밟고 일어서는 독함도 보여줍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엄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모습은 김혜수의 카리스마에 절대 뒤지지 않았습니다.
[차이나타운]은 이렇게 김혜수와 김고은이라는 신, 구 여배우 카리스마 격돌만으로도 한국 영화계에 한 획을 그을 영화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영화계는 남자 배우에 비해 여자 배우가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여자 배우만으로도 느와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괜히 제 마음이 뿌듯해졌습니다. 김고은은 이병헌, 전도연과 함께 무협액션 [협녀, 칼의 기억]과 스릴러 영화 [성난 변호사]가 2015년에 개봉 대기중입니다. 이들 영화에서의 김고은도 눈여겨 봐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쓸모가 있을까?
[차이나타운]은 압도적인 분위기와 배우들의 연기력, 카리스마로 모든 것을 말하는 영화입니다. 특히 영화에서 엄마가 "증명해봐. 네가 아직 쓸모 있다는 증명."이라며 차갑게 말할 땐 소름이 돋았습니다. 쓸모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 '차이나타운'.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또한 쓸모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냉혹한 세상은 아닐까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원시시대의 인간들은 집단을 이루고 서로의 협력을 통해서 의식주를 해결했고, 그러한 와중에 집단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약한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었습니다. 인간의 문화가 발전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집단을 이루고, 서로의 집단에 도움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일을 합니다. 노약자나, 장애인처럼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무리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의 무관심 속에 내던져집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이러한 냉혹한 세상을 알아버린 일영은 엄마에게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엄마의 식구중 정신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홍주(조현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신이 쓸모있다는 사실에 강박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식구인 우곤(엄태구)와 일영에게 달려드는 장면은 그렇기에 씁쓸하면서도 섬뜩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인 노약자와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석현을 향한 일영의 마음이 바로 그러합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석현을 죽이고 장기를 적출해서 팔아야하지만, 일영은 그러한 집단의 이익을 따르기 보다는 석현을 구하려합니다.
일영은 집단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석현이라는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부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결국 [차이나타운]은 암울하고 냉혹한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을 그리면서도 일영의 모습을 통해 인간다움의 희망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 후반부 일영과의 마지막 대결을 앞둔 엄마의 모습은 일영을 통한 희망을 암시합니다. "내가 쓸모가 없네."라며 혼잣말을 하는 엄마. 그녀는 쓸모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냉혹한 세상이 아닌, 남을 도우며 사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사람은 걸림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물론 여전히 일영이 사는 '차이나타운'은 암울한 곳이지만, 이렇게 세상은 조금씩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여성들이 그려낸 새로운 느와르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쓸모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완전히 도태시키면 안된다.
이 세상은 쓸모있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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